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신규교사 나누리_4월 02

by 릴리포레relifore

다음 날 오후가 되어 나는 안정을 되찾았다. 응급실 이후 돌아가서 계속 지수를 보살피다 지수의 부모님이 도착하셨고, 다음 날 아침 지수를 데리고 올라가셨다. 지수가 떠난 뒤에도 우리반 아이들과 함께하는 수학여행 일정이 이어졌지만 나는 내내 지수의 몸상태가 걱정되었다. 그러다가 이제야 지수 어머니의 문자를 받게되었다. 지수가 많이 좋아졌다는 문자였다. 아이들한테 잘 말해달라는 부탁도 함께였다. 나는 지수를 궁금해 하는 아이들에게 지수가 왜 그랬는지에 대해 잘 설명해주었고, 학교에서 지수를 다시 만났을 때 놀리거나 장난치면 안 된다는 지도도 함께 했다. 6학년 아이들이라 그런지 다행히 재미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는 지수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어 아이들에 대한 지도를 잘 했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무엇보다 지수가 많이 좋아졌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아이들도 지수를 많이 걱정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잘 보살펴주신 덕분이죠 뭐. 감사드립니다.”

“아니에요. 어머니. 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죠. 그리고 지수가 2박3일 동안 함께 했으면 좋았을 텐데 저도 많이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이제라도 많이 나아진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려고요.”

“네. 지수한테 잘 말씀 부탁드려요. 목요일까지 잘 쉬고 만나자고요. 금요일부터 정상 등교니까 말씀 부탁드립니다.”

“네, 선생님. 안녕히계세요. 수고하시구요.”
“네, 감사합니다.”


지수 어머니와 통화를 마치고 문화재를 해설해주시는 분과 함께 있는 우리 반 쪽으로 달려갔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때 사진기사님이 선생님들을 불러 각 반 단체 사진을 촬영한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빨리 서는 반부터 찍고 숙소로 돌아가자고 선생님들과 대화를 나눈 뒤 나는 우리 반 아이들을 줄 세우기 시작했다. 6명씩 네줄을 기본으로 세우며 키를 맞춰 큰 아이들은 뒤로 보내고 작은 아이들은 앞으로 앉게 했다. 중간 아이들은 무릎을 잡고 반만 일어서는 포즈를 취해야 하는데 여기저기서 볼멘 소리가 튀어 나왔다.


“아이, 다리 아파.”
“선생님 저 일어서면 안돼요?”
“저 승준이랑 붙어서 찍으면 안돼요?”
“배고파요.”

“안 찍고 싶어요.”

등등.


아이들의 말에 일일이 대답해주다보니 이미 4반이 사진기사님 앞에 있었다. 1반과 3반은 찍고 줄을 서서 버스로 이동 중이고. 이럴 때도 신규티가 확 나는구나, 싶어 얼굴이 달아올랐다.

“얘들아, 얼른 찍고 숙소가서 밥 먹자!”
나는 아이들에게 파이팅을 외쳐 주었다. 영어 선생님도 옆에서 줄을 잘 세워주셨고, 사진 기사님만 오면 사진촬영이 완료되는 분위기였다.

“쌤. 제 옆에서 찍으실 거에요?”

내가 아이들 제일 뒤의 가장 왼 편에 자리를 잡자 옆에 서 있던 혜민이가 입을 열었다.

“응. 같이 찍자.”

“네. 쌤. 근데 옆에서 다은이가 4반 쌤 멋있대요.”

“왜 그래? 내가 언제!”

혜민이의 말에 내가 바라보자 어느새 얼굴이 빨걔진 다은이가 발끈하며 혜민이 팔을 때리기 시작했다.

“니가 그랬잖아. BTS 닮았다고.”

“야, 그건 아니다. 우리 오빠들이 훨~ 잘 생겼지.”


혜민이의 폭로에 아래 앉아 있는 여자 아이들이 야유를 보내며 말도 안 된다고 손사레를 쳤다. 아이돌을 닮았다고?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며 나도 모르게 시선이 이쌤에게 향하고 있었다. 키는 크고, 이목구비도 저만하면 괜찮고. 수학여행 동안 학교에서와 다른 스타일의 옷을 입고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건가? 오늘 이쌤은 연한 청남방에 면 바지를 입고 있었다. 단체사진 촬영 중에 혼자만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그런지 더 눈에 띄었다. 멍하니 이쌤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런데 사진을 다 찍은 이쌤이 선글라스를 벗고 나를 바라보았다. 순간 숨이 확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이쌤은 나를 향해 소리쳤다.


