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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의수박 Nov 22. 2020

쓸데없이 거대해진 이상한 책임감

나는 왜 마지노선이 되었나

착한 사람 컴플렉스는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란 결국 내 자신에게 지독히 나쁜 사람이란 걸 다.


좋다, 싫다고 말하는 것도 마냥 주저하는 사람도 아니다. 내 감정에 꽤 솔한 편이며,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를 영 못하는 성격도 아니다.


성격은 대개 타고난 성정과 후천적 성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역할놀이처럼 직업인과 나 개인이 구분되듯, 직업인으로서 나에게 필요한 성격적 요소들이 후천적으로 따라붙게 된다.


실무자일 때는 잘 몰랐다. 위기의 순간에 손잡아주고 이끌어주는 선배들을 따라 방향을 설정하고 흡수하면 됐기에.


커리어가 쌓이고, 실무자에서 관리자를 겸해야 하는 시점에, 돌봐야 할 팀원들이 늘어나자  감당해야 할 것들이 많아졌다. 이 시기에 가장 무겁고 가파르게 내 어깨에 달라붙은 게, 책임감이다. 내 걱정만큼, 불안만큼 커져버린 거대한 책임감.


우리 팀은 조직의 특수성으로 불안정하지만, 단단하고 힘이 있다. 그래졌다. 그렇게 만들기위해 노력해왔다.


처음 팀에 합류했을 때.. 시멘트 빛깔의 얼굴색  마른 웃음을 짓는 팀원들에 적잖이 당황했다. 보스는 이 분야의 경험과 경력치가 최고인데 반해 팀원들은 이제 갓 대학을 졸업했거나 사회생활 경험치가 3년 미만인 병아리들이었다.


그들과 보스 사이의 중간관리자로 내가 방금 도착한 참이었고, 나는 금새 이 팀을 짓누르는 중압감의 무게를 알아차렸다.


보스가 제시하는 거대담론과 방향을 흡수하기엔 나조차 버거울 정도인데, 팀원들은 가랑이가 찢어질만큼 쫓아오느라 늘 헐레벌떡이었고, 그 과정에서 당연히 놓치는 게 많을 수밖에.


언제나 쉼 없이 일을 하는데, 무슨 일을 하는지, 왜 하는지, 어디쯤 와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하다 보니 일의 능률은커녕 실수투성이였다.


누구 하나의 문제라기보단 조직의 한계였고, 구조적 문제였다. 인원수가 문제가 아니라 사수가 없는 상태에서 일을 배워본 적 없는 이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급하다고 하니, 해야 한다고 하니 본인들이 아는 선에서 일을 처리할 수밖에...


나 역시 이 팀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 코가 석자였지만, 이렇게 두고 볼 수만은 없어 일을 배운다는 느낌이 들도록 세팅을 시작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그때는 사명감이나 책임감보다는 나는 저나이때 어땠더라, 뭘 궁금해했고 뭐가 잘 안 풀렸지? 생각하고 옛날 일기장을 뒤져보며 팀원들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해주려 애썼다.


업무지시를 내리고, 일을 처리하고 피드백을 받아보니... 역시 가장 큰 문제는 "다음 스텝을 모른 채 일을 한다"는 것과 "일하는 기분에 취해있다"는 거였다.


예측되는 상황과 발변수가 셈이 안되니, 숲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상황에만 집중했다. 차선책을 마련해두고, 변수에 대응하는 훈련을 위해, 마음의 도를 닦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 빨간펜 선생님이 됐다.


어디까지 됐어요? 그거 체크됐나? 뭐가 문제였죠? 세시. 세시까지 마무리합시다.


업무 기한을 지키는 것도, 여럿이 같이 하는 일에 데드라인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100% 만족할 때까지 붙잡는 것보다 80%라도 제시간에 끝내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려줬다.


좋은 습관보다 나쁜 습관 안 들이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꼰대라도 어쩔 수 없다. 팀원들이 일을 정석대로 배우고 그 안에서 프로세스를 체득할 수 있게 매니저 역할을 했다.


