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그리 정신의 부재
사담: 사실은 번아웃... 시리즈를 지난 이틀 동안 쓰고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용기와 응원이 많이 필요해서 이 글 먼저 나누게 되었습니다. 철이 없어 그런가, 막상 하려고 하니 게을러지고 무섭고 현타도 오네요. 이렇게 (몇 안 되는 분들에 게지만) 알려버리면 창피해서 뭐라도 하지 않을까 싶어 미친 척하고 써 내려가 봅니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즈음.
가장 큰 취미였던 여행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원래 중국과 미국 현장 방문을 많이 하고 진척이 되었어야 하는 일을 전부 100% 온라인으로 하려고 하니 미쳐버릴 것 만 같았다. 더불어 외출도 제한되고, 재택으로 출퇴근 시간까지 없어져서 그런가. 정말이지 예전엔 상상할 수 없었던 만큼의 시간이 ‘남아돌았다.’
트렌드에 맞추어, 친구가 비전 있다고 했던 곳 주식을 몇 개 사서 재미도 (정말) 조금 보았다.
(지금 생각하면 한심하다. 재무제표도 제대로 안 보고 로또 긁는 심정으로 그 돈을..)
그 와중에, 다니던 회사는 엄청난 경비 절감 효과 (출장비와 오피스 유지비 세이브)와 그보다 더 엄청난 매출 증가로 연신 잘 나가고 있었고, 덕분에 추가 상여금에 정신 건강을 위한 프로그램까지 지원을 빵빵하게 해 주었다. 더불어 새 본사 사옥이 완공되어 가면서, 그 안에 복지 시설들이 어마어마하게 들어서기 시작했다. 회사 안팎에선 "역시 덴마크에서 최고로 좋은 회사"라고 하며 회사 칭찬을 입에 마르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마음이 이렇게 꼬여만 갈까?
회사에서 하는 이런 모든 것들, 그리고 끊임없이 나오는 임원진들의 커뮤니케이션 비디오 등등.. 모두가 배부른 소리 같기만 하고, 직원들을 영원히 가두려고 우리에 갖가지 투자를 하고 자물쇠를 더더욱 단단히 잠그는 행위같이 느껴지기만 했다.
99칸짜리 대감집 노예 말고, 단 몇 칸이라도 내 집의 주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격무와 인간관계 스트레스를 받을 만큼 받은 나와 내 친구가 종종 농담 삼아하던 말이다. 염지를 어떻게 할까, 치킨 말고 다른 음식을 팔아볼까, 푸드 트럭을 몰아볼까 하며 수다를 떨곤 했다. 친구나 나나 음식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미식가라고 자부했다. 우리 둘 다 요리도 꽤 잘하지 않는가.
게다가 한류 열풍이 여기서도 거세게 몰아치고 있는데, 한국 문화나 한식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이 동네에는 없다시피 하지 않는가. 직장에서 마주친 수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 하지 않는가. 한국인으로서, 우리 문화를 제대로 알리는 데는, 이것만 한 일이 없지 않을까?
어느 순간 친구와 주고받던 농담에 점점 더 살이 붙기 시작하고, 메뉴부터 상호, 유니폼까지 여러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법규정도 알아보고, 장소 물색까지. 지난 몇 년 간, 커리어에 지치고 회사에 회의를 크게 느낀 내 심장을 벌렁거리게 한 이 상상, 이것이 바로 내 꿈이 아닐까?
요즘 브런치에 퇴사와 번아웃에 대한 글을 쓰면서, 음식점 창업에 대한 나의 생각은 점점 커져만 갔다. 푹 쉬고 다른 회사로 재취업을 할 것이 아니라, 이것을 신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하고 창업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짝꿍에게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내보니, 예전부터 워낙 노래를 불렀던 일이라 그런가, 2년은 돈 못 벌어도 좋으니 열심히 한번 해보란다.
