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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유 May 13. 2024

드디어 시작된 화장실 전투!

퇴원 전, 환우회에서 장루복원술 이후부터 진짜 투병이 시작된다는 이야기를 읽었을 때만 해도 단순히 "화장실을 자주 가겠구나"했다.

그리고, 자주 가는 이유가 납득이 되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항문에서 배출하기 직전 변을 저장하고 있어야 할 직장이 없으니 결장까지 소화흡수작용을 거치고 남은 배설물이 저장이 되질 않으니 당연한 것이겠다.


하지만, 그렇게 몇 차례 배출하고 나면 더 이상 배출할 것이 남아있질 않을 텐데, 그러고도 화장실을 더 가야 하는 이유는 또 납득이 되질 않기도 했다.


장루를 하고 있는 동안에 작전을 세웠다.

일단, 먹는 양이 적으면 배출되는 것이 적겠지.

게 먹어야 하겠다.

그래서 하루 한 끼 식사로 줄이기로 했다.

"한 끼니만 먹으면 배가 많이 고플 텐데"라는 생각도 들었고, 아내와 지인들이 의구심을 가지기도 했다.

그래서, 몇 가지 약재와 항암에 좋다는 풀뿌리 몇 가지를 넣어서 끓인 뜨겁다 싶은 물을 2리터 이상 자주 즐겨 마셔 보기로 했다.

약물을 즐겨 마시는 것도 변을 만드는데 영향을 주긴 하겠지만, 그 영향이 미미할 것은 분명하겠다.


다행히 본가와 처가에서 항암에 좋다는 약제는 어찌 보면 무한정으로 공급할 수도 있으니 그건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다.




장루복원술을 마치고 퇴원했다.

먹는 항암제와 지사제, 소화제까지 처방받아서 약만 따로 한 꾸러미였다.

항암제는 그렇다 치고, 지사제와 소화제까지라니.

지사제는 화장실을 너무 자주 가거나 장시간의(?) 외출용이라는데, 몇 차례 먹었지만 별 소용이 없어서 거의 먹지 않았고, 그다음 외래방문 때 끊었다.


퇴원하고 이틀 동안 한 끼를 먹고, 물만 마셨다.

가벼운 운동을 겸해서 뒷동산으로 산책을 다녀왔고, 장승포 양지암 조각공원으로 꽃구경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리고, 사흘째.

정오가 지나면서 시작된 첫 화장실 전투는 한밤중이 되어서도 멈출 기미 없이 계속되었다.

복원술 이후 퇴원 전 이틀 동안 볼 일을 보지 못하고 집에 왔으니 5일 만에 몸속에 쌓여있던 변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아니다, 변이 쏟아진 것은 두 차례였고, 나머진 찔끔찔끔 이었다.


환우회에서 나와 비슷한 처지의 다른 환자분들의 먼저 겪은 글을 읽으며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막상 내 일이 되고 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기도 했다.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진다"라고 하시더니... 새로운 슬픔은 체념이기도 했다.


꽤 오래 앉아 있었다.

일어서다가 다리가 저려서 다시 주저앉으며, "아, 이젠 끝났구나" 하고 일어서서 주섬주섬 바지를 챙겨 입고 지퍼를 올렸다가 내리기를 몇 차례나 반복했었는지.

어쩐 일인지 용케 화장실 문을 닫고 나와서는 기운 빠진 모습으로 조심조심 몇 걸음을 옮겨 뜨끈뜨끈한 물 한 잔을 마실라치면 다시 화장실 문을 두드려야 했으니, 그렇게 첫 화장실 전투는 30여 차례를 가볍게 넘기고서야 끝이 났다.


항문주위가 헐고, 쓰라리고 하는 중에도 계속 들락거려야 했으니, 당장 첫 전투날부터 승산 없는 싸움에 체념이 생길 수밖에 없더라.


그제야, 어느 분들께서는 장루복원술 이후에 퇴원하고 몇 개월동안 안방화장실을 아예 방으로 꾸며놓고 살았다고 하셨는데, 노트북까지 들여다 놓고 간단한 업무까지 보셨다는 그분들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그럼 나도 최소 수개월동안은 이 싸움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것도 최소한으로 생각해서 수개월이지 수년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남은 여생동안이 될 수도.

하긴 그 염려대로 10년이 지난 지금도 횟수는 그때와 비교가 안될 정도로 줄었지만, 이따금씩은 소규모의 지엽적인 전투를 밤새 벌이기도 한다.


암담했다.

당장 첫날부터 그 암담함에 마음을 비우기기까지 했으니.

하지만, 다소 강하게 싸웠다 싶은 30여 회 남짓의 첫 화장실 전투는 우습게 넘겨버리는 날도 몇 차례 더 있었으니, 그런 날엔 곧 밝아올 새로운 하루가 성가시기도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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