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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ㄹim Aug 09. 2018

 응답하라 1992 。











   

캐리비안 베이도 오션월드도 없던 시절.


아부지가 땀뻘뻘 흘리시며 바람 불어넣어 만들어 주신 둥근 튜브 수영장은,


 적어도 내겐 바다만큼 큰 선물이었다.



눈 뜨자마자 튜브 수영장으로 출근 했다가 해가 지면 아쉬움을 뒤로하고 퇴근하는,

나름의 룰을 지키며 여름을 만끽하던 어느 날 저녁.


튜브에서의 야외 업무를 마친 후, 저녁을 먹고 마루를 질러 방으로 건너가던 때였다.  


노란 달과 까만 밤하늘을 고요히 머금은 채 속삭이듯 일렁이는,


마당의 내 작고 동그란 바다를 보고선


뭔가에 홀리듯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가 버렸던 것.



저녁 물놀이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지만


살금 살금 몰래 감행한 야간 입수는 내생에 처음이자, 두 번 다시 겪지 못할


경이로운 판타지로의 경험. 그 자체였다.



 담장 밖으로 솟은 가로등불이 반사되어 무시로 반짝이던 물결과


코끝을 간지럽히던 여름밤 특유의 달콤한 바람 냄새.

 

 언젠가 티브이에서 보았던 아마존 강줄기 어디쯤인가에 불시착한 듯한 느낌이었다랄까.


마당 구석의 장독대는 어느덧 입사귀가 커다란 밀림의 식물로 보였고


튜브 반대편에선 새끼 원숭이가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그럴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심장이 얼마나 도근도근 했었던지.


온통 묘한 두근거림과 낯선 설렘이 튜브에 그득 차오르던 짧지만 강렬했던 시간.



   

비록 야간순찰대장 모친께 발각되어 내 생의 첫 판타지는 채 십 분도 안되어 끝이 나고야 말았지만.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여름밤, 달을 품은 튜브 속에서의 경험은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다.




말도 안 되지만. 그럴 순 없지만.


꼭 한번 과거로 몇 분간 돌아가 볼 수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1992년 그 여름밤의 판타지로 채널을 맞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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