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입추라더니, 그래서인지 창밖으로 풀벌레 소리가 귀뚜라미 말고도 몇 녀석은 더 있는 듯합니다.
한낮에는 여전히 무덥긴 해도 차츰차츰 무더위가 물러나기도 하겠죠. 아무쪼록 무덥고 입맛 없는 이럴 때에 맛난 거, 몸에 좋은 음식 많이 먹어둬야 나중에 힘을 써야 할 때 잘 쓸 수 있으니 다이어트니 뭐니 하지 마시고 많이 드세요.
오늘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90년도 서울 모대학의 동아리 지리산 MT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참고로 제가 93년 초에 군제대 후 선배들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이들의 트래킹 코스는 백무동 - 한신계곡 - 세석평전 - 장터목 - 천왕봉 코스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한신계곡은 칠선계곡, 뱀사골계곡과 더불어 지리산 3대 계곡으로 불리고 비가 내린 후엔 종종 안전사고가 발생하기도 하는 곳이라 트래킹 금지코스가 되기도 하는 곳입니다.
장마가 끝난 후인 요즘과 비슷한 시기에 지리산으로 10여 명 정도가 MT를 떠났다고 합니다. 도심 속 매연에 찌든 사람들이 함양의 마천 백무동계곡의 초입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얼마나 들뜬 기분이었을지.
저 마다 등에 크고 작은 배낭을 하나씩 메고, 백무동의 맑고 깨끗한 계곡을 따라 올라갔더랬죠.
얼마나 올라갔는지 이제 조금만 더 올라가면 한신계곡의 초입에 들어서는데, 갑자기 한 친구가 바위에서 미끄러지며 발목을 다쳤다고 해요.
그래도 심하게 다친 것이 아니었고, 그 친구와 친했던 몇 명은 조금씩 뒤에 쳐지게 되었다고 했죠. 다른 일행들 몇 명은 미리 올라가서 세석평전에 텐트 치고 식사준비를 해놓고 기다리겠다고 하며 올라갔고요.
그렇게 뒤쳐진 친구들도 아무 걱정 없이 천천히 올라서 오후 해가 뜨거움을 돌아설 때쯤에 한신계곡을 고생스럽게 지나가고 있었다고 해요.
그렇게 한참을 올라가는데, 조금 멀리에서 들리던 인기척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래요. 그리고, 곧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만났는데 조금 더 위쪽에 사고가 나서 사람들이 많이 다쳤다고 하더래요.
혹시나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도 있었지만, 에이 설마 아니겠지 하며 사고지점을 지나는데, 며칠 동안 내렸던 폭우에 지반이 약해져서 커다란 바윗돌이 굴러 내려오는 바람에 사람들이 많이 상했다는 이야기만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해요.
마음은 급했지만, 일행이 다리가 다쳤으니 산행길을 빨리 하려고 해도 그럴 수도 없었고, 다시 내려가는 시간보다는 세석평전에 올라가는 것이 더욱 빠를 듯해서 내려가볼 생각은 하지 않고 가던 길을 그대로 올랐죠.
얼마나 올랐을까 산속은 금방 어두워지고 한신계곡을 벗어날 때쯤엔 완전히 깜깜해졌다고 하더군요.
밝은 랜턴불빛 하나에 넷이서 의존해서 올라가는데, 한참을 올라갔더니 저기 앞쪽에 먼저 올라갔던 친구 하나가 바위 위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듯했으니 얼마나 반가웠을까요.
그 친구를 만나 물어보니 친구들은 무사히 세석에 올라가서 텐트를 치고 저녁까지 준비해 놓았을 거다.
자기는 너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더래요.
그래서 그 친구와 함께 훨씬 수월해진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올랐더니 먼저 간 친구들 몇 명이 텐트를 쳐놓고 조용히 앉아 있더래요.
근데, 저녁을 해서 먹은 흔적은 없었다고 해요.
그리고, 친구들 몇 명은 또 보이지가 않더라고 했다죠.
그 친구들과 함께 올라오는 도중에 사고지점을 지나면서 자기들과 길이 갈렸다는 말만 하더래요.
배는 고프고, 하루종일 걸었으니 피곤하긴 한데, 먹을 것은 비상식량으로 챙겨 온 사탕과 초콜릿 몇 개가 전부였으니.
대충 그렇게 휴식을 취하고 몇 명씩 조를 이뤄 잠자리에 들었다고 하더군요.
다리가 아픈 친구와 그 일행들도 한 텐트에 들어서 잠이 들고.
그렇게 얼마나 잤는지... 꿈결인 듯, 잠결인 듯, 생시인 듯.
사람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래요.
낮에 사고가 났다고 하니 덜컥 겁도 나고 선뜻 텐트 밖으로 나가질 못하는데 점점 더 또렷해지는 그 소리가 자신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더래요.
그래서 넷이서 나가보니 먼저 일행과 길이 갈렸다는 그 친구들이었다고 하더군요.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데, 잠들기 전까지 함께 있었던 친구들이 아무도 없더라는 거 있죠. 그들이 자러 들어간 텐트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래서 이야기를 하니, 한신계곡에서 사고가 난 것이 자기들 일행이고, 둘은 죽고, 하나는 많이 다치기만 했는데, 그 친구도 결국 죽었다고 하더라군요.
그들을 세석까지 데리고 온 친구가 맨 마지막에 숨을 거둔 그 친구라는.
그래서 그들 네 명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했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더라는 그런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