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하고 싶지 않은 결론에 결국 도달하자 맥이 풀렸지만, 운동회는 끝까지 치러내야 하는 과제였다. 아이들을 미리 짜둔 조별로 세워 개인달리기를 시작선에 데려다주고 얼른 결승선으로 돌아와 손목에 도장을 찍어주는 일을 시작했다. 우리 반 아이들이 달려오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학부모들 사이에 끼어 응원을 했다.
“2반 파이팅! 끝까지 달려! 그렇지!”
일등으로 들어온 동환이의 팔에 ‘1등’ 도장을 선명하게 찍어주었다. 동환이의 씩 웃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또 다음 조가 달리기를 시작했다.
“잘했어. 거기 깃발 뒤로 앉아.”
동환이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어 주고 나서 또 다음 일등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운동회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마지막 순서는 아이들 계주와 학부모 계주였다. 어릴 적 운동회에서처럼 계주가 하이라이트 종목이었다. 우리 반 계주 대표 선수들을 독려해주며 시작선으로 보냈다. 저학년 계주가 끝나고 이윽고 고학년 계주가 시작되었다. 4학년, 5학년이 끝나고 드디어 6학년 계주 순서가 되었다. 1반까지 청군이 앞서고 있는 것을 우리 반 계주 혜민이가 역전시켜 백군이 먼저 달리게 되었다.
“와아~!”
“대박!”
나도 학부모들과 아이들 틈에 서서 트랙 근처에서 경기를 관전하고 있었다. 손에 땀을 쥐는 경기였다. 3반 차례에서 다시 청군이 역전에 성공했다.
“거기. 나 선생! 트랙선 지켜! 다들 뒤로 물러서세요!”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들려온 이쌤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학부모와 아이들을 몇 발자국 뒤로 보냈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여전히 환호성을 지르며 경기를 보고 있다. 그러나 나의 시선은 다시 계주 경기로 향하지 못했다. 호루라기를 불며 이곳 저곳의 트랙선 근처를 돌아다니는 이쌤을 나도 모르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 선생!, 하는 말투라니. 좀 더 친절하게 말해줄 수는 없나? 또 괜히 심술이 차오른다. 그때 탕, 소리와 함께 청군이 승리했다는 멘트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각 반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학급 응원석 위치에 맞게 앉혀주시기 바랍니다.”
장내를 정리하라는 교무부장의 멘트에 선생님들이 일사분란하게 학생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학부모 계주가 진행됩니다. 또 학교 선생님들의 계주가 마지막으로 진행됩니다. 지금부터 호명하는 선생님들은 조회대 앞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김지향 선생님, 임진희 선생님, 나누리 선생님...”
엥?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달리기도 못하는데 교사 대표 계주라니! 심지어 이건 미리 의논되지 않은 상황이다!
“와~ 선생님! 기대할게요~”
“선생님, 파이팅!”
우리 반 아이들이 기를 불어넣어주며 나의 등을 떠밀기 시작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조회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학창시절 이후 달리기를 해본 적이 있던가? 심지어 초등학교 때도 계주 대표로 뽑혀본 적도 없는 나인데... 아이들한테 실망감을 주면 어쩌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쌤이 다가와 학부모와 교사를 청군, 백군으로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건네받은 청군 조끼를 입고 출발선으로 향했다. 이윽고 게임이 시작되고 학부모들의 열정적인 계주 경기가 시작되었다.
달리고 싶지 않은 나의 마음과 달리 바톤이 나에게로 넘어온다. 바로 앞 주자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이 슬로우비디오로 보이기 시작했다. 달리지도 않았는데 숨이 가쁘게 쉬어진다. 드디어 나의 순서다! 바톤을 받음과 동시에 나는 달려 나가려고 발을 뻗었다. 그러나 나의 눈에 운동장 바닥이 들어왔다. 말도 안돼! 시작과 동시에 맨땅에 슬라이딩하듯이 넘어져 버린 것이다.
