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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유 Apr 21. 2024

절대 치질은 아닙니다!


덜컥 겁이 났었던 것이 분명했다.

지난 몇 개월 화장실 가는 횟수가 확실히 늘었다.

한 번 가면 볼 일 보는 시간도 오래 걸린다.

화장실에 앉아 있는 그 시간만큼 이런저런 상념에 사로잡혀 머릿속이 불편했는데, 요상하게도 정작 배속은 불편하지 않았다.


그 길로 오후 검사스케줄을 조정하고 병원으로 향했는데, 택시를 타자마자 갑작스레 눈앞을 가리는 아이들과 아내의 얼굴.

병원에 도착하고 난 후에도 떠나지 않고 한참 동안이나 내 머릿속에서, 눈 앞에서 맴을 돌았다.


항문외과에 진료접수를 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내 이름을 부르는 듯 해서 안내모니터를 보니 깜빡거리며 나를 찾고 있는 간호사가 보였다.

엉덩이에 자석이라도 붙었는지 겨우 몸을 일으켜 따라 들어가니 온통 새하얗다.


하얀 문짝에, 하얀 벽면에, 하얀 가운을 걸치고 하얀 얼굴에 핏기도 없어 보이던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담당의사.

그 앞에 놓여 있던 앉은뱅이 무빙의자에서 잠시 문진을 했다.


그리곤, 길다란 커튼이 축 늘어진 간이침대에 나를 엎드리게 하더니 살펴본다며 바지를 내리게 했다.

이상하게도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를 까도 수치스럽지 않은 것을 보면 병원에선 그것이 당연해서일까 아님, 건강관리를 제대로 못했다는 자책 때문일까.


항문내시경을 엉덩이에 꽂았는데, 이내 빼고는 한 번 더 봐야겠단다.

이번엔 조금 더 아플 거라던 그의 말이 묘하게 거슬렸다.


내시경을 조금 전보다 더 깊이 넣어서는 뭘 찾아낼 듯이 이리저리 돌리는 듯 하더니, 촤륵촤륵 사진을 찍는 소리도 몇 차례 들렸다.


허여멀건 얼굴에 홍조를 띈 것이 약간 놀랐었나?

빨갛충혈된 눈으로 외과에 연결해 드릴 테니 외과 진료실 앞에 잠시만 대기하면 된다며 절대 집에 그냥 가면 안 된단다.

그리곤, 절대 치질은 아니란다!




몇 발자국 옮기면서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사라졌던 아이들과 아내의 얼굴이 다시 뜀박질을 했다.


외과 진료실 앞에서 잠시 대기하기는 했었는지 앉자마자 내 이름이 또렷하게 들렸다.

간호사를 앞세우고 진료실로 들어서니 조금 나이들어 뵈는 의사는 연신 안경을 치켜 올리며 항문외과에서 넘어온 내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 보고 있었다.


내게 가벼운 눈길 한 번 주더니 간호사를 불러서는 내시경 스케줄을 조정하고는, 이틀뒤에 날을 잡더니 조직검사를 하는 건 아마도 확인차원이 될 듯 하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절대 치질은 아니라며 티브이 드라마에서나 들어봤음직한 대사를 한다.

전조가 있었을 텐데 왜 이제야 왔는지, 그동안 꽤 아팠을 거라며 사진상으로 봐도 꽤 진행이 된 듯 하단다.


이후에 몇 마디가 더 왔다갔다 했지만, 그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시경 하는 날에 보호자와 함께 오라고 했으니, 이틀뒤에 아내와 함께 갔던 듯 한데, 아내에게 뭐라고 말하며 함께 가자고 했는지도 기억이 없다.


내가 암에 걸렸다는 믿고 싶지 않은,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머릿속이 텅 비워진 듯 멍했는데 그 때문인지.

나중에 수술 뒤에 단기간에 세 차례나 수술을 받으며 전신마취를 해서 기억장애가 생겼을 수도 있다는 의사 말대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내에겐 치질인 듯 해서 수면내시경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싶다.

옆에 있는데, 살짝 물어볼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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