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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재숙 Monica Shim Oct 19. 2023

14. 파리 개선문과 에펠탑

8.2.23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프랑스군인의 안식을 위해 1914-1918'

개선문 아래에는 충혼을 기리는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전쟁에서 희생된 수많은 젊은이들은 영혼이라도 이 개선문을 통해 돌아왔을까.


 나폴레옹 1세는 전쟁에서 이기면 당당히 돌아올 개선문을 세웠지만 정작 그는 살아생전 이 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세인트 헬레나의 귀양에서 돌아온 후 그의 유해가 통과할 수 있었다. 개선문이 완공되고 처음 이 문을 통과한 이는 프랑스인이 아닌 적군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였다. 프랑스인의 자존심이 추락했다. 개선문 앞 막힘없이 트인 대로인 샹젤리제길은 프로이센 군대가 진격하기 수월하게 해 준 셈이 되었다. 개선문 위에는 나폴레옹이 싸워 승리한 전쟁의 이름이 일일이 새겨져 있었다. 싸움의 끝은 영화가 아니고 나락이었다. 그는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프랑스의 영웅이었지만 결국 쓸쓸히 사라져야 했다.


  몸을 날려버릴 것 같은 세찬 바람이 부는 아침 개선문 Arc de Triomphe de l'Étoile을 찾았다. 에투알 개선문은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죽은 전사자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졌다. 개선문 아래에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죽은 이들을 기리는 무명용사들의 무덤이 있다. 이 개선문을 중심으로 12개의 거리가 부채꼴 모양으로 뻗어 있어  별 étoile처럼 보여 이 광장은 별의 광장 (Place de l' Étoile, 에투알 광장)이라고도 부른다. 지금은 샤를 드골 광장(Place Charles de Gaulle)으로 변경되었다.


 샹젤리제 거리 중간에 미국의 상징 맥도널드가 자리하고 있었다. 키오스크가 10개도 넘는 대형 맥도널드 매장엔 관광객으로 들끓었다. 명품이 즐비한 거리에 패스트푸드인 멕도널드가 배짱 좋게 자리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마켓이 들어서 있던 샹젤리제의 분위기와는 완연히 다른 여름의 샹젤리제, 바람이 나무를 뒤흔들고 행인의 모자를 날렸다. 맥도널드 이층에서 샹젤리제 거리를 내려다보니 이층 투어버스에 탄 관광객들이 머리칼을 휘날리며 손을 흔든다.


 낭만의 도시로 알고 있는 파리는 18세기까지 환경이 아주 지저분하고 더럽기 짝이 없는 도시였다. 길은 각종 오물과 쓰레기로 뒤덮여 있었고 센강은 시체나 쓰레기로 오염되 급기야 콜레라가 창궐하기도 했다. 작은 도시에 60만 인구가 살면서 상하수도 시설이 없었다.


 골목길을 걷다가 위층에서 버리는 똥물을 뒤집어쓰기 일쑤였다. 그래서 요강을 비울 때는 길가는 사람이 피하라고 세 번 크게 외치고 버렸다한다. 길가의 오물을 피하려 하이힐이 등장하고 우산으로 똥물 벼락을 막아야 했다. 오물을 밟지 않으려 업어서 길을 건네주는 직업이 등장할 정도였다. 베르사유의 화려한 궁전도 화장실이 부족해 정원 곳곳이 화장실로 사용되었다 하니 우리가 상상하던 신데렐라 궁전 같은 곳과는 거리가 멀었나 보다.


 이를 개선하려 나폴레옹 3세는 조르주 오스만 남작을 파리 시장에 임명해 대 개혁작업에 들어간다. 세계박람회를 계기로 마차가 사고 없이 다닐 수 있게 길을 넓히고 상하수도 시설을 만들고 기존의 건물을 철거하고 아파트 건물을 짓는다. 중세 이래 이어져 온 좁은 골목길이 넓은 불바르 Boulevard로 바뀌게 된다. 개선문을 중심으로 사방형의 큰 도로가 만들어지고 길이 끝나는 지점에 문화재나 공원이 보이게 설계했다. 문화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건물의 높이도 제한했다. 현재의 파리는 그때 만들어진 모습이다. 몽마르뜨는 평지인 파리에 유일한 언덕이었는데 당시 대규모 철거작업으로 집을 잃은 빈민층이 이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달동네와 같은 셈이다.


