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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유 Apr 17. 2024

퇴사, 신림동 그리고 배를 지었다


퇴사했다.

돌이켜보면 지난 몇 년동안의 내 삶은 행복에 겨운 환희는 없었더라도,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고 마냥 암울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치게 흘러가서 되돌아 나올 수 없게 되기 전 방향타를 돌려 정반대의 침로를 따라가 봤고, 그 끝이 비록 실패로 끝나긴 했어도 천길 낭떠러지는 아니었으니 그나마 다행스럽다고 해야겠다.


나이 서른이 넘어 남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공기업을 퇴사한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시기와 질투는 아녔겠지만, 흔히들 하는 말로 "또라이"라는 말로 내 결정을 말리는 친구놈들도 있었는데, 그들중에는 권고사직을 당한 친구도 있었다.


난 그것도 모르고 그 친구에게 낚시를 가자고 꼬득이곤 했으니, 얼마나 우스꽝스러웠을까.

그것도 IMF위기로 너나 할 것 없이 허리를 졸라맨 잔뜩 움츠러든 시기였으니 말이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습관처럼 그렇게 회사를 다니고, 내 눈에 드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난 그 쉬운 길에서 발을 빼서는 지금 걸어가야 하는 그때만큼은 결코 쉽지 않은 인생행로의 출발점으로 옮겨간 것이었다.




다시 신림동에서...

책보따리 하나, 옷가지 가방 하나 둘러메고 다시 신림동을 향했다.

'대웅고시원'...후배가 미리 점지해 놓은 고시원이었다.

사시ㆍ행시ㆍ외시...3시생들만 입실한다는 고시원으로 신림동 고시촌에서도 분위기 좋기로 소문나 있다고 했다.

그래, 더도 말고 3년, 딱 3년만 책속에서 죽는다는 각오로 살아보자 하며 시작한 신림동 고시생활의 시작이었다.


그 3년 동안 신림동에서, 안암동에서 책 보는 재미에 밤을 지새웠던 날들은 머릿속 기억으로만 남았지만, 덕택에 지금도 인연을 이어가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때까지 인연을 이어가던 몇몇 이들은 떠나보내기도 했고, 그들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짧은 이야기글로 써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다.


신림동에서 안암동을 오며 가며 보냈던 3년이란 시간은...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잘 단련된 철인처럼 열정적으로 살았던 날들이었다.

새벽 5시면 어김 없이 일어나 관악산을 올랐고, 샤워 후 간단한 아침식사, 점심식사 때까진 책만 봤다.


그리고, 다시 공부를 하고 저녁은 건너뛰거나 간단하게 입가심으로, 책을 덮으면 새벽 1시.

이따금씩 책을 보다보면 5시 알람이 낮게 울기도 했다.


일주일에 이틀정도는 안암동으로 대학원을 다녔고, 스터디그룹의 세미나가 있기도 했다.

그런 날엔 이래저래 뺏긴 시간이라며 의례히 밤을 지새웠으니 나중엔 후배들이 아예 찾지를 않았다.


비록 결과만 봤을 땐 분명히 실패한 도전이었지만, 그렇게 보낸 3년의 시간이 실패로 인한 후회만 남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쩌면 내 인생 최초의 실패가 준 그 패배와 절망감에 한 해의 끝무렵부터 또 다른 한 해의 시작이었던 3개월에 가까운 시간을 술로 허투루 보냈다는 그것만큼은 지금 생각해도 충격이긴 했었나 보다.​


여하 간에, 2차시험 떨어지고 나니 약속했던 3년이 지났다.

몇 개월 동안의 밤낮이 바뀐 생활을 끝내고, 거기서 새로운 시작을 했는데, 그동안에 몇 가지의 사건과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사천에서 통영으로, 통영에서 다시 거제로의 시작이기도 했다.




배를 지었다!

거제에서의 생활은 사랑하는 가족을 주었고, 내 인생 새로운 전환기의 인연들을 만날 수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렇게 만난 인연들 중 한 사람의 도움으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조선소 일을 시작하게 되었으니, 빅 3 조선소 한 곳에서 원유탐사선인 드릴링 리그선과 드릴쉽을 짓는 과정 중 한 파트의 제작을 검사하는 일이었다.


웬만큼 영어회화 능력을 갖고 있었으니 선주 측 크루들과 일하며 설계와 기계시스템, 생산제작 프로세스에 대한 이해를 익히고, 인스펙터로서의 기본자질과 능력을 단기간에 쌓는 것이 급선무였다.


퇴근 후엔 직장인과 학생들을 상대로 수능과 토익등 영어학습능력을 가르치는 일과 조선소에서의 업무 두 가지를 이어가며 나중을 위한 공부까지 하는 일이 조금은 피곤하고 힘겨운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장에 부담스럽고 무리가 되더라도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다그치기도 하고, 다독이기도 하며 잘 버텨 나갔었는데, 그것이 또한 결국에는 내 건강을 해치는 일임은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으니 아쉬움이 남는다.


브라질의 석유시추 회사인 페트로서브사에서 발주해서 건조 중이었던 드릴링 리그선인 카타리나에서 시작한 업무는 생소한 일이었지만, 석유탐사선의 기계구조와 파이핑 생산작업을 공부하면서 재밌는 일이 되어가기도 했다.


그렇게 업무에 익숙해가는 과정에도 시니어들과 선배들, 크루들로부터도 이런저런 배움과 도움이 있었으니 고마운 일이었다.

때로는 크루들과의 의견충돌ㆍ언어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현장에서 격론을 벌이기도 했지만, 그것도 업무에 숙련되어 가는 과정의 하나였고, 나중에는 오일맨으로서의 삶을 꿈꾸었던 내겐 좋은 경험들이기도 했다.


5월경, 한창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업무에 익숙해져 갈 때쯤 갑작스런 몸의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이따금씩 몸이 보내는 이상신호를 무시하며 몇 개월을 보냈다.

물론, 거기엔 1년 전의 건강검진과 프로젝트 진입 전 건강검진을 너무 믿었던 이유도 있었다.


살아오면서 그처럼 뜨거웠던 여름은 처음이었던 듯 했다.

한여름 태양빛을 받은 철판은 말 그대로 불판에 놓여 뜨겁게 달궈진 팬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날도 그렇게 검사를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오는데, 여느 날과 달리 강력한 신호를 보내는 몸의 이상함에 급히 화장실을 찾았다가 너무 놀랐었다.

변기에 가득했던 선홍빛 선혈과 핏덩이들.

혈변이라고 하기엔...차라리 그냥 낭자한 피였다.


녹색 검색창에서는 치질과 직장암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었고, 내가 직장암에 걸릴 이유는 없었으니 당연히 치질일 거라고 자기 암시를 줬지만, 가슴 한구석에서는 직장암임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던 듯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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