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오래되어 부식이 일어나고 있는 굴다리 밑을 지나게 되었다. 시멘트 조각들이 떨어져 나온 자리에 빗물을 흘려보내는 파이프라인이 드러나 있었고, 그 위로 전봇대에서 시작된 전선들이 치렁치렁 늘어져 있었다.
종종 볼 수 있는 장면인데, 그날따라 유독 눈에 들어온 이유는 뭘까. ‘경제적 파이프라인’이라는 단어가 뇌리에 박혀 있기에 실물 파이프라인의 모양새에 관심이 생겨서 일 테다. 그러나 눈길의 시작은 파이프라인이었지만, 정작 내 눈길이 오래 머문 곳은 늘어져 있는 전선 가닥들이었다.
한 곳에 모여 있지만 정착지와 목적지가 다른 전선들. 넘치는 에너지를 보유한 전선들이 한 데 있어도 안전할 수 있는 이유는 각자 두터운 피복을 입고 있기 때문이다. 전선들은 에너지를 피복으로 감산 채 서로를 위해 안전하고 가지런하게 있어야 한다. 행여나 전선 스스로 피복을 조금이라도 벗거나, 상처로 인해 의도치 않게 피복이 벗겨지면, 민 구리선의 충돌로 합선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테니 말이다. (합선은 한 데 모인 전선을 모두 태우고, 막상 전기가 필요한 집과 사무실에 에너지가 이르지 못하게 한다.) 전선들을 보며, 깊게 생각을 한 것은 모여 있는 전선들이 마치 한 조직의 인간관계와도 같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입사 후 제일 처음 배치를 받은 곳은 총무팀이었고, 업무는 인사였다. 총무팀에 인사담당자는 단 한 명, 그 한 명이 250명 내외의 본사 직원과 수십 개 산하기관의 대표님들과 의사소통하며 관계를 해야 했다. 약 4년간 약 300명의 직원들을 서류와 온라인, 대면으로 접촉하며 배운 것이 있다면 ‘사람은 알 수 없다.’라는 것. 한 조직에 머물고 있더라도 개인의 배경과 지식, 추구하는 가치와 목표는 다 개별적이기에, 쉽사리 개인의 현 상황을 가정하거나 판단하거나 개입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할 수 있는 것은 업무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을 제공하되 사적으로는 최대한 개인의 상황을 배려할 수 있는, 공사를 분명하게 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뿐 이리라.
이러한 나의 태도는 사실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매우 젠틀한 사람도 마음에 생채기가 날 때면 조직이 시끄럽게 으르렁 거릴 때가 있었는데, 으르렁 거리는 두 사람이 만나면 그 날은 주변이 험할 정도로 언성이 높아졌고 때론 그날의 업무가 마비될 때도 있음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고, 유독 ‘인사’와 관련된 ‘안건’으로 그런 사례가 있었으니... 유일한 담당자인 나는 보고 싶지 않아도 자리를 피할 수 없어서 경험하게 된 일 들이다. 업무와 자리로 인해 그런 일들을 겪다 보니, 사람은 겉으로만 봐서는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이 어떠한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 후로 나는 사람들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살아가게 된 것 같다. 피복이 벗겨지지 않아야 합선이 되지 않는 전선들처럼, 피복을 유지하고 예의를 지키며 조금은 간격을 두고 말이다. 각자의 삶을 걸어가는 가운데, 필연처럼 만나 어느 순간을 공유하고 생각과 마음을 나누되 언제까지 함께할 수 없음을 늘 기억하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관계라고나 할까. 어쩌면 이런 생각조차 나의 피복 인지 모르겠다. 사람을 좋아하고, 마음을 나누고 생각을 공유하기 좋아하는 내가, 언제 닥칠지 모르는 헤어짐과 트러블로 인해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만드는 완충장치 말이다.
운전 중 굴다리를 지나며 보게 된 파이프라인과 전선에 대한 상념을 며칠씩이나 글로 풀어내다니... 여간 고독과 사색을 즐기고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