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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랑의 책읽기 Jul 22. 2020

생각이 제작되는 사회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인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가! 오, 멋진 신세계여…
-셰익스피어, [템페스트] 5막 1장



개인적으로는 [1984] 보다 한 수 위. [1984] 보다 17년이나 먼저 출판되었는데도, 소설이 그리는 세계는 훨씬 더 설득력있고 심지어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만약 지구에서 미래에 완벽한 전체주의 국가가 등장한다면 [1984]보다 [멋진 신세계]의 세상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멋진 신세계]의 세상 역시 디스토피아이다. [멋진 신세계]가 그리는 세계가 왜 디스토피아인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체주의국가의 국민들은 사유하기를 그친 사람들이다.


전체주의국가의 가장 큰 목표는 모든 구성원들의 행동을 권력의 의도에 맞게 프로그래밍하는 것이다. [1984]에서는 이를 전면적 프로파간다와 집요한 정보왜곡으로 달성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지난 글에서도 말했듯이, 인간행동의 전반적 프로그래밍화는 아직까지 딱히 성공하지 못했다.


[멋진 신세계]의 해법은 간단하다. 인간 자체를 개조시켜라! 25세기의 영국에서 아이들은 부모의 배가 아니라 “아기공장”에서 생산된다. 10개월의 “숙성기간”동안 아이들은 서로 다른 영양분, 혹은 독성물질을 주입받고 다른 계급의 아이들이 된다. 알파계급의 아이들은 제 때 좋은 물질을 공급받아 건장한 체격의 인간이 되지만, 델타-입실론 계급으로 태어날 아이들은 중간에 영양분 대신 알콜을 공급하는 식이다.


공장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성인이 될 때까지 “교육”을 받는다. 하지만 이 교육은 주체적인 사고를 기르는 교육이 아니다. 원시적인 동물적 본능을 여러 행동들과 결합시키는 교육이다. 예를 들어, 국가는 “책”과 “꽃”을 본능적으로 멀리 하게 만들기 위해 다음과 같은 교육을 시킨다. 


> 책과 요란한 소리, 꽃과 전류 쇼크—이미 유아의 의식 속에는 이 조합이 멋지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이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훈련을 2백번 반복하면 양자의 결합은 도저히 분리할 수 없이 견고한 개념이 될 것이다. 인간이 결합시킨 것은 아무리 자연이라 할지라도 분리시킬 수 없다. (1장)


이러한 ‘조건반사교육’과 ‘수면교육’ (수면 중 프로파간다를 반복하여 틀어주는 것) 을 통해 이 국가의 사람들은 ‘엄마’라는 단어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연’에 두려움을 느끼고, ‘죽음’에 명랑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한마디로, [멋진 신세계] 안의 사람들이 하는 모든 사고는 미리 제작된 것이다. 


조나단 하이트의 [바른 마음] 에 따르면, 인간은 “사회적 직관론자”로서 본능적으로 상황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순식간에 내린다. 그 후 인간의 이성은 대부분 자신이 이미 내린 도덕적 판단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 (이성이 직관을 도저히 직관화할 수 없을때, [1984]에서 말하는 이중사고Doublethink가 행해진다) '사회적 직관론자' 이론이 나오기 60년 전 쓰여진 [멋진 신세계]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 사실 인간이 어떤 것을 믿게 되는 것은 그렇게 믿도록 조건이 주어지기 때문이야. 인간이 어떤 그릇된 이유로 무엇을 믿게 될 때 그에 대한 다른 엉터리 이유를 발견하는 것—이것이 철학이란 것이야. 인간이 신을 믿는 것은 신을 믿도록 조건지워지기 때문이야. (17장)


역겨움. 기쁨. 부끄러움. 이런 감정들은 이성적인 판단을 흐린다. 이는 사회적으로 바람직해 보이는 감정도 마찬가지이다. “불쌍한 사람을 보살펴야 해"라는 동정심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사람들에게 궁핍한 아이의 사진과 통계수치를 같이 보여주면 사진만 보여줄 때보다 기부금이 줄어든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동정심이라는 직관이 왜곡된 결정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보다 강한 통제”에 대한 해답은, 언제나 “보다 깊은 사유”이다.


[멋진 신세계]에서 자주 등장하는 표어 (국민들이 끊임없이 주입받는 표어) 중 하나는“문명은 살균”이다. 


깨끗한 것은 완성된 것이고, 완성된 세계는 새로운 사고를 막는다. 전체주의의 완벽한 성공이다.


> 우리는 변화를 원하지 않고 있거든. 모든 변화는 안정을 위협해. 우리가 새로운 발명을 선뜻 적용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지. 순수과학에서의 모든 발견은 유해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거든. (16장)


일견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 사회는 사실 전혀 이상적이지 않다. 경제학적 효율성으로만 보아도 이 사회의 결함은 분명하다. 첫째, 지구를 둘러싼 환경은 끊임없이 변하는데, 제조된 사고를 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바뀌기 쓉지 않다. 코로나 전염의 한복판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는 저 이상한 미국인들을 보아라. 저들은 “마스크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쓰는것, 따라서 쓰기 꺼려짐”이라는 본능적 직관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이 안되는 논리를 대고 있을 것이다. 둘째, 다른 사람의 사고를 제조할 권한을 가진 사람이 갑자기 다른 마음을 먹을 가능성. 전체주의의 권력은 한곳으로 모일 수 밖에 없고, “절대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


물론, 이 문제는 경제학적 효율성을 가지고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나의 사고가 다른 주체에 의해 제작된다면, 그것을 나 자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나 아렌트가 강조하듯, 보다 깊은 사유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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