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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랑의 책읽기 Apr 13. 2020

시카고학파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Concrete Economics], Cohen and DeLong

어느 부분에서는 내 이념에 딱 들어맞는 얘기를 하다가도, 또 어느 페이지에서는 매우 불편한 논증이 보여서 흥미로웠던 책. 아직 이쪽 분야에는 초보자인 나에게 새로운 얘기들이 많았다. Stephen Cohen 과 Bradford DeLong은 둘 다 버클리 경제학과 교수인데, 민주당 정권 시절 정책자문역할을 했던 것으로 안다.



20세기 중반까지 미국의 경제정책은 철저한 실용주의에 기반하였다.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들은 중국의 보호무역주의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곤 한다. 자기 나라 물건은 마음껏 수출하면서 다른 나라의 제품에는 높은 관세를 물리고, 시장이율보다 한참 낮은 이율로 자국기업을 지원하고, 지적재산권은 무시하다시피 하고, 때로는 스파이나 기업인수를 통해 첨단기술을 빼돌린다. “중국정부가 불공정한 게임을 벌리고 있다”라는 주장이 일견 맞는 것 같다.


하지만 미국은, 지금 그들이 비난하는 정책들을 200년 전에 어떤 국가보다 먼저 실행했다. 독립 후 초창기 Alexander Hamilton은 영국에게 현저히 열등한 제조업을 육성시키기 위해  수입공산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한다. 19세기 미국정부는 미래에 도움이 될만한 산업 (철도 등의 인프라가 대표적)을 중점적으로 지원한다. 찰스 딕킨스는 미국에서 판매된 저작들에 대한 로열티를 전혀 받지 못했다.



저자들은 18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미국이 실행했던 보호주의무역-미래산업육성-자국기업지원의 정부정책들이 미국 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저자들은 이러한 정책들을 ‘이념에 기반하지 않은 실용주의 정책’이라 정의하며 “콘크리트 경제학”라는 이름을 붙인다. 


> In successful economies, economic policy has been pragmatic, not ideological. It has been concrete, not abstract. (p.1)


‘Concrete Economy콘크리트 경제학’이라는 명칭은 저자들이 이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내세우는 ‘Abstract Economy추상적 경제학’과 대비시켜보면 그 뜻이 분명해진다. 다음은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내세우는 경제학들에 대한 반론.


> Yes, there was an “invisible hand,” and enormous entrepreneurial innovation and energy. But the invisible hand was repeatedly lifted at the elbow by government, and re-placed in a new position from where it could go on to perform its magic….Underneath the rhetoric and perpetual conflict, there is a critical though often unspoken interdependence of entrepreneurship and government—a coming-together that reshapes and grows the economy. (p.2)


저자들은 분명 20세기 후반 이후 지식계를 강타한 시카고학파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시카고학파는 현실이 아닌 모델을 바탕으로 한 정책조언을 내렸고, 이를 따랐던 미국정부와 미국경제는 지금 큰 위기에 처해 있다.




20세기 후반, 아시아국가들은 미국의 성장정책을 그대로 베끼면서 경제성장을 달성했다.


일본, 한국, 그리고 중국에 이르기까지 아시아국가들은 100년전 미국의 성장정책을 베끼면서 경제발전에 성공했다. 


> [T]he East Asian nations] practiced a Hamiltonian strategy of protecting and fostering industry. This has delivered unprecedented rapid growth by concentrating resources on the production of manufactured good for export at ever-greater scale, sophistication, and value added, and gaming the international system of open trade that America was promoting at all costs (p.16)


> “call a meeting to say: ‘let’s have an Industrial Revolution’”—that is pretty much what Japan did. (p.124)


책의 분량 문제로 이 책에서는 일본과 중국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짚고 넘어간다. 일본에 대해서, 저자들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특징을 제시한다 (p.132):


1. 보호무역: 관세정책, 사회켐페인 등의 여러 수단을 이용한 자국기업보호

2. 게이레츠(keiretsu) 시스템: 정치세력과 기업지배세력사이의 긴밀한 관계

3. 관료집단: 산업정책을 담당했던 유능한 관료집단

4. 금융시장통제: 높은 저축률과 낮은 이율을 유지


무슨 생각이 드는가? 그렇다, 한국과 일치하는 부분이 너무 많다. 

(재벌과 게이레츠 시스템의 정확한 차이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이런 글들이 앞으로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될 듯.)

한국, 그리고 중국을 제외한 다른 모든 아시아국가들에게 일본은 역시 철저한 벤치마킹의 대상이었다.


다음은 동아시아의 경제정책과 혁신에 대한 흥미로운 가설.


> …the East Asian state-led development model might prove to be very good indeed at innovation…because the keys to economic growth in the last analysis are ideas, because ideas are both non-rival and non-excludable, and because all of economists’ proofs of the optimality of the Smithian competitive market rely on the rivalry and excludability of commodities, that laissez-faire policies are not always the best approach. (p.124-125) 



한편, 미국은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한 추상적 경제정책을 내놓았다. 결과는 미국의 완패.