“와아~”
등 뒤로 들려온 그 소리가 응원 소리인지, 야유 소리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순간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처절함은 아까 국민의례 음악을 국민체조 음악으로 잘못 틀었을 때보다 심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창피했지만 여기서 도망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몇 초가 몇 년 같이 흘러갔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땅을 짚고 일어서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내 상대편은 저 만큼 앞서가고 있었다. 얼굴살이 출렁이게 달렸지만 그 격차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결국 백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왜 하필 내가 마지막 주자였을까.
“백군의 승리!”
백군 바톤을 든채 결승점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이쌤이 나타나 백군 바톤을 가져갔다.
“오늘의 포토제닉이었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이쌤이 씩, 웃었다. 이쌤을 좋아한다는 마음을 자각한 마당에 그의 웃음이 다 멋있게 느껴졌겠지만, 지금은 전혀 그런 마음이 아니었다. 어떻게 저렇게 놀릴 수 있을까.
“학생들 모두 일어 서! 이제 다시 운동장 앞으로 걸어나오겠습니다.”
웃으며 사라지는 이쌤의 뒷통수를 한 대 때리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나는 우리반 응원석으로 달려가 아이들을 정렬 시키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줄을 서면서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선생님 덕분에 백군이 이겼어요!”
“쌤~ 거기서 넘어지면 어떡해요. 쪽팔려.”
“쪽팔리긴 뭐가 쪽팔려. 그럴 수도 있지. 자, 얘들아 줄 서자!”
다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렇지만 최대한 감정을 숨기고 아이들을 줄 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무부장의 구령에 맞춰 앞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걸어나가는 동안 얼른 운동회가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만 간절하게 들었다.
운동회가 끝나고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모두 하교했다. 학부모와 학생이 모두 집에 돌아간 운동장은 이제 교사들이 치울 일만 잔뜩 남아 있었다. 아까까지 운동회의 분위기를 자아내던 만국기와 응원하던 아이들이 앉아있던 천막도 이젠 청소거리로만 보이기 시작한다. 목장갑을 나눠 낀 선생님들이 일사분란하게 자신의 위치에서 철거를 시작했다. 나는 방송장비를 분해해서 방송실에 가져다 두는 일을 하러 천막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서둘러 일을 시작했다.
방송실과 운동장을 왔다갔다 하는 동안 운동장이 깨끗하게 변했다. 나도 선생님들 속도에 맞추어 마지막 장비를 옮기러 다시 학교 건물 안으로 향했다.
“수고 많았어. 누리쌤~”
무거운 물건을 잔뜩 든 수진쌤이 말하며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부장님도 나에게 수고했다고 인사를 해 주었다.
“참. 부장님 아이들도 오늘 운동회 아니에요? 못 가보셔서 어떡해요.”
계단을 오르며 수진쌤이 하는 말에 부장님에게 시선이 갔다. 부장님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박스를 치켜 올려 품 안에 안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뭐. 학교 운동회는 왜 다 비슷한 날에 하는 지.”
“교사 엄마가 좋은 것도 많지만 안 좋은 점도 있긴 하네요.”
수진쌤이 으쓱하며 말을 마쳤고, 부장님도 별다른 이야기를 덧붙이지 않았다.
“그나저나 진짜 나쌤 오늘 큰 일 하나 잘 끝냈다. 수고 많았어.”
수진쌤의 과분한 칭찬에 몸둘 바를 모르는 것은 물론 시선을 둘 곳도 찾지 못했다.
“사고만 많이 쳤는데요 뭘.”
“방송까지 하느라 고생 많았어. 이거 두고 만나자고. 완전 다리 퉁퉁 부어서 어디라도 좀 앉고 싶다.”
“그래. 이따가 보자.”
“네. 이따 봬요.”
나는 교무실로 가는 수진쌤, 부장님과 헤어져 방송실로 향했다.
방송장비를 두고 방송실의 문단속을 하고 내려오는 길에 무릎이 당기고 쓰라리는 느낌이 들었다. 언제부터 아팠던 거지? 나는 1층 화장실로 내려와 무릎의 상태를 확인했다. 트레이닝 복을 들어올려보니 입에서 헉, 소리가 날 만큼 무릎이 까져 있었다.
