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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멍작가 Dec 10. 2020

나만 알고 싶은 비밀의 정원

지난여름 한국에 잠시 와 있을 때였다. 하루는 집에 오는 길에 마트에 갔다가 주류 코너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그건 바로 가펠 쾰시 맥주! 독일에서 내가 살고 있는 쾰른에서만 생산하는 맥주 브랜드인데, 맛이 깔끔하고 목 넘김이 가벼워서 여름에 시원하게 한잔하고 싶을 때 곧잘 마시는 맥주이다. 사실 가펠 맥주를 찾게 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나만 알고 싶은 비밀의 정원이 있는 곳에서 이 맥주를 팔기 때문이다.


이 정원은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데 레스토랑 문을 열고 들어가 한참을 뒤쪽까지 걸어가면 비로소 정원으로 통하는 문이 나온다. 이곳에 앉아 있으면 마치 내가 영화 속에 나오는 신비로운 정원 한가운데에 앉아 있고 곧이어 주전자와 토끼가 말을 걸어올 것만 같다. 정원이라고 해서 나무와 꽃으로 우거져 있는 화창한 공원 같은 풍경을 상상하면 오산이다. 물론 테이블과 의자들 사이로 작은 화분들이 놓여 있긴 하지만, 맞은편에서 내려다보는 건물 담벼락에 그려진 아주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전부이다. 고개를 빳빳이 들어야 노란 꽃들이 잔뜩 피어 있는 나무 전체를 볼 수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건 꽃이 아닌 맥주잔들이다.


맥주의 종류는 각각 쓰임이 다른 맥주잔으로도 구분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쾰른의 쾰시 맥주는 200ml짜리 귀엽고 작은 잔들을 웨이터가 동그란 통에 꽂고 다니면서 다 마신 잔을 알아서 바꿔준다. 그리고는 컵 받침에 연필로 선을 하나 긋는데 나중에 이게 계산서 역할을 대신한다. 더 이상 마시고 싶지 않으면 그냥 받침대를 잔 위에다 올려놓으면 된다. 쾰른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 친구는 맥주를 시원하게 두세 모금 마신 다음 신선한 맥주를 다시 받아 마시는 게 맥주의 맛을 즐길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래서 쾰른 사람들은 뮌헨에서 열리는 악토버 페스트에서 맥주를 1리터짜리 묵직한 잔에다 흘러넘칠 것처럼 마시는 걸 보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반면 바이젠 비어 (밀맥주)는 몸통이 길고 허리가 잘록한 잔에다 따라 마시는데, 다른 맥주보다 탄산이 많이 들어가 있어 조심히 따르지 않으면 거품 반 맥주 반이 되기 십상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맥주 중 하나는 바이에른 지역의 테게른 호수에서 생산하는 테게른제어(Tegernseer) 헬 맥주인데, 가볍고 깔끔하며 부드러운 청량감이 아주 매력적이다. 양조장이 호수 근처에 있다고 하니 더욱 시원하게 느껴지는 헬 맥주는 기본형의 잔에 따라서 마신다. 또 다른 맥주는 스페인에서 처음 마셔봤는데 배가 불룩 튀어나온 아저씨가 인심 좋게 웃으며 맥주를 권하는 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크루즈 캄포 (Cruzcampo)이다. 이 맥주 또한 무더운 스페인의 여름 날씨에 한 잔 벌컥벌컥 마시면 더위가 금세 사라지는 듯한 시원한 상쾌함이 온몸에 쫙 퍼진다.

그에 반해 향긋한 과일 향이 가득한 벨기에 에일 맥주는 강하고 씁쓸한 홉이 특징이라 향이 오래갈 수 있는, 와인잔처럼 오목한 잔에다 마신다. 단, 풍부한 향과 크리미한 거품만큼이나 도수까지 높은 편이라 조심해야 한다. 벨기에 수도원에서 트라피스트(Trappistes) 맥주 중 하나인 로슈포르(Rochefort)를 생산하는데, 라벨마다 6, 8, 10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다. 가장 낮은 도수인 6 맥주(7.5%)는 시중에 잘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 도수가 세긴 하지만 로슈포르 10 맥주(11.3%)가 가장 거품이 풍부하고 맛있다.

늦잠을 잔 일요일, 늦은 아침을 먹고 가볍게 산책을 하러 나왔다가 어김없이 또 이곳에 들렀다. 우리 바로 옆 에는 할머니 둘이서 맥주를 마시며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었다. 별다른 대화도 없이 비어 있는 공백이 전혀 어 색 하거나 불편하지 않은 것. 별거 아니지만 이것 하나에 많은 관계가 나뉜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할머니들 정도면 충분히 인생을 잘 살았다고 자부해도 될 것 같다고. 다른 건 몰라도 굳이 말 한마디 없어도 서로 다 알고 있다는 포스를 강하게 풍기는 사람이 곁에서 함께 늙어간다는 건 멋진 일임에 분명하니까. 그렇게 나도 맥주 한 모금을 머금으며 가만히 커다란 나무 그림을 바라보았다.




"우리도 저렇게 나이 들어가자.
저기 할머니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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