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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재숙 Monica Shim Oct 21. 2023

15. 빈센트 반 고흐의 마지막 70일 오베르 쉬와즈

오베르 쉬와즈 파리 프랑스 .8.4

  파리 북역은 인파로 북적였다. 모두들 어딘가로 바삐 가고 있었다. 역사 입구에 빼빼 마른 체형에 수염을 기른 한 남자가 모자를 앞에 놓고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의 존재는 투명인간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받지 못했다. 나도 멈칫 섰다가 이내 걸음을 재촉했다.  오베르 쉬와즈를 향해 기차를 타야 했다.


Gare de Nord역에서 10시 34분에 Persan-Beaumont 방향의 H기차를 탔다.  Persan까지 50여분 가서 Auvers-sur- oise행 기차로 갈아탈 예정이다. 파리를 벗어난 기차는 들을 지나고 강을 건넜다. 먹구름 가득한 사이로 간간이 햇살이 비친다. 빈센트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빈센트 반 고흐가 생애 마지막 70일을 보낸 오베르 쉬와즈, 그곳의 일기예보는 비에 천둥번개 경보가 떴다.


Persan역에 내려 Pontois방향 기차를 찾으니 기찻길 너머 반대편에 달랑 두량의 기차가 서 있다. 4분 내 갈아타느라 반대편에 서있는 기차를 향해 뛰어야 했다. 폰토이즈행 기차는 빨강 보라 주황색의 화려한 의자를 가진 예쁜 기차였다. 승객이라곤 우리까지 6명 뿐이었다.


 Auvers-sur-oise역에 내리니 날씨가 화창하다 파란 하늘에 흰구름이 두둥실 떠다녔다. 비가 온다더니 다행이다. 우선 역에서 왼쪽으로 걸어 바게트빵 대회에서 2등을 했다는 빵집에 들러 점심으로 먹을 바게트샌드위치를 샀다. 빵집 건너편에 고흐공원 안으로 인포메이션센터가 있어 들어가 지도를 받았다. 무턱대고 영어로 묻기 전에 직원에게 불어를 몰라서 죄송한데 영어를 써도 되겠냐 먼저 물었다. 직원은 빙긋이 웃으며 괜찮다고 한다. 영어로 그냥 물어보지 않은 건 2주 가까이 머물며 프랑스를 많이 이해한 결과다. 한국에서 외국인 관광객이 일본말로 길을 물으면 기분이 어떻겠냐 생각해 보라던 친구의 말 덕분이다. 백 년 넘게 프랑스에서 전쟁을 일으킨 프랑스와 영국의 역사와, 한국과 일본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공원 한편엔 빼빼 마르고 수염을 기른 키 큰 빈센트 동상이 서 있었다. 화구를 넣은 큰 가방을 메고 손에는 붓을 든 젊은 청년이었다. 그림으로 빈센트의 얼굴 자화상만 본 터라 몸이 저렇게 말랐을 줄 상상하지 못했기에 다소 낯설었다.  서른일곱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니 젊은이의 모습이 당연한데도 빈센트를 떠올리면 왜 몸집이 큰 나이 든 아저씨의 얼굴을 떠올렸을까.


 공원벤치에서 빈센트를 바라보며 샌드위치를 먹고 있자니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졌다. 큰 나무 아래로 달려가 비를 피했다. 넓은 나뭇잎이 한동안 비를 막아주었지만 곧이어 천둥번개까지 몰아쳐 건물 안으로 옮겨야 했다. 삽시간에 세상이 깜깜해지고 빗속에 잠겼다. 문득 밖을 보니 공원 한가운데 쏟아지는 소낙비를 고스란히 맞고 서 있는 빈센트의 동상이 보였다. 저 비를 맞듯 삶의 무게를 온몸으로 맞다가 떠난 그가 마음을 아리게 했다.


  비가 금세 그칠 것 같지 않아 역 쪽으로 달려가 카루프에서 우산을 샀다. 우산을 하나 더 사서 빈센트에게 건네고 싶었다. 그의 삶에 우산을 씌워주고 싶었다. '빈센트, 힘든 일은 소낙비처럼 예고 없이 쏟아지기도 하더라구요. 기다리면 맑은 날이 오지 않을까요.'  기다려도 오지 않는 맑은 날을 기다리다 지쳤을까 그는.


  빈센트는 1890년 5월 20일 파리 북부 오베르 쉬와즈에 정착했다. 37년 생애에 38번째 이사한 동네였다. 그를 도와주던 가세박사가 하루 6.5프랑의 싼값에 방을 구해준다 했지만 자기가 라부여관 다락방에 3.5프랑에 구했다며 좋아했다. 방값으로 하루 1프랑과 하루 식사 2.5프랑이 포함된 가격이었다. 다락방은 당시 가장 값싼 방이었다.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라부여관 3층 다락방엔 쾌쾌하고 오래된 나무 냄새가 났다. 삐걱대는 나무계단을 오르니 가구라곤 하나 없는 작은 방에 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다. 침대하나 겨우 들어가고 지붕으로 작은 창 하나 있는 방. 먹구름 가득한 하늘에서 미미한 빛이 겨우 그의 방으로 스며들었다.  별이 빛나는 하늘과  흘러가는 구름과 쏟아지는 비와 눈이 보였을 하늘을 향해 난 창. 그 창으론 지상의 경치가 보이지 않았다.


