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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ica Aug 11. 2022

간절하되 비굴하지 않게 2

막다른 길에서 선택한 일

“이렇게 하면 꼭 망한다”


나의 첫 사업체는 커피숍이었다.

위치로 말하자면 관광과 쇼핑의 노른자위이자 주택가와 사무실도 있어 비수기가 따로 없을 지역이었다.

줄리아 로버츠와 리처드 기어가 나오는 달달한 영화의 배경이기도 했던 유명한 호텔이 인근에 있고 , 유명 백화점과 단독 로드샵들이 쫙 깔린, 미국 자본주의와 부의 상징인 동네였다.  그렇게 깔끔하고 예쁜 부촌의 한 중앙에서 나는 커피를 팔았다.  


장사는 잘됐다.


너무 바빠서 정신 차릴 수 없이 잘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잘 되었는데도 ,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손해를 보고 가게를 팔았다.  그 길의 많은 상가건물들의 주인들은 단 세명이었는데 모두 페르시안계 유태인이었다.

그 셋은 그 길의 월세를 어떻게 올리고 법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권리금을 현금으로 받아내야 하는지 너무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해마다 오르는 월세 이외에 건물세와 건물 유지에 필요한 공공요금까지 세입자들이 모두 나누어 내야 하는 triple net system 이 적용됐다. 사실 그 내용들도 장사가 잘되고 바쁜 거리에 상점이 위치했을 경우 대부분 적용되는 거라고 들었기 때문에 처음에 계약서에 사인할 때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합법적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유학생 신분에서 다른 비자로 바꾸어야 하는 시점이었고, 그 당시 남편의 취업범위를 넓게 하기 위해서 E2 visa의 main으로 내가 비즈니스를 운영해야만 하는 때였다.

학교 다니면서 파트타임 일 조차 몇 번 해보지 않았고 , 자랑을  할 일은 더욱더 아니지만 , 결혼을 하게 된 후로는 살림조차 남의 도움을 받아 꾸려왔던 내가  미국 서부의 소비도시 한가운데서 생전 처음 장사를 시작한다는 게  사실 너무나 황당하고 무모한 일이었긴 했다.

그러나 무모했지만 할 수밖에 없는 상황 또한 나에게는 절실하게 다가왔다.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표면적인 첫째 이유는 아이의 교육문제였다. 돌아가기엔  첫아이가 한국식 조기교육에서 이미 너무 뒤처진 데다,  한국말과 영어를 둘 다 잃지 않고 공부하게 하는 것이 엄마로서 자신이 서질 않았다. 게다가 해마다 치열해지는 한국의 입시 관련 소식은 나를 더더욱 귀국하는 것에 자신 없게 했다. 둘째 이유로는 , 한국에 살았던 신혼 초, 그 당시 남편이 회사를 다니면서 누렸던 한국의 밤 유흥문화와 회사 업무 관련하여  (핑계였을지도 모르지만) 공백일 수밖에 없었던 가정생활을  생각하면 정말 한국으로의 귀국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위의 두 가지 이유로 인해 나는 미국에 남기 위한 온갖 궁리를 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합법적 비자 변경을 위해서 나는 난데없는 장사의 길로 들어서게 된 거였다.


이민법 변호사와 세무사와의 상담 이후 알아본 몇 군데 중에 그래도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 커피숍을 위주로 알아보고는  지역의 안전과 나중에 되팔 때의 상황들을 고려해서 우리는 베벌리힐스 지역의 한 커피숍을 보게 되었다.

겉으로는 아담하고 깨끗하고 귀여운 그 가게는 사이즈도 적당했고 무엇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주택가와 사무실들이 함께 있는 지역이라 손님층이 섞여 다양했다. 주중은 주중대로, 주말은 주말대로 손님은 이어졌고 영업시간도 하루 종일이 아닌 아침부터 초저녁인 7시까지 하면 되었다. 영업시간과 요일에 비해 매상도 안정적이었다.

다만 계약기간이 5년 계약에 5년 option 이 있었는데, 이 option이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 줄 몰랐던 나는  그저 내 좋은 대로 나름의 긍정적 해석을 했던 것이다. option이란 게 주인이 시세라고 생각되는 가격으로 한꺼번에 올릴 수도 있고,  계약조항 변경이 옵션기간 동안은 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몰랐다.  장사라고는 해본 적도 없지만, 뭔 장사라도 당장 해야만 하는 급박한 마음을 가진 초짜인 내게는 설명이 들리지도, 잘 보이지도 않았다는 말이 더 솔직한 고백일 거 같다. 그리고 팔고 싶어 한 seller 입장에서는 두리뭉실 감추고 잘 포장해서 경험 없는 초짜이면서도 조급한 마음이 훤히 보이는 buyer인 내가 이 업장을 꼭 사도록 매력 있어 보이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하튼, 장사는 시작되었다.

비자 문제도 동시에  그렇게 해결되었다.

남편은 신분에 상관없이 직장을 구하면 되는 거였고,

평생 남의 돈과 나의 노동을 바꾸어 받아 쥐어본 적 없던 나는 매일 아침 새벽을 걷어차고 집을 나서야 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장사란 이렇게 몸이 고된 것이려니 하며 한 달을 버텼다. 사실 버텼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전주인이 트레이닝시켜준다는 명목으로  매니저를 우리 가게에 묶어두어 준 덕분에 나는 그 매니저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서 겨우겨우 한 달을 지내 온 거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났다.

