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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현 Mar 24. 2023

퇴사사유서

본인은 이러한 이유로 1년 4개월 만에 퇴사를 합니다.

“UX 팀만 아니면 되는데”


이직 4개월 차에 담배를 피우던 A 팀 팀장님이 하는 소리를 우연히 들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러게요” 하며 호응을 했다.


애초에 이 회사에 UX 팀이라는 게 생긴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그냥 내가 잘하면, 우리 팀이 잘하면 되겠지 하고 “흥” 하며 넘겼다. 

그 후로 A 팀과 일할 때는 왠지 모르게 더 열심히 준비하고 설득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저 흡연구역 험담은 희미해졌지만

내가 참여했던 프로젝트가 아무런 언급 없이 종료되어 있거나 

내가 담당하는 프로덕트가 난데없이 수정되어 있거나

내가 설계한 기획이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하고 누군가의 취향대로 그려져야 할 때마다            


“UX 팀만 아니면 되는데"라는 다시 나타났다.



그러면서 [이 회사는 UX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지며

그럼 내 일은 이 회사에서 무가치한 일인 건가? 하는 회의감이 잇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갖고 열심히 했다.


현실 조건에 맞추어 잘하려고 했다.


결과로 보여주면 된다는 패기 있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위 같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상황은 반복되었고, 

나와 회사 사이의 벽은 높고 두꺼워졌다.



나는, 우리 팀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았다.


아무리 리더들이 우리 팀의 역할이 꼭 필요하다 말해도

실질적으로 협업을 해야만 하는 다른 팀과 동하지 않으니

소속감보다는 잠시 다른 회사에서 파견 나온 사람 같아졌다.



마음이 뜨니 열심히 하고 싶지 않아 졌다.


이러저러해서 ‘원래’ 안 되는 현실을 마주할 때마다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하는 게 나의 일이고

내가 성취감을 얻는 방법인데 


‘그냥’ 수긍하기 시작했다.


이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일하는 방법은

생각 없이 그냥 일하는 것이라고 나름의 방법을 찾았고,


희망이나 성취감 따위가 사라진 마음에는 

자연스레 부정적인 감정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부정적인 감정은 회사로 향하고, 


사무실에 앉아있는 동료들에게 향하고 


이제 나를 향하고 있다.




과거의 나는 야근과 철야를 하더라도 열정적으로 일하던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확신이 없다.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나만 남았다.




본능적으로 나라는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내가 성취할 수 있는 분야를 찾고,

지금의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그 일을 통해 나는 누군가에겐 롤 모델이 되고, 

귀감이 되는 사람이 되고,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는 사람이 되었다.



그럴수록 괴리가 커졌다.


이 회사에서 나는 쓸데없는 일을 벌이는 사람인데,

이 회사 밖의 나는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퇴사를 결정했다.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존재임은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어딘가에 속해 있는 나는 많이 지쳐있다.

다음번에 함께 일하게 될 동료와 회사를 위해 푹 쉬며 충전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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