전에 그저 상상만 하며 실실 웃던 내용들을 비즈니스 케이스로 옮기기 시작했다. 메뉴 테스트를 위해 근처 평생교육원에 요리 강사가 되고 싶다고 지원서도 넣었다. 창업에 필요한 여러 가지 지식과 경험들을 나열해 보고, 무엇이 가장 필요하고, 어떻게 그것들을 획득할지 계획도 세워보았다.
그래, 영혼을 불태워서 장사 한번 해보는 거야.
가장 큰 문제점. 경험이 없다는 것. 생각해 보니 대학 축제서 전 부쳐본 경험조차 없는 나. 그렇다고 알바로 서빙이나 주방 보조를 해본 것도 아니고. 현장 경험이 절실하다. 지금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덜컥 가게를 차리는 것은 나락으로 가는 지름길임이 자명했으므로.
다들 0에서 시작하지 않는가. 캘리 최 님은 40 넘은 나이에 요식업에 처음 달려들어 그런 성공을 거두지 않았는가. 내가 뭐 덴마크 500대 부자가 되고 싶다고 했나!
잠깐, 나는 체력과 시간이 남아도는 백수이지 않은가. 일을 해보면 되지!
그렇게 며칠 째. 내가 배가 부르고 등이 따습긴 한가보다.
호기롭게 서칭을 시작했지만, 지난 이삼일 째 보고만 있고 전화 한번 못 걸어보았다. 전화 걸어서 나를 어떻게 소개하나, 왜 일하고 싶다고 말해야 하는지도 막막하다. 게다가 다른 작은 가게에선 주방이나 서빙 말고도 가게 청소까지 포함되어 있다는데..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이전 월급의 반도 안되는데, 주말에도 일해야 한다니..
언제는 월급 적게 받더라도 제대로 배워서 장사 꼭 성공하고 싶다며? 다들 0에서 시작한다며? 장사의 신 같은 유튜브 채널 보면서 나도 저렇게 열심히 할 거라며? 그동안 현실을 회피하려고 꿈만 열심히 꾼 거니? 겁나니?
그럼, 장사 아무나 하는 줄 아니? 집 청소도 하기 싫어하는 네가, 그런 힘든 일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쓸데없는 꿈 그만 꾸고, 다시 회사 들어갈 생각이나 해.
나와 친한 언니 중 하나가 종종 외치는 말이다. (정말 감사하게도) 그 언니가 바라본 나는,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사는 사람이었다. 얼토당토않은 생각도 수없이 많았지만, 결국 그게 뭐가 됐든 해버린다는 거다. (앞에 얘기했던 주식 정보 알려줬다는 친구가 이 언니고, 실제로 이 언니가 언급한 주식들 중 몇을 바로 사버려서 언니가 기함을 했었다. 나 근데 그때 왜 애플은 안 산 거니..)
자아가 분열되어하라 하지 말아라 혼자만의 대화를 한지 며칠 째. 그 언니가 가끔 외치던 "인생은 XX처럼"이란 말이 갑자기 가슴속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그래. 인생은 XX처럼 살아야지. 여기서 그냥 허튼 생각 접자고 하기엔, 나는 좀 많이 미친놈이 아니던가.
그래서 결심했다. 주방 아르바이트를 해보기로. 공짜로 가상 창업 한다 치지. 쪽팔리면 어때? 나중에 내 가게 내면 안 쪽팔릴 것 같니? 몸으로 부딪히고 나서 포기를 하든지 말든지 하자. 내가 낸데!
이 밤이 지나고 내일 금요일 낮에는, 면접 제의를 받을 때까지 여러 음식점에 전화를 할 것이다.
추신: 저는 음식점을 하시는 분들, 그리고 요식업에서 일하시는 분들을 비하할 의도가 전혀 없다는 것을 밝힙니다.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맛있는 음식과 즐거운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들어가는 모든 종류의 노동은 멋있꼬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음식점을 할 생각이 없었거나, 있더라도 직접 일해볼 생각도 않고 바로 뛰어들었겠죠) 절대 요식업을 우습게 보는 사람이 아니며, 나중에 장사를 정말로 하게 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앞으로 할 경험들이 지난 내 커리어 이상으로 갚질 것이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