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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의수박 Mar 27. 2022

기분은 나를 삼킬 수 없다, 절대

오랜만에 날이 좋았고, 하늘이 쾌청했고 그렇기에 걷고 싶은 날이었다.  오전에 외출 준비를 하며, 오랜만에 생각난 친구에게 만나자고 연락했더니 흔쾌히 응해줘 만났다. 회사일을 하며 만난 열 살 차이 나는 친구인데, 다정한 말과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정이 간다.  일하며 만난 친구들은 더러 이렇게, 나이를 뛰어넘는다.


오랜만에 만난 지라 서로의 안부를 챙기기 바빴다.  바쁘게 살다가 회사 그만두고 나니까, 온 세상이 아름답다고 웃었더니 친구가 의외의 말을 들려줬다.


회사에서 3개월 정도 같이 근무한  A와 친구가 서로 아는 사이인데, 둘이서 내 이야길 제법 했다고 한다. A와는 깊은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어 적잖이 놀랐다.


"사무실 돌아가는 게 되게 신기했대요. 일도 많고 바쁘고 정신없는데 모든 것들이 착착 어긋나지 않고 돌아가는 게, 하루에도 몇 번씩 직원들이 언니 붙잡고 물어봐도 두리뭉실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언제나 정확한 디렉션을 주니까 그게 그렇게 안심이 됐다고 하더라고요."


회사일이 그렇지 뭐. 갑자기 일이 쏟아지면 평소에 알던 것도 생각 안 나고, 괜히 불안하니까 자꾸만 맞는지 확인받고 싶고, 안 해본 건 더더군다나 누군가 길을 터줬으면 하는 마음... 나도 그런 시간들을 견디고 보내왔던지라 최대한 실무진들이 헷갈리지 않게 팀 관리하는데 많은 시간을 쏟아왔다.


각자 잘하는 것도, 개성도 다른데 우리 팀 일이 워낙 대내외적으로 협업하는 일도 많은 데다 일 가짓수가 많다 보니 크고 작은 변수가 늘 발생했고, 너무 쫓기고 쫓길 땐 수습하느라 하루가 짧을 때도 있으니까.  그래도 잘하려다 그렇게 된 거고, 몰라서 발생한 일들이니까, 일이라는 게 어떻게든 수습되기 마련이니, "괜찮아 괜찮아.", "생각보다 큰 일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라고 달래면서도 마음으론 한 번씩 아찔해지기도 했지.  


"언니가 일할 때 기복이 없는 게 인상적이라고 했어요. 왜 우리 주변 어른들은 뭐 잘 안되면 성질부터 내고 보는데. 언니팀은 다르더라고, 기분대로 행동하는 상사만 많이 봐서 그런가. "


물을 한 잔 들이켰다. 친구는 몰랐겠지만, 나에겐 나를 괴롭히던 말이 있었다. 팀에 처음 합류해서 와다다다 쏟아진 일들을 해치우던 와중이었고, 보스가 어느 날인가 그랬다. "네가 좋은 디렉션도 안 주면서 요구하는 건 너무 많다고 밖에서 그런 소리 들려오는 건 알아?"


그날은 잠을 잘 못 잤다. '아 왜, 밥도 아예 떠먹여 달라 그러지? 아무 준비도 없이 날로 먹겠단 심보는 그럼 준비된 거냐고?' 속으로 분개만 했다. 좋은 디렉션이란 뭘까, 피드백은 어디부터 어디까지인 거지? 보완할 사항을 체크하는 것까지? 아니면 수정할 내용까지 알려주는 거? 이럴 거면 내가 쓰고 말지, 이게 지금 무슨....!


그랬던 풋내기 시절도 있었지. 돌이켜보면 그때는  소통하는 법이 서툴렀다.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말하니, 상대가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게 잘 안보였다. 더욱이 프로젝트로 묶여있는 외부인이다 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직원 가르치듯 알려주는 것도 선을 넘는 거 같았으니까.  


나 힘든 것만 보였던 시절인지라 고백하자면 그때는 나 살아보겠다고 열심히 심리학 책도 뒤적이며 방법을 찾아보았다. 소통에도 도구가 필요하고, 상대에 따라 수단을 달리해야 한다는 것도. 상대를 어루만지는 말의 힘이나 애매했던 역할의 기준점들을 다시 세웠다.


내가 힘들면 상대도 힘들다. 일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


책에서 읽은 대로, 유튜브에서 봤던 대로 노력해봤다. 상대가 하는 것이 못마땅하더라도 그것이 최선이었을 수 있으니 "하느라 고생했다"라고 우선 공감해주고, 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나 주안점이 뭐였는지" 상대의 의사를 먼저 묻고 들어주고, "어떤 식으로 내가 도와주면 될 것인지" 물었다.  상대에게 존중받는 느낌은 정말 중요했다.


내가 먼저 묻기 시작하자, 말하길 주저하던 상대방도 솔직해지기 시작했다. "할 만큼 했다"는 답변이 "사실 이러한 점들이 이해가 안돼서 일단 써보긴 했다"로 바뀌었고, "이건 아직도 잘 이해가 안된다"며 막혀있던 부분들을 털어놨다. 나의 지레짐작은 틀렸다. 알 거라고 여겼던 부분은 몰랐고, 모를 거 같아 힘줬던 부분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쌓아 올린 시간들이었다. 소통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게 서로를 안다고 지레짐작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한 해가 가고, 새로운 팀원이 충원됐을 때 몇 가지 다짐을 했었다. 생각해보면 단순한 건데 놓치고 사는 것들이 있다. 상사의 기분에 따라 사무실 분위기가 좌지우지되지 않도록 하는 것, 눈치 보는 것만큼 슬픈 일도 없다.


국장한테 불려 가 된통 혼나고 오면 일단 밖으로 나가 한 바퀴 돌았다. 몸안에 독을 빼야 한다고, 잔뜩 구겨진 얼굴 표정이 펼칠 때까지 하늘도 보고 나무도 보고 고양이랑 눈 맞춤도 하고 그렇게 돌아오면 한결 나아졌다.  열불 나는 전화에 인상 쓰느라 이를 악물게 되는 날은,  과자를 와그작와그작 씹었다.


기분은 나를 삼킬 수 없다, 절대.


하고 싶은 말을 반으로 줄이고, 듣는 귀를 최대한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의 반의 반도 못하는 순간들이 많음을 알기에, 미처 하지 못한 말이 무엇인지 캐치하기 위해. 열심히 들어주고 한 마디씩 질문을 던졌더니 팀원들이 스스로 답을 찾는 경우가 많아졌다. "아, 말하다 보니 알겠어요. 그 방향인가 보다." 이렇게 한바탕 신나게 이야기하고 돌아설 때 기뻤다.


생각의 물꼬를 터줬을 때 참으로 기뻤다. 의지할 수 있는 선배가 되고 싶었으니까.


예기치 못한 순간에, 정말 의외의 인물에게 그간 내가 노력하고 신경 써왔던 부분에 대한 피드백을 들으니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그리고 좋았다. 어제보다 조금 더 괜찮은 사람이 되고 있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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