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한 의문은 점차 구체적인 질문이 되었고, 그 질문은 잠깐의 짬이 생기면 연속적으로 마음을 울렸다.
'엄마, 직장인, 아내, 나. 진짜 나는 누구인가?
워킹맘, 누가 나에게 이 역할을 부여했나?
나는 아이에 걸까, 아님 일에 더 몰입해야 하는 걸까, 아님 '나'의 꿈에 집중해야 하는 걸까?
균형 잡힌 삶을 살 수는 없는 걸까?
내 삶의 주인은 누구일까?
하루의 시간을 가장 많이 할애하는 장소/대상이 나를 대변할까?
직장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나는, 나쁜 엄마일까?
왜 직장 때문에 아이를 기관에 맡겨야 하는 걸까?
나는 왜 일을 하는 걸까?
이 일은 정말 나의 꿈과 맞닿아 있을까, 아니면 생계 때문에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왜 대학원을 갔었을까?
대학원이 내 생활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주말과 내 급여를 대학원에 통째로 바쳤던 이유는 무엇일까?
수료에서 만족할 수는 없나? 논문을 기어코 쓰려는 이유는?
결혼 전후 너무나 변한 나, 진짜 나는 누구인가?
오랜 내 소망은 도대체 무엇이었나?
내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삶은 무엇인가?
오늘 내 삶에 내 미래가 속해 있나?
내가 진짜로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
내가 원하는 삶, 지금 현실은 원했던 삶인가?
나는 왜 ,,,,?'
또 한 번의 정체성 혼동에 휩싸인 듯했다. 오롯이 '나'에 집중하며 '나 지금 사춘기예요~'를 분출할 수 있었던 때와 상황이 달랐다. 나에겐 나를 필요로 하고, 내가 반드시 자리를 지켜야 할 역할이 있었기에 그 혼동의 '질서 정립'을 위한 시간을 충분히 할애하기는 제약이 있었다.
하지만 그 마음의 소리, 즉 내면의 질문들은 심신이 고단한 나에게 생기를 기대하게 해 주었다. 질문의 답이 간단하지 않았기에 생각과 마음은 복잡하고 답답했지만, 마음의 울림은 '찐 나'에게 익숙했고 반가웠다. 아이가 잠들어 있을 때나 운전할 때 등 온전히 '나'인 시간에 그 질문에 집중했다. 진지했고, 심각했다.
'무엇이 문제인 걸까, 아니 문제가 있는 것은 알겠는데 그게 뭘까?'
24시간이 일과 육아, 살림으로 빡빡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그 질문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답을 생각하며 마음에서 울리는 질문에 집중했다. 질문들을 되뇌고, 곱씹을 때면 마음이 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