몇 달은 어찌어찌 됐는데, 문제는 나였다. 나는 실무자형 관리자. 팀원들만 봐주고 있을 수 없는, 무한 업무의 늪이 있었다. 업무시간만으론 감당이 안돼 출근시간은 점점 빨라지고, 모두들 퇴근한 시간에야 겨우 내  몫의 일을 해치울 수 있었다.


점점 더 큰 프로젝트가 몰려왔고, 도저히 시간 분배가 안돼, 팀원들의 독립을 선언했다.


여러분은 4개월 전의 여러분이 아니다. 불안해하지 말아라. 본인은 모르겠지만 정말 많이 성장했고, 충분히 할 수 있으니 모든 걸 묻지 말고 스스로 고민해보고 결정 단계에서 선택지를 들고 와 물어라.


말이 쉽지, 정말 쉽지 않았다. 마음으론 내 시간을 절대적으로 확보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보스를 비롯 다른 어른들마저 "너부터 살고 봐야지, 얘들 봐주는 시간을 절대적으로 줄여라."고 했지만.


팀원들이 일을 하며 해프닝을 넘어선 작은 실수나 사건들이 생길때면, 말짱도루묵. 따르는 책임이 무겁고 무서워 결정을 기다렸다.


품안의 자식처럼, 나는 그랬다. 나를 혹사하더라도, 나와 다른 위치에 있는 팀원들이 겪는 불합리함을 덜어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 조직의 한계인걸 인정하면서도 그들에게 이 첫직장이 도움이 되길 바랐다.


그래서 이 거대하고 요상한 책임감이 생겼다. 누구도 강요한 전 없지만 강요당한 책임감. 나는 왜 놓지 못하고, 그랬을까.


보스가 그랬다. 네가 다 끌어안고 있다고 문제가 더 잘 풀리는 것도 아니다. 성실함이 최선은 아니다.. 던질 건 던지고 떨굴건 떨궈라.


제가 그렇게 손 놓으면, 얘들은요?


말문이 막혔다. 내 방식이 최선은 아닐지라도 차선쯤은 되는 줄 알았는데, 이 또한 독이 되고 있었구나.


참으로 요상한 책임감이다. 나는 왜 내가 팀의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했을까. 모든 것들을 끝끝내 책임져야한다고, 왜.


내 뒤에 보스가 있다는 걸 잊을 때가 있다.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기분이 들 때면 더 그랬다.


내가 지금 느끼는 기분을 최소한 팀원들은 안 느꼈으면 좋겠다고. 불안정한 이 구조에서 아주 작은 울타리가 돼주고싶었던 마음.


아직도 잘 모르겠다. 


잔뜩 고민하는 내게 어떤 어른은,

그러면서 관리자가 되는거다. 모든 걸 봐줄 수도 없고 그래서는 안된다. 방법을 제시해주지 말고 어떤 걸 참고해서 답을 찾아보라고 길을 알려주는 것까지만 해봐라. 오전 오후, 하루에 두 차례 집중체크시간을 정해서 해봐라. 지금 너희팀에 필요한 건 네가 집중해서 일하는 시간 확보다.


보스도 그랬다. 안된다고 생각 말고 힘들면 뭐든 말해라. 감당이 안되면 나한테라도 던지고 일을 무조건 찢어라. 니가 잠을 조금이라도 더 자는 게 도움이 된다.


요상하게 커져버린 단단하고 무거운 책임감을 조금씩 내려놓기 위해, 이렇게 하나씩 꺼내 기록해둔다.


참으로 쏜살같이 시간이 흐르는데, 시간의 끄트머리를 붙잡고는 어깨에 이고진 짐들이 떨어질세라 잔뜩 힘을주고 유영한다.


어디쯤 와있나 종종 나에게 말을 거는데, 어지간히 지쳤는지 쉽게 말이 나오지 않는다. 마른눈물이 그렁한 웃음을 이제 그만 놓아주고 싶은데.


쉬라는 말은 참으로 쉽다.  지치지말라는 말은 스스로 건네는 응원이긴 한데, 더 내달리라는 말같아서 조금은 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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