“이거 당분간 치마도 못 입겠잖아?”
일단 휴지에 물을 묻혀 피가 난 상처 부위를 닦았다.
“아... 완전 아프다.”
절로 신음소리가 났다. 안되겠다 싶어 보건실로 가기로 했다. 가서 소독이라도 받아야 할 것 같다.
노크를 하고 보건실 문을 열었는데 점심을 드시러 가셨는지 보건 선생님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어쩌지? 빨리 소독해야 될 것 같은데... 근처에 소독약이 있나 싶어 한 걸음 앞을 향하는 순간 문이 덜컥 열렸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곳에는 비상약품을 잔뜩 들고 들어온 이쌤이 서 있었다.
“나누리? 여기 왜 있어?”
나에게 질문을 던지던 이쌤의 시선이 걷어 놓은 내 무릎에 꽂혔다.
“생각보다 많이 까졌네. 얼른 여기 앉아.”
“네?”
“얼른 앉으라고. 소독 빨리 해야할 것 아냐. 보건선생님 지금 식사중이라 늦게 오실거야. 아, 얼른 앉지? 나도 바쁜데.”
나는 이쌤의 재촉에 얼떨결에 의자에 앉았고, 이쌤은 능숙하게 소독솜을 핀셋으로 잡아 내 무릎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앗.... 아.... 아파요.”
“조금만 참아 봐. 체육 지도를 하~도해서 이 정도는 보건선생님보다 잘하니까. 이건 보건선생님도 인정한 거야. 나중에 물어 봐.”
소독을 마친 이쌤은 연고를 면봉에 짜내어 상처에 바르기 시작했다. 아까의 얼얼함이 금세 사라지고 왠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마음을 움직이는지 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뒤통수를 때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었는데 말도 안 되게 마음이 금세 변했다. 미쳤나보다.
“일단 거즈로 대 놓을게.”
찌익, 하는 소리와 함께 반창고가 뜯어지고 어느새 내 무릎에 흰색 거즈가 깔끔하게 붙었다. 이쌤은 이런 것도 잘하는 구나. 알고볼수록 의외의 모습이 많은 사람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뭘 그렇게 빤히 봐?”
“네? 아, 아니에요.”
순간 이쌤과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떨어질 뻔 했다.
“이제 나가자. 점심 먹으러 가야지. 연구실에서 다들 만나기로 했어.”
이쌤은 어느새 주변 정리를 마치고 보건실 문을 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나도 이쌤을 따라 일어서며 걷어 올린 트레이닝 복을 바지 끝을 내렸다.
“근데 너... 진짜, 여러 가지로 신경 쓰이게 한다... 얼른 나와.”
이쌤이 잠시 뒤를 돌아보며 한마디하고는 먼저 보건실을 나갔다. 네, 하면서 나도 뒤따라 나가기 시작했다.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계속 뛰고 있다.
여러 가지로. 신경이 쓰인다...
여러 가지로 신경 쓰인다라니.
좋은 의미일까?
나의 마음을 제대로 알게 된 이후 한참 잊고 살았던 나의 안 좋은 버릇이 도지고 있었다. 감정을 알게 되면 그 뒤로 휘몰아치게 되는 나의 안 좋은 버릇. 학교에서 순간 순간 마주칠때마다 반대쪽으로 도망치기. 그러면서 복도 사각지대에서 훔쳐보기. 동학년 회의시간에 눈 마주치면 얼굴 빨걔지기.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화려한 플레이를 선보이는 내 마음 덕에 나는 학교생활이 매우 불편해지고 있었다. 심지어 아까 임시 전체회의 시간에 이쌤이 운동회 평가를 하러 일어서서 발언하고 있는 동안에는 가슴이 쿵쾅거려 내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만하면 병이다, 병. 앞으로도 계속 마주쳐야 하는데 어쩔 거니, 나누리. 회의가 끝난 뒤 교무수첩을 들고 나오는 선생님들의 무리 속으로 들어가며 자책을 시작했다.
