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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주일장춘몽 Apr 26. 2022

재능기부의 서글픔

뭐라도 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우울의 늪으로 점점 더 빠져 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런데 뭘 할 수 있을까? 지금껏 30년 가까이 해 온 일을 여기서는 할 수가 없었다. 그 일은 방송국이 있어야 하고 제작사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불가능하다. 아무런 약속도 없이 프로그램 기획안만 쓰는 일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


공주시 홈페이지를 기웃대다가 평생학습 프로그램을 발견했다. 시작은 남아서 주체를 못하는 시간에 뭘 좀 배워볼 것이 있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재능기부 강사를 모집한다는 안내가 눈에 들어왔다. 뾰족한 재능이랄 건 없지만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 같아 반가웠다.


양식을 다운받고 기획서를 만들었다. 먼저 입시를 앞둔 고3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대입 수시 자기소개서 쓰기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목적을 가지고 뭔가를 알리는 글을 쓰는 일에는 노하우가 있고 아들이나 주변 아이들의 자기소개서를 도와준 경험이 있기에 할 만 하다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곳에 자소서 첨삭을 원하는 아이들이 도움 받을 만한 곳이 없어 보였다.


다음으로 간단한 영상물을 제작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뭘 만들 것인지 어떻게 만들 것인지 기획하고 영상 내용을 구성한 뒤 접근하기 어려운 정식 장비 대신 스마트 폰으로 촬영하고 편집해서 나만의 짧은 동영상을 완성하는 것이다.


두 가지 강의를 정리해서 강사 지원서와 함께 공주시청에 보냈다. 그리고 곧 강의를 개설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공주 ‘꿈 창작소’에서  공주 금학여고 3학년 아이들 몇 명을 대상으로 방학 중에 자소서 쓰는 법을 강의했다. 강의라기보다는 함께 고민하고 함께 자소서를 썼다.

영상 만들기는 ‘의당면’에서 개설됐다. 주민자치위원들을 대상으로 주민자치위원회 홍보물을 만드는 프로그램이었다.

이밖에도 ‘공주 청소년 문화센터’에서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미디어리터러시, ‘공주대학교부설 청소년센터’에서 특성화고 3학년 학생들의 영상자소서 제작을 강의했다.


작가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 하다가 남들 앞에서 강의를 한다는 것은 너무 다른 일이고 준비도 많이 필요했다. 힘들었지만 새로운 경험을 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다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지방은 대도시와 달리 나라에서 혹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원하는 부분이 많다. 도시에서는 수강료를 내고 배워야 하는 것들을 지방에서는 무료로 배울 수 있다. 수강생의 자발적인 선택이 아니라 결과물을 내기 위한 단체의 의도가 앞서는 프로그램도 있다. 그러다보니 수업에 참여도가 떨어진다. 내가 들인 시간과 공에 대한 적정한 보상은 고사하고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싶을 때도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하는 강의와 이 지역에서 먹히는(?) 강의에 많은 괴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재능기부는 나의 시간과 그동안 쌓아온 노하우를 남을 위해 쓰는 일이다. 주머니 대신 마음을 채운다. 그런데 마음도 채워지지 않는다면... 그래도 계속하는 게 맞는 걸까? 그게 재능기부를 내세우는 자원봉사의 숙명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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