“나누리 선생님! 얼른 찍고 버스로 내려와요!”

나누리 숨 쉬어. 숨 쉬어! 대답도 해야지!

“아, 네! 알겠습니다!”

나는 그제야 숨을 쉬며 대답을 했다. 내 대답을 들은 이쌤은 아이들을 통솔해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내가 지금 뭘 넋을 잃고 쳐다본 거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세차게 고개를 흔들어 본다. 그 사이 우리 반 앞으로 도착한 사진기사님이 아이들의 옷매무새를 정돈해주며 우리반 사진 촬영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어색한 단체사진용 웃음을 지으며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버스 창으로 학교 건물이 보이자 나는 아이들에게 간단하게 공지사항을 알려주었다. 그 내용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놀러가지 말고 집으로 먼저 갈 것, 샤워하고 푹 쉴 것, 내일 전과 같이 등교할 것, 정상수업이 있다는 것 등이었다. 아이들은 차창 밖으로 보이는 마중 나온 어머니들에게 손을 흔들며 내릴 준비를 했다. 그 중 한 아이가 나에게 질문을 했다.

“지금 몇 시에요?”

“지금 3시네.”

내가 대답하자마자 아이들의 탄식이 터져 나온다.

“아, 4시 넘어야 학원 안가는데...”

“맞아, 맞아.”

“영어학원 숙제 있었나?”

어른들이 휴가 뒤 일상 복귀가 힘든 것처럼 아이들도 수학여행 뒤 힘들게 일상에 적응해야한다니 슬픈 일이다. 선생님의 권한으로 오늘 학원 다 쉬고 집에가서 푹 쉬어, 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어 안타깝다. 슬픈 표정으로 내 자리에 돌아가 짐을 챙긴다. 그리고 옆에 앉은 영어 선생님과도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고 인사를 주고 받았다. 나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덧붙였다. 선생님이 없었으면 첫날 지수 사건때 패닉이 왔을 거라고, 정말 감사하다고 거듭 말했다. 버스가 주차장에 들어서고 나는 아이들 보다 먼저 밖으로 나왔다. 아이들을 마중 나온 어머니들이 나에게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넸다. 나도 덕분에 잘 다녀왔다고 대답했다. 아이들이 버스에서 하차하기 시작하고 나는 한명씩 인사를 하고 집으로 보냈다. 버스 안에 더 이상 아이들이 남아 있지 않게 되자, 영어 선생님이 버스 뒷자리까지 확인을 한 뒤 내려왔다. 나는 운동장에 남아 있는 선생님들과 교장선생님께 인사를 하러 올라갔다.

“수고 많았어요. 6학년 선생님들. 그리고 전담 선생님들. 교감 선생님도 수고 많으셨고. 참 멀미약으로 먼저 돌아갔다는 학생은 괜찮아졌나요?”
교장선생님의 질문에 선생님들이 내 얼굴을 바라보기 시작했고, 나는 어서 입을 열었다.

“네, 어제 집에 도착한 뒤에 많이 좋아졌다고 연락 받았습니다. 오늘도 전화 드려보니 완쾌되었다고 하시더라고요. 내일 정상 등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신균데도 나누리 선생님이 대처를 참 잘했습니다. 다른 선생님들도 수고 많으셨고요.”

교장선생님한테 직접 들은 첫 칭찬이었다. 왠지 뿌듯한 기분이 들어 슬며시 미소가 나왔다. 2박 3일간 녹초가 될 만큼 힘든 일정이었는데 노력을 조금이라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큰 위로가 되었다. 빈 말일 지라도 지금은 위안이 되었다.


“그럼 올라가 보겠습니다.”
부장님의 말에 모든 선생님이 인사를 하고 교장실을 나왔다. 그리고는 자신의 학급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6학년 선생님들은 일단 연구실로 향해서 수학여행에 대한 마무리 회의를 하기로 했다.