“누리쌤 같이 가!”
뒤에서 수진쌤이 나를 쫓아오며 말했다.
“그러게. 같은 층인데 너무 하네.”
이쌤이 내 곁에 있다는 것을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방망이질치기 시작하는 심장 덕에 알 수 있었다. 나는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걸음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운동회 끝나고 한 숨 돌리나 했더니 이제 공개수업 시즌이구나~ 그래도 일단 어린이날까지 있어서 긴~ 연휴라 좋다. 연휴라도 지도안이나 짜야겠지만.”
기지개를 쭉 켜며 수진쌤이 말했다.
“난 이미 완료해서 제출했지롱.”
장난기 가득 어린 목소리로 이쌤이 수진쌤을 놀린다.
“제대로 즐 연휴 보내실 수 있겠네요. 너는 무슨 과목한다고 했지?”
“나는 수학. 너는?”
“사회.”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이쌤이 수학 수업을 공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수학이라면 치를 떨 정도로 싫어했는데... 이 사람은 수학도 잘하는 걸까? 괜히 미소가 지어졌다. 나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니?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본다. 이쯤 되면 진짜 정신이 나간게 분명하다. 시급한 치료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나누리는?”
“네?”
갑자기 내 이름이 불려 화들짝 놀란 나는 걸음을 멈추고 이쌤을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놀라?”
“그러게. 수상하네. 도둑질하다 걸린 도둑 마냥.”
이쌤의 말에 수진쌤이 더 장난을 쳤다.
“아니에요. 놀라긴요. 저는 국어요.”
“국어 하는 구나. 나는 국어 수업은 그냥 어렵던데.”
말을 마친 수진쌤이 다시 걸음을 걷기 시작하고, 나와 이쌤도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내일만 나오면 어린이날이랑 임시공휴일까지 해서 목, 금, 토, 일... 4일 연휴네! 그런데 다들 어린이날 선물 할 거야?”
수진쌤이 우리를 보며 물었다.
“어린이날 선물을 뭘 따로 해? 그냥 내일 파티나 한 시간 할까.”
이쌤의 말에 나도 생각에 잠겼다. 어린이날... 그래... 우리 반 아이들도 아직 어린이날 선물을 기대하는 어린이구나. 갑자기 덩치 큰 남자아이들의 모습이 어린이라는 말과 오버랩되며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래도 어린이는 어린이지. 덩치는 산만해도.
“누리쌤은?”
수진쌤의 말에 정신이 돌아왔다.
“아, 저는... 생각은 안 해봤는데... 갑자기 카드나 하나씩 써 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카드? 그게 더 대박이다~”
수진쌤이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스물 다섯명한테 카드 쓰는 게 보통일이 아냐. 그래... 신규라 열정이 넘칠 때지! 파이팅.”
수진쌤이 내 어깨를 두드려주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래. 신규의 그 열정으로 지도안도 잘 짜길 바란다.”
수진쌤을 따라하듯 이쌤도 내 어깨를 툭, 건드리고는 수진쌤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오수진! 같이 가. 물어볼 거 있어.”
나는 멀어져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 어린이날 카드를 떠올리다가 지도안으로 생각의 주제를 바꾸기 시작했다.
그래. 일단 지금은 학부모 참관 공개 수업을 위한 양질의 지도안을 짜는 것이 1번이지.
정말 마음도 일도 정신없이 몰아치는 5월이구나.
퇴근하는 길, 카드를 사기위해 근처 팬시점에 들렀다.
“여기 카드 어딨나요?”
“카드요?”
머리가 벗겨진 중년의 가게 주인 아저씨는 요즘도 카드를 찾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듯 말꼬리를 길게 빼며 나를 바라보았다. 바라보기 보다는 관찰하고 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네.”
“저~ 쪽 끝에 있어요.”
