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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유 Oct 20. 2024

그해 여름날의 기억 2

폐허도 그런 폐허는... 전쟁터였다

기다란 그러나 높지 않은 뚝방 하나와 폭이 7-8미터쯤 되어 보이는 시멘트 도로를 지나면 뚝방을 따라서 기다랗게 줄지어 서있던 집들이, 그 집들이 온데간데 없어졌다.

바다를 마주하고 섰던 동네의 집들은 순서를 따지자면 예닐곱은 지나서야 겨우 사람이 살았었구나 싶은 그런 집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더랬다.


기억이 남아 있는 어릴 때부터 몇 차례의 큰 태풍이 지나간 것을 동네의 집들이 부서진 것을 보며 알아왔지만, 이번처럼 처참하게 일그러졌던 모양새의 기억은 없었다.

흡사 시가전을 하는 전쟁영화에서 포탄에 일그러지고, 탱크가 몇 대는 지나갔음직한 그런 장면에서의 폐허였다.


'부분파손', '반파', '전파'라고 하며 주택이 부서진 정도를 조사하기도 했고, 우리 집도 전파로 분류된 적이 있었으나, 그때도 집의 형태는 있었으며, 조립식 간이침대에서 철 없이 장난스러운 잠에 빠져들기도 했던 것이 중2 때였던가 그랬다.


하지만, 이번에는 콘크리트 기둥 몇 개 말고는 내 방이 어디였는지, 여기가 정말 우리 집인지조차 구분이 되질 않았다.

그나마 우리 집은 그런 형체라도 남았으니 집이었겠다 싶지만, 옆의 집들은 그것마저도 남아 있질 않았으니 글자 그대로 폐허였던 것이다.


세간살이라고 해봤자 남겨둔 것 없이 깡그리 바다가 휩쓸고 가버렸으니 간장독 하나 온전하지 않은 폐허의 집터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외삼촌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는지 한참만에 나를 알아보셨다.


그 밤에 물이 들어찬, 그토록 세찬 파도가 출렁거리던 집으로 뭘 챙기려고 들어가셨는지 아버지는 헤엄쳐 나오시다가 깨어진 유리에 허벅지를 길게 베이기도 하셨단다.

그리고는, 태풍이 올 때마다 피난을 가곤 했던 집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큰댁에 가보라고 하셨다. 동생들이 거기 있으니 동생들을 데리고 함께 외가에 가 있으라고 하시면서.


폐허로 남은 집터에서 내가 할 일이란 없었다.

무엇인가 남아 있는 것이 있어야 청소를 하던지, 물에 씻기라도 할 것인데, 그런 것들이 남아 있지를 않았으니.

무엇인가 가슴속에서 무겁게 짓누르는 그 뭔가가 있었는데,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큰댁으로 가서 두 동생들을 챙겨서는 외가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우리가 온다는 소식은 외삼촌이 전하셨는지 싸리문을 밀고 들어서니 할머니께선 우리가 온다는 소식에 텃밭에서 따오신 깻잎과 호박잎, 고추와 오이 등 파릇한 채소들을 씻고 다듬으시며 아픈 허리를 안고 계셨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선 윗마을 방앗간으로 쌀을 찧으러 가셨다고 하셨다.


우리 형제의 짐이라고는 책가방 몇 개가 전부였지만, 더넓은 대청 툇마루 한 쪽에 가지런히 내려놓고서 윗마을 방앗간으로 향했는데, 도중에 방아를 찧어시고 손수레를 끌고 오시던 할아버지를 마중했다.

며칠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지만, 그날 할아버지께서는 쌀 두 가마니를 싣고 방아를 찧으러 가신 줄 알았지만, 방아를 찧으며 껍질이 벗겨진 하얀 쌀과 함께 붉은빛의 밀이 쏟아졌으니 얼마나 어이가 없으셨을까.


결국, 우리는 며칠뒤부터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밀밥을 먹었는데, 처음에는 하얀 쌀밥의 부드러움에 익숙해 있던 입이 밀잡곡밥의 까칠함에 낯설어했더랬다.

하지만, 입맛은 금방 숙해져서 그 고소한 밥을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이따금씩 그때의 고소했던 그 밀밥맛이 입맛을 다시게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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