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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의수박 Mar 26. 2022

너를 못 믿겠으면, 너를 믿는 나를 믿어봐.

회사에서의 성장은 누군가의 지지 덕분이다

사무실에 중고신입이 들어왔다. 다른 계통에서 2년 정도 경력을 쌓고 온 친구였다. 본인이 뭘 잘하고, 뭘 하고싶은지 고민하다 주변의 권유로 입사한 케이스다. 뚜렷하게 하고 싶은 건 없지만, 다방면으로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곳이니 일단 뭐든 배울 수 있겠다 싶어 입사했다고 했다.  


워낙 강점이 강한 친구였기에 곧잘 적응할 거라 생각했는데, 입사하고 3주차쯤 됐을까 면담을 요청해왔다.


"시간에 늘 쫓기게 돼요. 다른 분들에 비해 강도가 높은 업무도 아닌데, 늘 시간에 쫓겨요.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면 안되는데, 왜 나는 이것밖에 못할까 자꾸 작아지고.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요." 

 

너무 뜻밖의 이야기인지라 잠자고 듣다가,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어떤 점이 좀 버거웠는지 물어봤다. 입사초기인지라 분위기를 익힐겸 선배들의 업무미팅과 회의에 동행시켰고 회의록을 작성케했다. 워낙 완벽에 가까운 회의록을 써왔던지라, 단순히 회의록 작성이 버거운 건 아닐거라 여겼다.


찬찬히 듣고보니, 업무의 중압감에 압도당한 거였다. 5년의 성패가 달린 국비프로젝트였고, 마지막 도전인만큼 더 잘해야한다고 오가던 말들이 모두 그 친구 어깨에 부담으로 내려앉았다. 한 사람이 네다섯개씩 사업을 관리하고, 사업을 만들어가는 모습에서 본인은 도저히 잘해낼 자신이 없노라고, 다른사람들의 몫만큼은 하고 싶은데 못할거같다고 고개를 숙였다.  


하루에도 몇 건씩 계속되는 릴레이 회의에, 아직 업무파악도 덜된 상태에서 회의록을 잘 써야된다는 압박감에 거의 풀녹취를 풀듯 회의록을 쓰고 있었고, 집에가서도 못 끝낸 문서를 쓴다고했다. 


"OO씨가 우리팀에 와줘서 정말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런 생각은 안했으면 좋겠어. 각자의 위치에서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고 봐. 정말 중요한 시기이고 성과를 내야 하는 것도 맞지만 지금 OO씨가 느끼는 부담감이나 중압감의 강도는 나나 보스가 감당할  몫고 책임감이지, 그대까지 그 부담감을 느낄 필요는 없어요.


무슨 마음인지 너무 잘알아서 그리고 미안해서 속이 쓰렸다. 잘하고싶다는 욕심, 잘해야 한다는 강박, 중요한 프로젝트라는 압박들이 자꾸만 그친구를 뒤쫓아오는 것 같았다. 생각의 고리를 끊어줘야 했다. 눈 앞에 소용돌이치는 거대한 폭풍을 거둬내고, 지금 잘할 수 있는 것들로 눈을 돌릴 수 있게. 


"사람이 하루에 쓸 수 있는 에너지의 총량은 정해져있다고 봐요. 하루에 10만큼 쓸 수 있는데, 자기가 오늘 5개의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 같아? 모든 일을 같은 강도로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되고. 가장 집중이 잘되는 시간에 처리해야 하는 중요한 일들과 짬짬이 처리해야 하는 일, 시간을 두고 경과를 지켜봐야 하는 일들이 있거든. 그냥 생각나는 대로 일을 하지 말고, 업무순위를 정해 일하는 루틴을 만들어야 안지치고 오래 할 수 있거든."


나는 그 친구에게 3가지를 주문했다. 

1) to do list를 써서 해야 할일들의 중요도와 업무시간을 확보해 집중도있게 해볼 것 -> 본인 업무스타일을 파악해 시간을 효율적으로 안배하고, 덩어리 시간을 확보하는 게 필요하다.


2)업무를 꼼꼼하게 쳐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데드라인이 중요하므로 기한 내 업무를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할 것 -> 중간 피드백 과정을 통해 방향성을 재확인하고, 시간 내 마무리짓는 훈련이 필요하다.


3)하루에 30분씩이라도 시간을 내어 다른 이들의 업무를 파악해볼 것 -> 우리 업무는 유기적으로 연결돼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업무라 할지라도 평소에 숙지해두고 있으면 일을 하는데 유용하다. 


무엇보다, 신입이니까 신입만큼만 해주면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신입시절엔 실수해도 되고, 모르는 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요. 아니 처음부터 잘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닐까? 벌써부터 선배들처럼 잘하고 싶다는 건 욕심이지, 안그래요?  한계단씩 잘 오르고 있으니까 괜히 조급해하지 말고, 본인을 못 믿겠으면 나를 믿어봐요. 내가 보기에 그대는 잘하고 있어."


아주 오래 전에, 내가 잘하고 있나 매순간이 불안했던 그 시절에 선배가 해줬던 말이다. 


"니가 너를 정 못 믿겠으면, 너가 믿고 좋아하는 내가 하는 말을 한 번 믿어봐. 너 정말 잘해내고 있어."


한동안 가장 크게 의지가 됐던 그 말을, 이제는 누군가에게 돌려줄 수 있어 다행이다. 


저 친구는 앞으로도 쭉쭉 성장해 갈 것이다. 면담 이후에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 진 듯 보였고, 본인의 의사를 피력하기도 하고, 잘하는 것들을 하나씩 찾아가는 게 눈에 보였다. 


그리고, 나 또한 반성했다. 내가 은연 중에 뱉는 말들이 누군가에겐 생각보다 더 큰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음을 망각했다. 잘해보자는 나의 다짐이 누군가에겐 부담이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을 못해봤다. 


내가 좋아했던 그 선배를 떠올렸다. 선배는 항상 똑같았다. 프로젝트 결과가 좋아도 크게 들뜨는 법도 없었지만, 크고작은 일들이 벌어져도 담담했다. "괜찮아. 수습 안되는 회사 일이란 없어. 방법 찾으면 되니까 그렇게 죽을 상 하지 말고, 응?" 선배는 그야말로 우리팀의 안정제였다. 


맞아.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면담 이후 나 역시 달라졌다. 기분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 되기로, 일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로. 물론 쉽지는 않지만 어제보단 오늘이 더 나아지고 있는 건 틀림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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