“어쩜 2박 3일 내내 패셔니스타야. 오늘도 엄청 이쁘네?”
부장님이 연구실 소파에 앉으며 수진쌤을 칭찬했다. 그러자 수진쌤이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빈 말이라도 감사해요. 부장님 덕분에 완전 지쳤는데 힘이 나네요~”

말을 마친 수진쌤이 내 옆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수진쌤은 스트라이프 셔츠에 민트색 반바지를 세련되게 소화하고 있었다. 같은 방을 쓰다보니, 수진쌤이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머리를 스타일링기기로 매만지고 메이크업도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나는 일찍 일어나는 것도 힘이 들어 매일 오늘은 머리 감지 말고 나갈까, 하는 혼자와의 싸움을 벌이곤 했었는데 자기 관리 잘하는 여자가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이번에 절실히 하게 되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교무수첩을 든 이쌤이 들어왔다. 이쌤은 내 바로 앞 의자에 앉았다. 선글라스를 벗어 책상위에 올려두며 나를 쳐다본다. 나는 화들짝 놀라 괜히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나 지금 뭐하는 거지? 수학여행부터 왜 이러는 거야? 나는 또 내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했다.


“뭐야? 나누리. 왜 눈은 피하고 그래?”

“니가 하도 수학여행 내내 괴롭혀서 그렇잖아. 첫날 도와준 걸로 엄청 생색낸 거 아냐?”
이쌤의 핀잔에 수진쌤이 내 편이 되어 장난을 치며 말했다.

“생색을? 내가? 말도 안돼. 나선생. 말 좀 해봐. 내가 생색냈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 같은 시선에 나는 또 눈을 돌리고 말았다.

“아, 아니요.”

“근데 왜 그래? 나한테 화난 거라도 있어?”
이쌤이 평소와 다르게 꼬치꼬치 묻기 시작했다. 뭐라고 말하지?

“다들 이제 그만하시고. 수학여행 총평 희의 해보도록 하죠. 오선생은 잘 정리해서 내일 보고서 올려야 될 거에요.”

“네! 알겠습니다!”
수진쌤이 군인을 따라하듯 거수경례까지 하며 말했고, 모든 사람은 웃음이 터졌다. 이쌤은 쟤 왜 저래, 하며 웃었고 나는 그런 이쌤을 쳐다보며 대화 주제가 나에게서 멀어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 회의를 끝나고 나와의 회의에 돌입할 작정이다. 도대체 이쌤을 대하는 것이 갑자기 어색해진 이유는 뭔지 제대로 파악해 봐야할 것 같다.


나와의 회의가 해답을 찾지 못해 장기전에 돌입하던 4월 말, 나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다. 때는 어제, 장소는 교무실이었다. 소식을 전한 사람은 다름 아닌 교감선생님이었다.

“지금 방송 업무를 맡고 있는 5학년 이지영 선생님이 출산휴가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9월이면 신규 발령이 날 것 같아서 그때까지만 방송업무를 맡아주도록 해요.”


방송 업무라니. 지금 수업이랑 별 거 아닌 업무에도 허덕이는 이 나누리에게 방송업무라니. 그것도 3월 정식 업무배정이 아니라 추가 배정이라니!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소식은 시한부 업무라는 점이었고, 불행 중 더 불행인 점은 그 사이 중대한 ‘운동회’라는 행사가 있다는 점이었다!


“어떡하니 나누리. 거기서 실수라도 하면 너 진짜 대박 사고 치는 거야.”

어제 퇴근 뒤 만난 동기 모임에서 친구 한 명이 이렇게 말했었다. 나머지 친구들도 안됐다, 그래도 잘 할 수 있을 거야, 등의 말을 해주었지만, 위로는 전혀 되지 않았다. 남들 앞에서 마이크 잡는 걸 싫어해 친구들과 노래방도 잘 안가는 나인데 재난대응훈련 같은 행사가 있으면 내가 마이크를 잡고 진행을 해야 한다니 정말 나의 성격과 맞지 않는 피하고 싶은 업무였다. 그러나 계속 고민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당장 코 앞에 운동회가 다가와 있어 매일 아침 운동회 연습을 위한 방송 세팅을 해야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6학년 방송반 아이들이 기기를 잘 다루어서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서 있었음에도 오늘 아침은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 방과 후에 방송반 아이들과 만나서 방송을 배우기로 한 시간이 되자 나는 본관 3층에 있는 방송실로 향했다. 이미 아이들이 와서 방송 기기를 세팅해 놓고 있었다. 이전 담당 선생님이 참 기특하고 영특한 아이들로 잘 뽑아 놓으셨네, 라는 생각을 하며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앞으로 3개월 정도지만 그래도 잘 지내보자! 앞으로 잘 부탁해.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선생님 잘 가르쳐주면 끝나고 떡볶이 시켜줄게.”