미국이 20세기 말 동아시아 국가들의 성장에 맞서 택한 전략은 무엇인가? 미국은 추상적 경제학을 바탕으로 산업 전반에 대한 규제완화를 추진했다. 저자는 그 중에서도 특히 금융시장의 규제완화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퍼붓는다. 

“금융서비스”가 경제에 미치는 이익은 크게 두 가지이다: (1) 기업들에게 적절한 가격으로 유동성을 공급하는 일. (2) 불확실성에 대비한 충분한 보험을 제공하는 일. 한 마디로, 금융은 실물경제기업들의 보조역할일 뿐이다. 물품과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기업이 없다면 금융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20세기 후반 미국의 금융시장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 되어 버렸다. 위의 두 기능 대신, 주식 및 파생상품의 거래에서 수수료를 얻는 시장이 기형적으로 커져 버렸다. 규제완화는 거대한 도박판을 만들어냈고, 그 도박판에서 은행들이 따낸 수수료가 미국 GDP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 Time time, the [American] industries of the future offered no such richness and produced little in the way of valuable derivative activities. Indeed, it is arguable that they produced nothing (or exceedingly little) of value, serving at the end mostly to redistribute income to the top. The big shift this time was into the processing of real estate transactions  the processing of health-care insurance claims, and especially into finance. (pp.20-21)


> Most of finance is imply an intermediate good—good only in what other commodities it allows us to produce more of. And so Cecchetti and Kharroubi concluded that “the level of financial development is good only up to a point, after which it becomes a drag on growth, and that a fast-growing financial sector is detrimental.” (p.170)


이런 얘기들은 80년대부터 많은 사람들이 경고한 바다. 예를 들어, Jack Bogle (Vanguard 창립자):


> The job of finance is to provide capital to companies. We do it to the tune of $250 billion a year in IPOs and secondary offerings. What else do we do? We encourage investors to trade about $32 trillion a year. So the way I calculate it, 99 percent of what we do in this industry is people trading with one another, with a gain only to the middleman. It’s a waste of resources. (p.159)


혹은 Thomas Philippon의 말:


> Despite its fast computers and credit derivatives, the current financial system does not seem better at transferring funds from savers to borrowers than the financial system of 1910…The financial industry of 1900 was just as able as the finance industry of 2010 to produce loans, bonds and stocks , and it was certainly doing it more cheaply. (p.163)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결정은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실용주의는 항상 불편한 점이 있다. (케인즈가 옳다!)


20세기 말 미국의 작은정부론, 규제완화론 등의 경제정책은 단연 시카고학파의 지적승리이다. “자유시장경제는 개입이 적으면 적을수록 효율성이 높아진다” 이 단순한 시카고학파의 이론은 냉전시기 영미의 정책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시카고 학파의 허점에 대해 많은 반성이 이뤄지고 있는 중인 것 같다. 저번 리뷰에서도 썼지만, neo-progressive movement가 서서히 힘을 받고 있는 중이다.


어찌보면 정치경제의 담론이 100년전 케인즈로 다시 돌아가는 것으로도 보인다. 저지는 결론 부분에서 케인즈의 다음 문구들을 인용하는데, 현재 저자들의 견해를 그대로 뒷받침한다.


> The world is not so governed from above that private and social interest always coincide. It is not so manages here below that in practice they coincide. It is no a correct deduction from the principles of economics that enlightened self-interest always operates in the public interest. Nor is it true that self-interest generally is enlightened…[The End of Laissez-Faire,1926] (p.188)


> We cannot there fore settle on abstract grounds, but must handle on its merits in detail…to determine what the State ought to take upon itself to direct by the public wisdom, and what it ought to leave, with as little interference as possible, to individual exertion…[The End of Laissez-Faire,1926] (p.190)



도덕성과 관련한 질문들이 남는다.


그런데 이러한 경제정책들은 “도덕적으로 옳은 정책”들인가? 이 책의 저자들은 도덕적인 평가는 내리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찜찜함은 남는다. 예를 들어, 국가가 앞으로 잘 될 산업을 밀어주는 Winner-picking은 필연적으로 부패를 수반한다. 저자들도 이를 분명하게 언급한다.


> [These policies] were pragmatic and concrete in conception—by and large, you would get what you saw—and of course, they were realized with more than just a tiny bit of corruption. (p.10)

또한 경제관료들이 성장정책을 주도하는 사회에서는, 관료들에 대한 보상이 주어져야 하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회전문인사로 이어지고, 그데 보답하기 위한 호혜적 규제완화도 이뤄진다.


> …[In modern Japan,] conflict with business was not the structuring principle. The cornerstone of industrial policy was the conviction that what was good for Mitsubishi or Sumitomo was good for Japan, and that the state was to guide, enable, and accelerate their development in its preferred directions. (p.136)


하지만 저번 리뷰에서도 보았듯이, 작은 정부-규제완화 정책은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승자들의 독무대가 되고, 이 또한 부패로 이어진다. 정답이 없는 복잡한 문제. 


해방 후 한국경제는 일본 따라가기 모델로 뛰어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일본을 역전해 버린 2020년에는 선구적인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 끊이지 않는 혁신, 공정한 경쟁, 평등한 분배를 모두 달성할 수 있는 정치경제모델에 대한 심도깊은 논의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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