이제 단골 이름도, 그들의 커피 취향도 알게 되고 서서히 내 가게가 되어가나 보다 하며 스스로 뿌듯해지는 시점이 되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서서히 일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힘들게 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내가 그토록 의지하고 믿던 매니저가 그만두고 싶다며 노티스를 준 것을 시작으로, 주방서 일하던 사람이 , 그다음은 배달하던 사람이 번갈아 가며 속을 썩였다.  

그때쯤 모든 분야의 일들을 터득하게 된 나는 그들이 비우게 된 자리들을 돌아가며 채우고 일하는 깍두기 처지가 되었다.

일년이 지날때쯤은 그 돌발상황들과 일하는 사람들끼리의 drama가 나를 너무나 힘들고 지치게 했다. 지금은 그런 일들은 그저 살아가는 일들이자 업장에서 언제든 있을법한 사건들이라는 걸 알지만 장사 초보였고 어렸던 그 당시의 나에게는 너무 버거운 일이었다.

게다가 장사는 바쁘고 , 일은 고되며, 집으로 돌아가면 또 나의 손을 기다리는 집안일과 한창 자라는 아이들이 있는 상황에는 어딜 가도 나의 쉴 곳은 없었다.

쉬는 날도 쉴 수가 없는 것이, 다음 주의 장사 준비와 집안일을 미리 준비해야 했고 , 밀린 서류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그렇게 일 년이 흘렀을 때 나는 모든 일이 진공 상태에서 흘러가듯, 느낌도 생각도 없이 모든 게 멍멍한 상태가 되었다.  

이년이 거의 다 되었을 시점 ,도저히 안 되겠다, 이렇게는…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 가게를 내놓기로 하고 리스팅에 올렸다.

많은 사람들이 문의가 왔고 부동산을 통해 오퍼가 들어왔다.

우리는 순조로이 에스크로를 오픈하고 가게 계약기간과 옵션의 세부사항에 대해 landlord에게 문의하려 연락을 취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이 건물주는 연락조차 잘 닿지 않고 새 계약을 요구하는 잠재적 buyer들에게 대답을 줄 수 없는 상황들이 이어졌다. 결국 에스크로는 깨어지길 몇 번을 반복하였다.

목마른 놈이 먼저 우물을 판다고 했던 것처럼, 나는 landlord와 미팅 약속을 잡고 겨우 만났다.

그 할아버지는 멋진 사무실에서 챔피언 벨트 같은 큰 버클의 에르메스 벨트를 배 위에 얹은 채 나에게 말했다.

“네 계약 기간은 이제 6개월 남았어. 네가 가게를 그 시간 안에 팔지 못하고 옵션 기간으로 넘어가면, 난 그 가게를 시세에 맞게 월세를 올릴 예정이야. 만일 네가 그렇게 낼 수 없어서 가게를 접는다면 그래도 나는 상관없어, 그 자리에 들어오고 싶은 사람들은 줄을 섰으니까.! 하지만 굳이 얼마라도 받고 네가 팔고 싶다면 내가 가게 계약을 새로 연장해서 만들어줄 테니 그럼 올려진 월세비용을 네가 먼저 나에게 캐시로 주고 새로 들어올 사람들에게는 네가 팔 수 있도록 같은 월세 가격으로 동결해서 계약을 해줄게.”

큰 인심 쓰듯 그는 나에게 올릴 가게 월세 분량을 먼저 내가 캐시로 들고 오기를 정확하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뭉텅이의 4만 불 캐시를 그에게 들고 갔을 때 그는 자신이 이렇게 돈을 벌어 많은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있다고 주절주절.. 묻지도 않은 내게 말하였다.


가게를 새로운 주인에게 넘기고 얼마간의 돈이라도 챙기려면 나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계약기간이 다 된 가게를 계속하다 맨손으로 나가던지, 아니면 그가 말한 “올릴 월세분”을 내가 먼저 계산하고 새로운 계약서를 받아 새 주인에게 건네줘야 하는 거였다.


그렇게, 나는 첫 번째 비즈니스를 접었다.

그 피 말리는 과정 속에서 나는 생애 처음으로 그 유태인 할아버지에게 살의를 느꼈다. 그리고 다 손해 볼 수 없어서 그나마 감당할 수 있는 손해를 택하고 뒷걸음질 쳤다.


내가 그 첫 비즈니스를 사고파는 과정 중에 얻은 것이 있다면, 계약서의 철저한 검토와 계약 기간의 중요성, 그리고 landlord의 reputation 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 절감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무튼 , 장사가 잘되고 바빠도, 그렇게 나 자신의 역량과 상황은 예상과 다른 결말로 갈 수 있는 너무나 중요한 변수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라고나 할까.

벌기도, 모으기도 힘든 그 돈을 허무한 keymoney로 뭉칫돈을 주고서야 놓여난 그 비즈니스를 생각하면.. 기억하기도 싫은 추억이어서 , 나는 한동안 그 앞길로는 지나가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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