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꼴라 싹이 여기저기서 고개를 쳐들 무렵부터 생각했다. 마침내 끝까지 잘 키워보리라 다짐하는 계기가 됐다. 현재 나는 이곳에 아는 사람이 없으니 남편에게 분양 공고를 하고 신청자를 받으라고 얘기도 해뒀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뭘 모르는 망상이었는지 깨닫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싹을 내밀고 한참을 정체기에 있던 루꼴라들이 드디어 쑤욱 자랐다. 기가 막힌 발아율을 뽐내는 루꼴라들은 곧 집이 좁다 아우성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한참을 자라지도 죽지도 않고 웅크리고 있으면서 루꼴라들은 뿌리를 뻗어가고 있었다.
콩나물시루급 루꼴라 밭
그 사정을 알 길 없던 나는 루꼴라에게 원룸을 분양해주기로 했다. 2l 생수 PET병의 2/3 지점을 자르고 뚜껑을 닫은 다음 뚜껑에 구멍을 5~6개 뚫었다. 윗부분을 뒤집어 1/3 남은 아랫부분에 끼워 넣으면 원룸 완성.
문제는 PET병의 수급이었다. 우리 집은 생수를 사 먹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또 남편 찬스. 학교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버리는 PET 병을 수거 해오라 주문했다. 분리배출하려고 찌그러트리지 않은 PET병을 찾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일차로 10개의 원룸이 준비됐다.
PET병에 흙을 3/4 가량 담고 먼저 물을 흠뻑 준 다음 루꼴라와 주변의 흙을 함께 떠서 옮겨주고 흙으로 잘 덮어주면 되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겨우 떡잎이 나기 시작한 루꼴라를 이주시키는 일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엄청나게 정교함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시작은 배달음식에 따라오는 일회용 스푼이었다. 루꼴라를 뿌리째 떠내려고 숟가락을 찔러 넣는 족족 희미하지만 분명한 ‘우지끈’ 소리가 이어졌다. 뿌리가 사정없이 잘리는 소리였다. 꺼내보니 겉으로 보이는 줄기보다 땅속에서 자란 뿌리가 훨씬 길었다. 깊었다.
도구를 바꾸기로 했다. 작은 베스킨 000 아이스크림 스푼. 또 몇 개의 뿌리를 잘라먹고 다시 도구 교체. 폭이 좁고 기다란 티스푼을 가져왔다. 가운데 꽃 그림이 그려진 포크와 티스푼 세트. 오래전에 엄마가 사주셔서 잘 쓰던 건데... 아까웠지만 생명을 살리는 일에 기여한다는 미명 하에 실험 도구로 합류시켰다. 루꼴라 싹 사방으로 티스푼을 최대한 깊게 찔러 넣고 살살 움직여서 한 번에 담뿍 떠냈다. 흙을 채운 PET병 가운데 깊이 자리를 내고 루꼴라 싹을 넣은 다음 흙으로 덮고 물을 흠뻑 줬다. 최선을 다했고 기다려봐야 알겠지만... 살릴 수 있을 것 같다.
PET병 10개를 다 채웠는데 분리해야 하는 루꼴라는 아직도 너무 많이 남았다. 하는 수 없이 1 루꼴라 1 PET병에서 3 루꼴라 1 PET병으로 수정. 미안하게도 좁은 PET병 안에 3 루꼴라를 이주시키느라 목이 부러진 아이들도 여럿 된다. 다 여러모로 무지했던 내 탓이다.
밭을 분리하고 원룸을 만들어 따로 살림을 내주니 루꼴라 밭이 조금은 정리가 된 듯하다. 분무기를 새로 사고 조리도 새로 장만하면서 정성껏 물을 주고 해가 좀 더 잘 드는 위치로 이리저리 옮겨주면서 키웠더니... 며칠 만에 아기 루꼴라가 청소년이 됐다. 어찌나 잘 자라는지. 분리해 준 밭의 루꼴라도 잘 자라지만 씨앗을 뿌린 원 밭의 아이들은 완전 "봉두난발"이다. 까짓 봉두난발이면 어떠랴. 잘 자라주어 기특하기만 한 것을.
봉두난발 루꼴라 사이에 새로 이주한 루꼴라들
드디어 루꼴라가 집을 떠난다. 남들에게 줘도 욕먹지 않을 만큼 자랐다. 전날 물을 주고 떡잎을 잘라주었다. 목욕하고 이발하니 한인물 난다. 그동안 이 아이들에게 쏟은 정성을 가져가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알까? 좋은 주인 만나 부지런히 따 먹히면서 잘 살아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