아저씨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으로 가서 카드를 고르기 시작했다. 나 어릴 적은 편지나 카드 쓰는 것이 일상화 되어 있어 예쁜 카드나 엽서, 편지지 들이 정말 많았는데 요즘은 시대가 변해서 그런지 종류 자체가 얼마 없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꽂혀있는 진열대도 가게의 메인이 아니라 변두리 끝에 자리잡고 있고. 아이들은 스마트 폰에 익숙해져 있어서 굳이 카드를 쓸 이유가 없겠지. 어른들도 마찬가지 일테고... 괜히 씁쓸한 생각이 들었지만, 나라도 손글씨를 쓰는 편지를 자주 쓰자는 다짐을 하며 카드를 골라 나갔다. 너무 큰 것은 스물 다섯장을 쓰기 버거울 것 같아 적당히 작은 사이즈로 고른다.
“스물... 스물 하나... 스물 둘...”
숫자를 하나씩 세어가며 스물 다섯 개의 카드를 다 고를 무렵, 나도 모르게 하나를 더 집어 들었다. 이쌤이 생각난 건 왜 일까.
“미쳤어... 미쳤어... 나누리...”
오른손에 잡은 카드를 다시 진열대로 되돌려 놓으려 하다가 마지막에 꽂지 못하고 멈추고 말았다.
“그래. 동학년 선생님들한테도 하나씩 쓰면 되지. 이건 부장님 것... 이건 수진쌤 것... 그리고 이건...”
차마 입 밖으로 이쌤, 이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애꿎은 카드만 만지작거린다. 생각을 거듭한 끝에 나는 결국 스물 여덟 개의 카드를 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이것... 스물 여덟 개. 계산해 주세요.”
내가 스물 여덟 개라고 말했지만 아저씨는 일일이 카드를 세기 시작했다. 나를 못 믿는 건가?, 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이것도 아저씨의 일이니 충실하게 하시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가 스물 여덟 개를 다 세고 비닐 봉투에 카드를 담으며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직도 카드 사시는 분이 다 있네요.”
“아, 반 아이들 어린이날 선물로 주려고요.”
“선생님이세요?”
그렇게 말하며 아저씨가 나를 위 아래로 훑어본다. 오늘 내가 뭘 입고 왔지? 나도 아저씨의 눈길을 따라 내 옷차림을 쳐다보았다. 다행히 선생님답게 입고 왔구나, 라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오늘은 운동회 시즌의 트레이닝복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정장 바지를 입고왔었다. 나는 서둘러 아저씨에게 값을 지불하고 문구점을 빠져 나왔다. 이런 곳에 올 때도 신경이 쓰이는 구나. 앞으로는 어디서든지 선생님인 것을 웬만해서는 밝히지 않으리라,는 각오를 다졌다.
집에 와서 서둘러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컵라면에 물을 부었다. 오늘의 저녁이었다. 냉장고에서 작은 통에 담겨 있는 김치를 꺼내와 컵라면과 같이 책상으로 가져왔다. 컵라면이 익는 동안에 카드를 쓰기 시작했다. 헷갈릴까봐 옆에는 아동명부도 펴 놓았다. 1번부터 25번까지 순서대로 카드를 쓰기 위함이었다.
“일번. 김동현.”
펜을 들어 카드의 상단에 동현이에게, 라고 적어 넣는다. 아, 글씨가 맘에 안들어. 하지만 딱 맞게 카드를 사서 다시 쓸 수는 없다. 앞으로 잘 쓰자. 평소에 동현이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머릿 속에 떠올려 보며 다시 펜을 움직였다.
‘동현아, 평소 자습시간에 책을 열심히 읽는 동현이를 볼때면...’
진부하다. 그렇지만 동현이하면 떠오르는 것이 책을 열심히 읽는 건데?
‘선생님은 동현이가...’