나의 말이 끝나자 마자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수업료가 떡볶이라니 굉장히 손해보는 장사일지도 모르는데 아이들은 매우 즐거워하고 있다. 아이들이 순수하게 느껴져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앞으로 잘 해보자! 어쩌겠어. 나누리 근성으로 열심히 헤쳐나가자!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5월의 문을 열었다. 직원회의에서도 내내 운동회 이야기가 전해졌고, 동학년 회의에서도 6학년 게임과 달리기, 계주 선정 회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회의와 운동회 연습이 계속될수록 정말 학교는 변한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어릴 적 운동회랑 얼마나 똑같은 지. 십년이 넘은 시간동안 과학기술은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변화하고 발전했는데 학교라는 집단은 그대로라니... 익숙해서 정겹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다. 그리고 학교에 가자마자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아침마다 운동회 연습을 하다 보니, 체육선생님이 되어가고 있는 느낌도 들었다. ‘운동회’만을 위한 학교라도 된 것처럼 교내에서 만나는 트레이닝 복 차림의 선생님들도 반티를 맞춰 입은 아이들도 평소와는 다른 운동회 시즌만의 색다른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그리고 그 중에 체육 업무를 맡고 있는 이쌤이 가장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회의마다 이쌤의 발언의 주를 차지하고, 매일 아침 조회대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가장 많이 말하는 사람도 이쌤이었다. 덕분에 오가다 얼굴 마주치는 일도 거의 없었고, 오랜만에 보는 이쌤은 처음 만났던 2월보다 그을려 있었다. 지금도 건물 옥상에서 만국기를 거는 일을 총 지휘하고 있다.


“거기 나선생! 좀 더 오른쪽으로 가봐.”

“네!”

생각없이 만국기 줄의 하나를 잡고 있던 나는 이쌤의 호령에 맞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 좋아. 그만! 거기서 잡고 있고. 거기 부장님! 좀 더 왼쪽이요!”

내가 걸음을 멈추자 옆에 있는 연구부장이 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줄을 잡고 있는 일이 좀 지겨워져서 고개를 돌리니 천막을 치고 있는 선생님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 내일 아침이면 저기서 아이들이 힘차게 응원을 하고 시끄럽게 웃으며 떠들고 하겠지. 갑자기 처음 맞는 운동회가 설레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젠 나의 순서다. 운동회에 맞게 학교 단장이 완료 되자 나를 찾아온 학교 방송의 AS를 담당하는 업체 사장님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방송반 아이들과 사장님과 함께 방송기기를 세팅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세팅한 채 퇴근하고 싶었지만, 그러다 기기가 분실되기라도 하면 큰 일이니 다시 원상복귀를 시켜야 한다. 그리고 내일 아침 누구보다 일찍 출근해서 방송 기기를 다시 세팅해놓아야 한다.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한 번 말씀해 보세요.”


내가 마이크를 잡고 아, 아, 하는 소리가 학교를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괜히 멋쩍어져서 얼른 마이크를 입에서 떼었다.

“잘 나오죠? 그리고 CD 음량 조절은 여기서 하시면 됩니다. 먼저 국기에 대한 경례부터 틀어볼게요.”

그러자 운동장에 달린 스피커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 음악이 크게 재생되기 시작했다. 사장님은 볼륨을 위로 아래로 조절하는 방법을 나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예. 잘 알겠습니다. 방송반 너희들도 잘 배웠지?”

“네. 쌤. 저희들은 작년에도 해봐서 알아요~”

역시 베테랑 방송반. 나는 엄지 손가락을 치켜 올려 존경의 뜻을 보여주었다.

“아, 교장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운동장으로 나온 교장선생님에게 업체 사장님이 인사를 한다.

“새로 방송 업무를 온 선생님이 맡으셨더라구요.”

