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뿌린 위치가 어딘지 기억나지 않아서 대충 아무 데나 묻었다. 통통해질 때까지 불려서 묻었기 때문에 금방 싹이 올라올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각 같지 않았다. 호랑이 콩은 나랑 인연이 아닌가 보다.. 생각하고 그 근방에 고수 씨를 새로 심었다.
호랑이 콩 ①
어느 날 아침 흙이 들썩거린 것이 보였다. 여태껏 보지 못한 모습이다. 루꼴라, 바질, 고수처럼 여린 새싹의 형태가 아니었다. 응? 저건 뭘까?.... 앗! 호랑이 콩이다!!
잎이 삐죽 나오는 것이 아니라 줄기가 먼저 보였다.(나는 아직 인증숏에 약하다. 사진이 없다ㅠ 진짜 예뻤는데..) 신기했다. 한 눈에도 싱싱해 보이는 초록 줄기가 고개를 처 들려하고 있다.
오~~ 오후가 되니 바짝 고개를 들었다. 조글조글한 어린잎이 보란 듯이 하늘을 향해 손을 뻗기 시작했다. 이렇게 반갑고 기특할 수가... 그동안 안 나온다고 그렇게 타박을 하고 한숨을 치쉬고 내쉬었는데 이렇게 장군감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일단 모습을 보여준 호랑이콩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란다. 아니, 오전 오후가 다른 것 같기도 하다. 콩 심은 콩밭에 콩 나올 기미가 없다고 이주시켰던 루꼴라들을 이제는 치워줘야 하나 싶기도 한데 아직은 좀 더 두기로 했다. 식집사 선배는 아까워도 선택과 집중을 해줘야 어느 한쪽이라도 좋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맞다. 양손에 떡을 쥐고 있으면 고민하다가 둘 다 맛 없어진다.
호랑이 콩 ②
루꼴라 모종을 데려간 남편 지인이 고수를 좋아한다고 해서 루꼴라 2차 분양 때 고수 모종을 주기로 했다. 고수는 애초에 분양 계획이 없었던 터라 상추 상자 한 귀퉁이에 새로 나는 고수를 페트병에 옮기는 작업을 해야 한다.
고수 싹 몇 개가 함께 뭉쳐있고 제법 자랐기에 루꼴라 이식용 티스푼은 적당하지 않다. 일회용 스푼도 건너뛰고 바로 작은 모종삽을 들었다. 모종 주변 5센티 정도 되는 지점에 삽을 쑥 꽂았는데 이번에도 ‘우지끈’ 소리가 났다. 이상하다. 아직 이 정도는 아닐 텐데...
이미 벌어진 일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사방에 삽을 찔러 넣고 흙과 함께 고수 싹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 나서 알았다. 그 ‘우지끈’의 주인공이 무엇이었는지. 고수 싹 밑에 이제 막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호랑이 콩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껍질이 반쯤 벗겨지고 뿌리가 몇 개 나 있었다.
헐~ 이게 무슨 일 이래.. 고수 싹을 떠내고 호랑이 콩을 얼른 묻어주었다. 뿌리가 조금 상하긴 했지만 지금까지 베란다 실험실을 관찰한 결과 식물들은 생각보다 생명력이 강하다. 그동안 그렇게 못 믿고 못 기다리느라 이런저런 시행착오와 사고를 벌였지만 이제는 좀 믿어주기로 했다. 나도 그 새 마음이 좀 자란 모양이다. 새 흙을 두둑하게 덮어주고 물을 충분히 주었으니 이제 기다리는 일만 잘하면 된다.
호랑이 콩 ③
쑥쑥 자라는 호랑이 콩 ①에 물을 주다 보니 주변에 뭔가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살펴보니 언제 심었는지 알 수 없는 호랑이 콩 한 알이었다. 썩지도 않았고 비쩍 마르지도 않았다. 아직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얼른 다시 묻어주고 흙을 덮고 물을 주었다.
아직 때를 기다리고 있는 녀석이면 좋겠는데...
잘 기다려주면 되겠지? 믿는다!
식물도 다 때가 있는 법인데 왜 그걸 기다려주지 못할까? 내 맘대로 일찍 심고 내 맘대로 싹 나올 시기를 예상하면서 왜 싹이 안 나오냐.. 망한 거 아니냐.. 갈아엎어야 하는 거 아니냐.. 혼자 호들갑을 떨고 제 속을 제가 긁는다. 때가 되면 이렇게 알아서 나올 것을.
미물도 이런데 하물며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랴. 느긋하게 기다려주지 못해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남편에게 모진 소리를 내뱉었다. 알량한 선배 호칭 뒤에서 후배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다 내 마음이 조급했기 때문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될 것을. 다 잘 될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