크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아냐... 멋지게 느껴져, 라고 할까. 어휘력이 왜 이렇게 딸리지? 쉽사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펜을 잠시 내려 놓았다. 아, 이래서 수진쌤과 이쌤이 나를 그런 눈으로 쳐다본 거구나. 편지 쓰는 게 이리도 힘들 줄이야. 예전에 친구들한테 많이 썼던 것을 떠올리며 너무 쉽게 시작을 한 것 같다. 그렇지만 또 이만큼 나의 진심을 담아 줄 수 있는 것이 또 무엇이 있을까. 그래... 잘 했어. 나누리. 앞으로 스물 네 개만 더 생각을 잘 짜내서 써 보자. 나는 다시 펜을 움직인다.
라면이 불고 있는 줄도 모르고 아홉 번째 아이의 카드를 완성했다. 갑자기 라면 생각이 들어 뚜껑을 열었더니 이미 팅팅 불어 있는 면발이 눈에 들어왔다.
“악... 라면의 생명은 쫄깃함인데... 힝...”
하지만 자취생이 아까운 라면을 하나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묵묵히 라면을 한 젓가락 물었다. 그래도 맛은 좋네. 배가 고팠던 탓에 서둘러 씹기 시작했다. 김치를 하나 먹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6시가 넘었다. 이러다가는 정말 오늘 잘 때까지 카드만 붙잡고 있어야 할 것 같다. 갑자기 지도안 생각이 든다. 지도안도 오늘 시작했어야 하는데... 그래도 나의 첫 번째 어린이들에게 어린이날 선물을 꼭 정성을 담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래. 지도안은 연휴동안 열심히 짜면 되지... 일단 우리 반 애들이 먼저야! 나에게 기운을 불어 넣어주며 다시 펜을 들었다. 이제 열 번째 카드다.
어느덧 스물 두 개의 카드 작성을 간신히 마치고 나서, 나는 침대로 풀썩 쓰러지듯 누웠다. 안 쓰던 글씨를 너무 써서 그런지 손가락부터 팔, 어깨까지 다 아픈 것 같다. 시간을 보니 벌써 7시 30분. 잠깐 왼손으로 오른 팔을 마사지하다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아직 6개는 더 써야 한다. 빨리 쓰자는 생각이 들어 얼른 책상으로 향했다.
“드디어 아이들 것은 완성!”
스물 다섯 번째 카드를 내려놓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동안 움츠렸던 허리를 펴고 기지개를 쭉 켰다.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한 켠에 놓여 있는 컵라면과 김치통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캡슐을 하나 찾아 커피 머신에 넣었다.
“아, 컵... 컵.”
서둘러 컵 하나를 머신 아래에 놓았다. 버튼을 누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 끝에 향기로운 커피향이 닿기 시작했다. 이제야 굳어있던 어깨가 조금 풀리는 느낌이 든다. 숙제같은 아이들 선물은 모두 끝냈고, 이제는 동학년 선생님들 것 세 개만 적으면 된다. 작동이 멈춘 커피머신을 끄고, 커피잔을 손에 든 채 책상으로 걸어왔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쌉쌀하고 고소하고 따뜻한 것이 입안을, 목을, 몸 전체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아~ 좋다.”
그래. 이렇게 여러 명에게 카드를 쓸 수 있는 것도 행복한 일이지. 사랑하는 아이들이 있는 것도 행복하고, 즐겁게 학교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동학년 선생님들도 좋으시고. 그 부분에서 이쌤의 웃는 얼굴이 떠오른다.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렇게 되면 순수한 카드에서 의도가 있는 카드의 느낌이 되잖아.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순수한 마음으로 카드를 쓰고 있는 거야. 암. 암. 그렇고 말고. 이제 감사한 동학년 선생님들한테 카드를 써 볼까?
다음날, 마지막 교시에 알림장을 다 쓰고나서, 아이들에게 선물이 있다는 말을 조심스레 꺼내 보았다.
“우와~ 쌤. 저는 아이패드요!”
“쌤 저는 신상폰!”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이것이 정녕 어린이날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이들이 맞단 말인가!
“너희들이 원하는 선물은 집에서 받기로 하고~ 쌤은 여러분을 위해 어제 정성들여서 카드를 썼어!”