“출산휴가에 들어가서 어쩔 수 없게 맡으셨죠.”
“근데 금방금방 잘 배우시는 것 같아요. 칭찬 많이 해주세요.”
사장님의 평가에 내 어깨가 으쓱 올라간다. 그런데 그때 이어진 교장선생님의 말씀이 나를 뜨악하게 만들었다.

“뭐, 사장님이 와서 다 도와주시는 걸 뭐. 나선생님이 수고하시는 게 뭐 있나? 아무튼 잘 배워서 내일 실수 없게 해요. 나선생님.”

“아, 네.”
멀어져 가는 교장 선생님을 바라보며 꾸벅 고개를 숙였지만 기분이 씁쓸했다. 수고 많아요, 라고 말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저번에 교장실에서 칭찬해 준 걸로 교장선생님에 대한 마음속 평가가 ‘좋아요’ 하나 올라갔지만, 오늘의 말로 인해 바로 ‘싫어요’ 버튼을 하나 눌렀다. 아니다 마구 눌러댔다. 다다다다.


대망의 운동회 당일. 나는 눈뜨자마자 씻고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방송 실수는 하지나 않을까 하는 괜한 걱정에 잠을 뒤척여 피곤했지만 아파트를 나서니 파란 하늘과 따뜻한 햇볕에 기분이 좋아졌다. 손목에 찬 시계를 보니 벌써 7시 반. 이미 방송반 아이들이 와 있을 시간이었다. 나는 집에서 십분 거리인 학교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학교에 도착하니 만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아직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등교하지 않아 그런지 학교는 고요했다. 조회대 위에 방송반 아이들이 방송장비를 설치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얼른 조회대로 달려갔다.

“얘들아, 안녕!”
“안녕하세요?”
“선생님이 메인 방송장비는 설치할테니 너희들은 마이크랑 마이크 대 좀 옮겨줘.”
네, 라는 우렁찬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방송반으로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고, 나는 한쪽 어깨에 길게 맨 가방을 크로스로 고쳐 매고 일을 시작했다. 조회대 바로 옆 방송용 천막 안에 메인 방송기기를 설치하고 CD재생기기를 연결시키고 있는데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일찍 왔네.”

고개를 들어보니 이쌤이었다. 흰색 계열의 트레이닝 복을 입고 하얀색 모자를 쓰고 있어 영화 촬영장의 반사판을 댄 것처럼 주변에서 빛이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새로 사셨나봐요.”
“어제 일을 너무 열심히 했는지 너무 더러워져가지고는 빨아서 말려 입을 시간은 없고 그래서 어제 샀어. 내 사이즈 있는 걸로 아무거나. 왜 예쁘냐?”

장난스럽게 씨익, 웃으며 이쌤이 물었다. 또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예... 예쁘긴요. 남자가 무슨...”

말을 돌리며 나는 계속 방송기기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쌤의 반응이 궁금해서 고개를 잠시 돌려보았다. 그러나 이미 이쌤은 운동장 끝 천막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괜시리 심통이 난다. 이 사람한테 왜 자꾸 심술이 나는지 모르겠다. 만나면 심장이 쿵 내려앉을 때도 많고. 좋아하는 건가? 내가? 이쌤을? 좋아한다, 라는 단어를 떠올리자 또 심장이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아냐, 이건 화가 나서 그런 거야.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서. 말도 안돼. 이쌤의 첫인상을 생각해봐. 나는 그간에 이쌤 때문에 기분 나빴던 일들을 한데 묶어 떠올려보았다. 그래, 내가 그런 사람을 좋아할 리 없지. 이쌤 말대로 여섯 살 차이나 나고, 수진쌤 말대로 틀에 박힌 사람을? 말도 안돼. 그래, 말도 안 되는 거야. 그냥 단순히 도움받았을 때 고마웠고, 또 기분나쁜 말 하면 기분 나쁜 것일 뿐. 이건 그냥...


“선생님? 선생님!”

방송반 아이들이 함께 나를 부르는 소리에 모든 상념이 싹 사라졌다.

“응? 왜?”
“마이크 이렇게 설치하면 되죠? 다 했어요.”

“맞아. 이제 운동회용 CD 틀어보고, 마이크 테스트 한 번씩 해봐. 선생님 반에 좀 갖다 올게.”

