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시간부터 친하지도 않은 남자와 단둘이 술잔을 기울인 적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여기서 이른 시간이란 퇴근 직후니 다섯 시 무렵. 아직 술집도 오픈하지 않을 시간이라 늘 그렇듯 행선지는 고깃집이겠지 하는 생각으로 걷고 있는데 이쌤이 입을 열었다.
“매번 고깃집은 그렇고... 패밀리 레스토랑 어때? 가서 맥주나 한잔 하자.”
“네? 네. 조... 좋아요.”
“그럼 우리 집 주차장 까지 걸어가서 내 차 타고 나가자.”
그래서 지금 나는 이쌤의 집 앞 주차장에 와 있다. 생각지도 않게 이쌤 차를 타보다니. 그것도 모자라 이쌤 집이 어딘지도 알게 되었다. 학교에서 출발하면 비슷한 거리지만 나와 반대편에 위치한 은성아파트. 은성아파트 101동에 이쌤이 산다는 것도, 이쌤차는 흰색 SUV라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누가 우릴 보지나 않을까하고 마음 졸이며 걸어 왔는데, 그만큼의 소득을 얻었다.
“안 타고 뭐해?”
이쌤의 재촉에 서둘러 생각을 접어두고 자동차의 문을 열었다.
“내가 니 기사냐? 옆에 타.”
“아. 네!”
나도 모르게 택시 타던 버릇이 나왔나 보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나는 뒷문을 다시 닫고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히 옆자리에 올라탔다. 이쌤의 차는 서서히 그렇지만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곧 아파트를 빠져 나와 큰 도로에 올랐다. 어색한 적막이 신경쓰이던 차에 이쌤이 라디오를 켰다. 그런데 나온다는 노래가 하필.
“I love you for sentimental reasons~”
무드를 완벽하게 잡아주는 노래에 나는 괜히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괜히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하는 척을 하고 있는데 이쌤도 그렇게 느꼈는지 라디오 대신 블루투스를 켰다. 이 사람은 평소에 무슨 노래를 들을까.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잔뜩 기대를 하며 귀를 쫑긋 세웠다.
“쉽게 익히는 10분 영어!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영어를 책임지는 John 인사드립니다~”
엥? 이것은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영어 강의?
“전 학교에서 영어 전담할 때부터 버릇이 돼서. 언제 또 영어 전담을 하게 될 지도 모르고... 또 영어는 안 쓰면 자꾸 잊어버리니까. 너도 가는 동안 공부 좀 해. 십분이면 도착할거야.”
“아... 네.”
“그 떨떠름한 대답은 뭐야? 내가 공부하는게 의외야? 하하하. 나 대학원 전공도 영어교육이야. 왜 이래.”
“아... 네.”
같은 대답만 반복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진짜 의외네. 학교에서 체육복만 입고 다녀서 교대때도 체육 심화를 했으려나 했더니. 대학원에서 영어 전공을 하고 있다는 것도 의외였지만, 이렇게 늘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도 의외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틀에 박혀 있다는 수진쌤의 말이 맞는 것 같다. 학교에서 늘 일을 빨리 처리하는 것도, 이렇게 늘 공부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도 다 교사의 틀 안에 딱 맞는 모습이었다. 뭐 하나 빠지시는 게 없네요. 정말. 빈틈이 없네, 빈틈이 없어. 이런 모습들이 이쌤에게 더 반하게 만드는 모습이기도 하지만 수진쌤 말대로 재미없는 모습이기도 하다. 내가 들어갈 자리는 있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운전하는 이쌤의 옆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이쌤은 스피커에서 나오는 영어 문구를 나직하게 읊조리면서 핸들을 돌리고 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패밀리 레스토랑 주차장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레스토랑에 들어가 서버로부터 안내받은 테이블에 앉자 이쌤이 메뉴판을 나에게 내밀며 말했다.
“뭐 먹을래? 골라. 나는 속이 별로 안 좋아서 샐러드랑 맥주 하나면 돼.”
워낙 좋아하는 스테이크 메뉴를 살펴보고 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 메뉴판의 앞 장으로 되돌아갔다. 간단하게 드신다니 나만 거하게 먹을 수는 없었다.
“저는 파스타 먹을래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이쌤이 직원을 불렀고, 주문할 메뉴를 불러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전빵과 물 두잔, 맥주 두잔이 우리 앞에 놓여졌다.
“패밀리 레스토랑 와 보는 거 진짜 오랜만이다. 이런 분위기...”
