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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원다인 Jan 03. 2019

차에도 적정 온도가 있습니다

[2. 다기에 관해] 물 식히는 기구

옛날 어머니들이 식후에 만들어 즐겨 드시던 "다방 커피"가 떠오른다. 컵에 커피믹스, 설탕, 크림을 티스푼으로 덜어 놓고 펄펄 끓는 뜨거운 물을 확 부어서 휘휘 저어 후후 불며 마시던. 차도 마찬가지로 티백에 뜨거운 물을 부어서 후후 불면서 마셨었다. 입천장과 혀를 데고 맛도 썼지만, 식후 차 한잔은 다 그런 걸 줄 알았다.


뜨거운 물을 그대로 음료에 사용한 것은 아마도 빨리빨리 문화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구강 내에 반복적인 화상은 암을 유발할 수 있다. 이런 건강 위험은 차치하고, 차 맛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 물과 차를 반드시 식혀야 할 필요가 있다. 차에 따라서 섭씨 100도에서 60도 사이의 적정 물 온도가 있다. 그리고 구강에 화상을 입지 않고, 차의 모든 종류의 맛을 느끼며 마시기 위해서는 섭씨 40~50도 정도로 식혀야만 한다. 


내버려 두면 물은 식기 마련이다. 열역학 법칙에 따라서 모든 물질은 시간이 흐르면서 결국 열평형 상태에 도달한다. 뜨거운 물과 차를 식히기 위해서는 시간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필요 시간을 알기 위해서 타이머를 사용할 수 있다. 스마트폰에는 타이머 기능이 있어서 아주 유용하다. 예를 들어, 물을 끓인 후 온도를 60도로 만들기 위해서 어림잡아 타이머 10분을 세팅하여 기다리면 된다. 역시 차를 우려낸 후 40도로 만들기 위해 타이머 2분을 세팅하고 기다리면 된다. 당연히 걸리는 시간은 물의 양에 따라 달라야 한다. 또는 더 정확하게 온도계를 꽂아 놓고 노려보고 있으면 된다. 요즘에는 비접촉식 적외선 온도계도 있어서 물에 직접 담그지 않고 필요할 때 찍어 보기만 해도 된다.


기다림은 물과 차의 온도를 낮추는 확실한 방법이다. 그러나 혼자서 차를 마실 때는 그럴 수 있다 쳐도, 둘 이상이 모여 차모임을 가지면서 타이머를 켜 놓고 몇십 분씩 기다리는 것은 어색한 일이다. 호모 파베르(Homo Faber)! "도구의 인간"으로서 물과 차의 온도를 식혀주는 도구를 써보자. 전기 포트 중에는 원하는 온도를 설정하면 맞춰서 가열해 주는 것도 있다. 그러나 우려낸 차를 식히는 과정은 여전히 필요하다.


물 식히는 그릇은 특별할 것이 없는 그릇이다. 물 따르기만 편하면 사실 어떤 오목한 사발도 물 식히는 그릇으로 사용할 수 있다. 물을 식히는 원리는 두 가지이다. 첫째, 물을 주전자에서 그릇으로 옮겨 담으면서 공기 중에 노출되어 온도가 낮아진다. 둘째, 그릇 자체가 물과 차의 열을 흡수하여 대기 중으로 방사함으로써 온도가 낮아진다. 중국 항저우에서 부리가 아주 긴 주전자를 사용하여 차를 따라 주는 모습이 종종 TV 여행 프로에 소개된다. 지금은 공연의 일종이 되었지만, 이 사람들이 무슨 폼을 잡으려고 이런 주전자를 사용해온 것은 아니고, 사실 뜨거운 차를 식혀서 제공하기 위함이다. 기다란 부리를 통과하면서 공기 중에 열을 빼앗기는 것이다. 뜨거운 물을 식히기 위해 컵 2개를 놓고 한쪽에 부었다, 다른 한쪽에 옮겨 부었다를 반복하는 것도 같은 원리이다.


한국 전통 다기 중에 숙우가 물을 식히는 그릇이다. 중국 다기에 차해(공도배)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우려낸 차를 식히는 용도로 사용한다. 그런데 물을 식히는 사발과 차를 식히는 사발이 딱히 다를 것은 없다. 물 식히는 그릇과 차 식히는 그릇을 구분하여 사용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액체를 담을 수 있고, 따르기에 편리하게 부리가 있으면 족하다. 숙우의 소재는 대부분 유약 바른 도자기를 사용하고, 차해는 내열 유리가 많고 도자기 제품도 있다. 유리의 장점은 아무래도 차의 색깔을 감상하고, 차의 농도를 조절하기 용이하다는 데에 있다. 반면 도자기는 처음에 뜨거운 물을 부었을 때는 물의 온도가 빨리 식지만, 이후에 다기 뜨거운 물을 부었을 때는 덥혀진 도자기 벽이 보온을 하는 특징이 있다. 


금속과 플라스틱 소재도 물 식히는 그릇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금속 소재의 경우 열 전도가 빨라서 그릇을 잡기 어려운 단점이 있고, 앞서 '물 끓이는 기구' 편에서 언급했듯이 쇠 냄새가 날 수 있는 것이 단점이다. 플라스틱 소재의 그릇은 반대로 열 전도율이 낮아서 물이 빨리 식지 않을 수 있고, 플라스틱 냄새가 날 수 있은 것이 단점이다.


숙우(좌)와 차해(우)(저자 촬영)


형태를 보면, 숙우는 부리가 있는, 표면적이 넓은 둥그런 도자기 사발이다. 표면적이 넓기 때문에 뜨거운 물이 대기와 접촉하는 면적도 넓어서 물이 쉽게 식을 수 있다. 차해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으나 복숭아 모양이 흔하고 따를 때의 편의를 위해 손잡이가 달려 있다는 것이 숙우와 비교하여 가장 큰 차이점이다. 


숙우 또는 차해를 꼭 갖춰서 차를 만들 필요는 없다. 사실 우리 부엌에서 대용품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대부분의 가정에 선물로 받거나 결혼식 때 혼수로 받은, 그러나 잘 쓰지 않고 고이 모셔둔 도자기로 만든 양식 정찬 그릇 세트가 한벌쯤 있을 것이다. 그런 세트 가운데 보면 소스나 우유를 담았다가 따르는 용도의 그릇이 있다. 이것도 물과 차를 식히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어쩌면 전용 다기보다 더 편리하고 폼이 날 수도 있다.


이런 대용품 마저 찾기 어렵다면, 찻주전자(다관)나 물 끓일 때 쓰는 주전자를 하나 더 놓고 식힘 그릇으로 써도 무방하다. 입구가 넓어서 끓인 물이나 우려낸 차를 부어 넣기 편리하고, 부리가 있어서 식힌 물이나 차를 다시 붓기 편리하기만 하면 충분하다.


물을 식혀서 차를 우리고, 우려낸 차를 다시 식혀서 마시는 과정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생략된다. 그러나 차를 맛있게 먹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물과 차를 원하는 온도로 식히는 방법에 대해서는 '차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 얘기할 때 소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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