“네!”

아이들의 시원스런 대답을 들으며 나는 실내화를 갈아 신으러 건물로 들어갔다. 등 뒤로 마이크를 테스트 하는 소리와 애국가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방송담당 나누리! 정신 차리자. 오늘은 반 아이들도 챙겨야 하고 방송도 책임져야 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고 있잖아? 정신 차리고 일이나 열심히 하자. 말도 안 되는 생각은 얼른 잊어 버리고! 파이팅, 나누리! 나는 나에게 힘을 불어넣어주며 계단을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운동회가 시작되고 나는 반 아이들을 조회대형으로 세워놓고 방송 천막으로 돌아갔다. 조회대 양 옆에 내빈들과 학부모들이 자리잡고 있었고, 조회대 위에는 교장, 교감선생님과 교무부장이 서 있었다. 이쌤은 국민체조를 하러 올라가기 전에 내 옆에 대기하고 있었다.

“다음은 국기에 대한 경례가...”

이 순간이 제일 긴장된다. 드넓은 운동장에 많은 사람들이 서 있고 가장 고요한 순간.

“국기에 대한 경례!”

바로 지금이다. 나는 아까 맞춰놓은 2번트랙의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앗! 그런데 손이 삐끗해서 3번도 아니고 4번 트랙으로 음악이 넘어갔다!

말도 안돼!


“국민체조 시작! 빠라바라밤~ 빠라바라밤~”

이 정적에 말도 안 되는 멘트와 음악이 크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천막 안의 방송반 아이들이 나를 주시했다.

“선생님!”

조회대 위에 교무부장도 나를 불렀다. 교무부장 뿐인가? 교장, 교감선생님, 또 앞에 수많은 학부모들, 선생님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미 상당수 웃고 있었다. 이 엄숙한 분위기에서 내가 무슨 짓을?


2번 트랙으로 얼른 돌려야 한다. 나도 알고 있다. 그런데 몸이....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누리, 움직여!


알고 있는데... 안 움직인다고! 어떡하지? 몇 초가 일년 같이 느껴지는 순간.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가쁜 숨소리만 귀로 들려온다.

“빰빰 빰빰빰~”


어? 제대로 국민 의례 음악이 들린다.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이건 뭐지?


“정신 차려. 나 선생.”


내 어깨를 툭치는 손길에, 얼음땡 놀이에서 땡,이라고 누가 쳐준 것처럼 드디어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쌤이 나 대신 음악을 틀고 있었다. 국민의례가 끝나고 애국가 제창, 이라는 교무부장의 소리에 맞추어 3번 트랙도 제대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되었음을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등 뒤에서 식은땀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이렇게 중요한 행사에. 몇 번이나 연습하고 어젯밤 꿈에서도 몇 번이나 해보았던 그걸 틀려? 멍청이. 이제 어쩔 거야.


“괜찮아. 정신 차리고 국민체조 노래부터는 잘 틀어. 난 올라간다.”

이쌤은 마치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조회대 위로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애국가의 후렴을 들으며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제가 할까요?”
방송반 아이들 중에 가장 똘똘한 혜진이가 물었다.

“아냐. 선생님이 할게. 사고쳐서 미안. 그리고 걱정해줘서 고마워.”


혜진이가 알겠다고 말하고 뒤로 비켜서고 나는 방송 기계가 놓인 책상 앞에 앉았다. 애국가가 끝나고 나는 이번에는 제대로 음악을 멈췄다. 교무부장이 마이크를 다시 잡고 식순에 의해 진행을 계속하기 시작했고 나는 다음 트랙을 찾아 일시정지를 눌러 놓았다.

이윽고 국민체조 순서가 되어 시작, 소리에 맞춰 음악을 재생시켰다. 그리고는 일어서서 아이들이 국민체조 하는 모습을 보다 조회대 위의 이쌤을 바라보았다. 절도 있는 동작으로 시범을 보이고 있는 이쌤을 보는 순간, 나는 4월부터 계속되어온 나와의 회의의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 믿고 싶지 않은 결론을 자각한 나는 포기 상태로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머릿 속에서 ppt 슬라이드쇼를 시작하듯이 갑자기 나타난 화면이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결론: 나는 이쌤을 좋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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