짜잔, 이란 자체 음향효과를 덧붙이며 책상 아래 미리 준비해두었던 카드 뭉치를 꺼냈다. 고개를 들면 우와, 하는 아이들의 감탄소리와 함께 기대하는 눈빛이 있을 거라는 혼자만의 착각은 금세 깨지고 말았다. 다들 실망한 눈빛으로 에게, 하는 감탄사를 쏟아내고 있었다. 우우, 라고 야유를 직접 보내는 아이들도 있었다. 선생님이 자신을 위해서 정성들여 손글씨로 써준 편지를 받으며 감동하는 아이들은 내가 본 TV 청소년 드라마 속 한 장면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것도 오래된 드라마. 마음 속 로망이 산산조각 났다.
“얘들아... 선생님이 어제 퇴근하고 자기전까지 썼어.”
어느새 내 목소리는 좋아해줘, 라는 간절한 바람을 담은 애원하는 톤으로 바뀌고 있었다.
“네, 뭐... 정성은 있으니까.”
멀찍이 앉은 혜민이가 한 마디를 꺼내자, 이곳 저곳에서 여자 아이들이 호응을 해주었다. 이 정도 반응이라도 감사합니다... 나는 책가방을 매고 기다리는 아이들을 한 명씩 불러 카드를 전해주고 연휴 잘 지내다 오라는 인사를 건네며 하교를 시키기 시작했다. 그래도 카드를 직접 받은 아이들은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하기도 했고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특히 동환이가 수줍게 씨익, 웃고 간 장면에서는 혼자 감동스러워 소름이 돋기도 했다. 여자 아이들은 확실히 살갑게 감사의 인사를 해주었다. 결국 마지막 번호의 승희까지 주고 하교를 시키고 나니 텅 빈 교실에 혼자 덜렁 남게 되었다. 그래도 나의 마음은 잘 전달 되었을 거라는 굳은 마음을 가지자 나름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리에 앉아 한숨을 돌린 나는 수업 중에 보지 않았던 학교 메신저의 메시지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오늘 낼 것들은 수업 시작 전에 미리 파일들을 전송해서 당장 처리할 것은 없어 보였다. 연휴를 앞두고 당장의 업무도 일단락되자 마음이 또 여기 저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교 후 운동장에서 즐겁게 소리를 지르며 공을 차고 있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파란 하늘까지 눈에 들어오자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때 때마침 딩동, 소리를 내며 메시지가 하나 더 전송되었다.
‘학부모 공개수업 지도안은 월요일까지...’
아 맞다! 지도안... 아이들 선물로 줄 카드를 쓴다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여행은 무슨 여행... 연휴에 지도안이나 짜야지...
잔뜩 실망하고 있는데 책상 위에 놓인 전화가 울리기 시작한다.
“네, 6학년 2반 나누리...”
“누리쌤. 나 오수진인데 지금 어린이날 표창 6학년 수상자 선정해야 되니까 잠시 연구실로 모여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나는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섰다. 빠르게 교실을 나가다 말고 다시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 맞다... 카드, 카드.”
어제 동학년 선생님들한테 주기 위해 쓴 카드 세 장을 가방을 열어 꺼냈다. 그리고는 혼자 하나씩 열어보며 전해줄 사람을 확인했다.
“이건 수진쌤꺼. 이건 부장님꺼. 이건... 이... 정석쌤꺼.”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심장이 두근 거렸다. 정신차리고 빨리 연구실에나 가자, 라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교실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어, 나선생. 여기 얼른 앉아봐.”
연구실 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부장님의 말에 나는 서둘러 카드를 등 뒤에 숨기고 선생님들이 이미 앉아 있는 소파로 얼른 걸어가 앉았다.
“지금 전교 어린이 회장이랑...”
부장님의 주도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어린이날 표창을 받을 6학년 대표 아이들을 선정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대대로 전교 어린이 회장과 부회장이 받아왔기 때문에 선정 자체가 힘들지 않게 회의가 금세 끝났다. 부장님이 회의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그럼 교무부장님한테 전달하러...”