  에디슨의 전기 발명으로 샹젤리제 거리는 당시 귀한 전구를 가로등으로 설치한 최초의 길이 되었다. 이로서 파리는 빛의 도시(La Ville Lumière)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샹젤리제 거리를 걷는데 한국 아주머니가 '오 샹젤리제' 노래를 신나게 부르며 걷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이곳이 꿈의 방문지 였나보다. 누군가의 꿈이 될 수 있는 도시가 파리다.


   에펠탑이 잘 보인다는 샤요궁까지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여행이 10일을 넘어서니 다리에 피곤이 쌓인다. 파리는 2024년 파리 올림픽 준비로 곳곳이 공사 중이었다.  샤요궁 난간 위에 서니 멀리 에펠탑이 정면으로 마주 보인다. 난간 아래는 거대한 분수대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용사들을 환영하듯 줄을 서서 물을 뿜고 있다. 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기분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승리하고 돌아오는 에펠탑을 맞이하는 것 같았다.


 세계박람회를 위한 건축공모전에서 구스타프 에펠의 작품이 당선되었다. 당시 철을 이용한 건축에 권위자였던 에펠이 탑을 건설하기 시작하자 파리의 예술가들이 들고일어났다. 철로 만든 흉물을 예술의 도시 파리에 세울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그의 꾸준한 설득 끝에 건축을 계속할 수는 있었지만 건축비는 일부만 지원해 주고 나머지는 입장료를 받아 처리하든 알아서 마련하라는 결론이 났다. 박람회동안 세계 최고 높이의 이 탑을 구경하려 많은 사람들이 세계에서 몰려오게 되면서 엄청난 입장 수입을 거두어 에펠은 세운 지 2년 만에 건축비를 충당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후로도 입장 수입이 엄청나 파리 재정에 톡톡한 몫을 했다. 에펠탑은 원래 박람회가 끝나면 해체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마침 라디오가 발명되면서 당시 가장 높은 에펠탑에 안테나를 세우게 되면서 해체의 위기를 면했다. 이제 에펠탑은 언제 그런 수모를 받았냐는 듯 당당히 파리의 상징으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인간의 감각과 예술품의 가치는 어느 방향으로 튈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미적 감각 기준은 시간이 흐르며 변할 수 있는 것임을 시대에 따라 주목받는 예술작품이 달라지는 걸 보며 느끼게 된다. 현재의 미운 오리새끼가 미래에는 백조가 될 수도 있음이다.


 에펠탑이 언제부터 사랑의 상징이 된 건지 모르지만 탑을 바라보는 다리난간 곳곳에 사랑의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젊은 날엔 사랑은 나만의 것으로 꼭꼭 잠가둬야 하는 걸로 알았는데 살아보니 끊임없이 주위를 향해 열어야 사랑도 성장하는 것임을 알았다. 강인한 철 같이 사랑이 굳건하길 저리 비는 마음은 결국 사랑이란 게 그리 견고하지 못한 거란걸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것 같다.


  인생샷을 남기고픈 젊은이들이 한껏 치장을 하고 사진 찍기에 바쁘다. 신랑신부 한쌍이 차가 다니는 대로 중앙에서 에펠탑을 배경으로 결혼사진을 촬영한다. 차가 생생 달리는데 목숨을 건 사진 촬영이라니. 잔디밭에 한 남자가 앉아 에펠탑을 바라보며 글을 쓰고 있다. 어떤 글을 쓰는지 몹시 궁금하다. 글쟁이에겐 최고의 관심사가 글이다. 겨울의 파리에 와 나도 센강을 바라보며 글을 쓰고 싶어진다.


 센강변을 바바리코트 깃을 세우고 분위기 있게 걸어보려 했는데 정작 발이 지쳐 어디 앉을 곳이 없나 하고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게다가 심한 바람에 비까지 오락가락하며 바바리코트깃을 세우기는 커녕 우산을 세웠다 접었다 하며 우산이 뒤집어지지 않기만 안달하며 걸어야 했다. 낭만도 젊을 때 열심히 즐겨야 한다. 뭐든 때가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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