 1890년 7월 29일 그는 죽었다.  권총으로 옆구리를 쏘고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해 피를 흘리며 이 다락방에 돌아와 이틀 동안 앓다가 패혈증으로 떠났다. 당시 옆방에 세 들어 살던 화가 d'Anton Horschig는 빈센트가 밤새 앓는 소리를 들었다 한다. 19세기 당시 자살은 범죄였고 그가 쓰던 가구는 모두 불태워졌다. 마을 성당의 신부는 스스로 목숨을 앗은 그의 장례미사 집전을 거부했고 여관주인 라부씨의 제안으로 동생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1890년 7월 30일 라부여관 일층 식당에서 장례가 치러졌다. 관 주위는 그의 그림 몇 점과 노란 다알리아와 해바라기로 장식되었다. 자살한 사람의 집은 방문하지 않던 시대라 그가 죽은 후 이 방은 오래도록 비어 방치되었다.


 빈센트는 생애 마지막 70일을 이곳에 머물며 74점의 그림을 그렸다.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렸건만 평생 단 한 점의 그림만 팔 수 있었다. 형의 천재적 예술 감각을 알아본 동생 테오는 아트 딜러로 일하며 형의 작품을 팔아주려 무단히 노력했으나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빈센트는 동생 테오에게 정신적 경제적 도움을 받으며 이 도시 저 도시를 떠돌았다. 예술과 사람을 사랑한 그는 이 마을을 좋아했지만 우울증과 외로움에 시달렸다. 우울증의 늪에서 벗어나려  압셍테 Ansente를 마시며 약에 취한 듯 몽롱히 지냈다.  압생테는 특히 술을 마셨을 때 야기되는 환각증상이 예술적 감성을 자극시킨다 하여 많은 화가, 소설가, 시인을 비롯한 예술가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았다 한다. 많은 예술가들이 이 독한 술에 의지 했던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허허로운 삶의 빈 공간을 독한 술의 힘으로나마 채워보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빈센트도 예술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갈등을 독한 술로 풀고 싶었을까. 자신의 예술세계와 현실의 장벽을 극복하지 못한 한 예술가의 깊은 고독이 그를 벼랑으로 벼랑으로 몰고 있었다.


 병으로 고생하던 그를 부랑자 취급하며 동네아이들이 그림 그리는 그에게 돌을 던지기도 했다 한다.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궁핍에 시달리던 그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존재였을까. 투명 인간 취급을 당하며 존재가 희미해진 삶의 종착역은 조용히 허물어지는 것일지 모른다. '여기에 나도 살아있어. 제발 내 존재도 한번 살펴봐줘.'


 문득 파리 북역 앞에 앉아있던 남자가 떠올랐다.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취급을 받는 사람들. 내 주위를 서성였을 수많은 빈센트들, 길을 가다 빈센트와 마주쳤어도 그 남자처럼 지나쳤을 나도 빈센트의 외로움에 무게를 더했을 터이다. 가장 절박하고 힘에 부치는 순간에 사람에게 필요한 건  '당신이 그랬다면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란 주변인의 전적인 믿음이라 했다. 그 말에 희박한 산소 속에서 산소를 얻은 것처럼 사람은 힘을 얻게 된다 했다. 심폐소생술 같은 이 한마디를 그도 듣고 싶었을까.


 그의 다락방을 나오자 거세게 쏟아지던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빈센트 봐요 사납던 비가 그치고 해가 났어요.'  나도 모르게 그의 다락방을 올려다보며 중얼댔다.


 좁은 골목을 돌아 그가 묻힌 공동묘지를 향해 언덕을 올랐다.  언덕 위에 넓은 들이 펼쳐졌다. 돌담아래 소박한 두 개의 무덤 앞엔 누군가 갖다 놓은 해바라기꽃이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생 테오와 나란히 누운 그도 따뜻한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지 햇살이 필요했던 그의 삶에 구름은 너무 오래 해를 가리고 있었다.  비 갠 하늘 아래 방문객들은 어두운 얼굴을 하고 그에게 고개 숙였다. 빈센트는 자기는 괜찮다고 이제 햇살이 따뜻하다고 오히려 그들을 위로했다.


 묘지를 나오니 그가 그림으로 남긴 까마귀 나는 밀밭이 펼쳐졌다. 130여 년이 흘렀건만 그림에서 본 밀밭의 세 갈래 길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다. 밀밭은 해바라기밭이 되었다가  유채밭이 되었다가 해마다 작물이 바뀌어 갔지만 그에게는 영원히 까마귀 나는 밀밭으로 남아있었다.


 그가 그림으로 남긴 오베르 쉬아즈 마을의 구석구석을 빗속에서 찾아 다녔다. 시청사와 '오베르 교회'의 모델이 된 성당, 계단이 있는 길, 들판을 만났다. 긴 세월 속에도 변함없이 그대로인 풍경이 시공간을 넘어 그의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착각을 일으켰다. 바람 부는 밀밭 너머에서 빈센트가 밀짚모자를 쓴 채 붓을 든 손을 흔들고 있었다.




1890년대와 현재의 라부여관, 나뭇잎에 가려진 지붕 오른쪽 창문이 빈센트가 살던 다락방 창문이다

빈센트가 매일 식사하던 라부여관 1층 식당/ 고흐공원의 빈센트 동상

다락방 그의 방으로 올라가는 오래된 계단과 빈센트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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