“아, 부장님! 잠시만요.”
서둘러 연구실을 나가려는 부장님을 막아 세우며 내가 일어섰다. 부장님은 왜 그러냐는 말과 함께 잠시 걸음을 멈추었고, 나는 등 뒤에 가지고 있던 카드를 살며시 전해주었다.
“카드?”
“어린이날 맞이해서 아이들한테 쓰다가 동학년 선생님들 생각이 나서요. 감사해서...”
뭐라고 말을 마쳐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아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우와... 고마워. 오랜만에 손글씨 카드를 다 받아보네?”
부장님이 활짝 웃으며 말을 마쳤다. 그리고는 곧 연구실을 나갔다. 나는 앉아 있는 수진쌤과 이쌤한테도 카드를 하나씩 건네주었다.
“우와, 대박.”
“진짜 손글씨네?”
수진쌤과 이쌤도 카드를 펼쳐보며 한 마디씩 감탄을 해주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아까 아이들의 반응에서와는 또 다른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다 읽었어? 바꿔 읽자.”
그런데 갑자기 이쌤이 수진쌤쪽을 힐끗보며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카드에 내 마음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 안 돼요!”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 버렸다. 두 사람은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돌려 읽으시는 건...”
이번에도 두서 없는 말이 입을 빠져나와 끝을 제대로 맺지 못하고 말았다. 다행이 수진쌤이 내 편을 들어주었다.
“그래, 이정석. 넌 무슨 초딩이냐? 편지를 바꿔 읽게. 됐어. 언뜻봐도 내 카드가 훨씬 길게 써 있네. 자 볼래? 3초만 보여준다. 하나, 둘, 셋.”
셋과 함께 잠시 펼쳤던 카드를 확 덮고는 수진쌤이 나에게 다가왔다.
“누리쌤 고마워. 이 원수는 담에 술 한잔으로 갚을게. 감동이다~”
수진쌤이 싱긋 웃으며 연구실을 나섰다. 이로써 남아 있는 사람은 나와 이쌤뿐? 갑자기 어색한 기운이 연구실에 가득 퍼지기 시작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그냥 나갈까? 내가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이에 어느새 이쌤이 옆에 다가왔다. 기습적으로 다가오자 갑자기 숨이 확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오수진꺼는 엄청 길게 썼다 이거지?”
이쌤이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말을 걸었다. 아, 어떡해...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나는 도저히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심장이 방망이질하기 시작해서 제대로 숨을 쉴 수도 없었다.
“뭐야, 찔리긴 하는가 보지? 눈도 못 마주치고.”
이쌤이 내 시선에 맞게 얼굴을 움직이며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아, 이 사람 왜 이래. 오늘따라... 더 이상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눈을 마주쳐 버렸다. 헉, 하고 숨이 확 막혔다.
“암튼. 고마워. 손 글씨로 적힌 카드 오랜만에 받아보네.”
눈이 마주치자마자 자기 할 말을 쑥 꺼내더니 이쌤은 곧 연구실을 나갔다. 가볍게 문이 닫히는 소리에 맞추어 숨이 터져 나왔다.
“헥... 헥... 아 진짜 숨 막혀 죽을 뻔 했네...”
아무도 없는 공간에 남자 혼잣말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그래도 이제 숨을 제대로 쉴 수 있게 되어 다행이었다. 나는 소파에 앉았다.
“그래도... 보람... 있네.”
괜히 웃음이 나왔다. 이제 조금 있으면 퇴근이고, 그러면 연휴 시작이다. 그 연휴가 온통 지도안으로 가득 찰 테지만 일단 지금의 기분을 잠시 만끽하고 싶다. 아이들의 웃는 얼굴, 싫어하는 척 하지만 나름 좋아하는 표정, 수줍게 씩 지어주는 웃음들... 우리 아이들의 어린이날은 온통 행복으로 가득하기를. 쌤은 연휴에도 일을 해야 하지만 너희들은 즐겁고 기쁜 일로 가득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