이쌤이 기지개를 쭉 켜더니 맥주잔을 오른손으로 잡고 한 모금 마시기 시작했다. 아까의 우울함은 어디 갔을까? 데이트하는 것처럼 기분이 들뜨고 있다.
“네, 저도.”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 만들어. 이 날씨 좋은 오월에 이런데도 못 오고... 그것도 꽃다운 나이에 말야.”
말을 마친 이쌤이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네, 하고 감흥 없이 대답한 나도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얼음같이 차가운 맥주가 목을 타고 찌르르하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금세 정신이 드는 느낌이 들어 한 모금 더 넘겼다. 맥주잔을 내려놓고 시선을 바꾸자 이쌤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놀라 갑자기 사레가 든 나는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괜찮아?”
열댓번쯤 콜록 거리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간신히 진정되었다. 내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겠지. 안 봐도 비디오다.
“너도 참 진짜 스펙터클하다. 울고 토하고 사레들리고 다치고... 삼, 사, 오 세달 봤을 뿐인데 엄청 많은 모습을 보여준다. 진짜 재밌다. 재밌어.”
이쌤은 ‘삼, 사, 오’ 부분에서 손으로 숫자를 꼽아가며 말을 마치고는 웃기 시작했다. 웃음을 멈추며 앞머리를 무심히 쓸어 올렸다. 아, 내가 정말 미쳤나보다. 저런 별 거 아닌 모습에도 가슴이 뛰다니. 오늘도 트레이닝 복 차림인데도 그저 멋있게 느껴진다. 예전같으면 체육복이라니 별로야, 했을 텐데 디자인도 색깔도 멋있어, 하게 된다. 그것도 모자라 키가 크니까 더 멋있어, 라고 덧붙이게 된다. 내가 정말 이 사람을 좋아하고 있구나. 아까까지만 해도 울고 있었는데, 금세 그 상황을 잊어버리고 있다. 그저 이 사람과 단둘이, 이런 장소에 와 있다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설레고 달콤하다.
“기분 나쁘게 듣지 마. 재밌다고. 틀에 박혀 있는 나한테는 신선하게 느껴진달까. 뭐, 그런 거야.”
전혀 기분 나쁘게 듣고 있지 않았는데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 대신 그저 네, 라고 대답했다. 아직은 좋아하는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오히려 나를 ‘신선하게’ 보고 있다는 말이 마음속에 콱, 하고 기분 좋게 박혔다.
“주문하신 파스타와 샐러드 나왔습니다.”
그때 마침 서버가 테이블에 음식을 내려놓았다. 그릇이 나무 테이블에 놓여지는 소리에 정신이 제 자리로 돌아왔다. 까딱하면 헤벌쭉 웃을뻔 했다. 정신차려, 나누리. 아직 들키면 안 돼.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아까 뭐라고 그랬지?”
이쌤이 샐러드를 포크로 푹 찍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쌤에게 그간의 일을 설명해주었다.
“안티채팅? 이것들이 정말... 어디 학생이 선생을... 캡쳐했다는 것 좀 봐봐.”
내가 휴대폰을 건네자 이쌤은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천천히 보기 시작했다.
“이거 안되겠네. 장난이라고 하기엔 너무 심한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일단 내일 여기 가담한 아이들이랑 상담해보고... 이건 근데 내용이 심각해서 부모님들도 알아야 할 것 같다.”
“네...”
“한숨 쉬지 말고.”
내가 한숨을 쉬고 있던가? 이쌤의 말에 서둘러 입을 닫았다. 요즘 한숨 쉬는 게 버릇이 되어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먹어.”
네, 라고 말하고는 포크로 파스타를 감기 시작했다. 데이트 같아서 마냥 즐거웠는데, 문제를 이야기 하다보니 금세 씁쓸한 기분이 되었다. 이곳이 데이트 장소에서 갑자기 상담소로 변한 느낌. 지금의 상담사인 이쌤이 다시 입을 열어 조언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여자아이들이 너한테 이런 감정을 가지게 되었는지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있어. 단지 기분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말고... 이번 일을 잘 해결해서 담임과 학생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나선생 입장에서는 사랑으로 잘 대했는데 억울하다고 말하겠지만, 아이들이 하나도 아니고 여섯이라면... 자각을 못했겠지만 자신한테도 문제가 있을 수도 있는 거야.”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참으며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간신히 네, 라고 대답했다. 이쌤은 늘 맞는 말만 한다. 그 맞는 말이 가슴 아프게 들려서 그렇지만. 입술을 꾹 다물어 다시 차오르는 눈물을 막아본다. 그렇지만 쉽게 되지 않고 한 방울이 턱으로 단숨이 툭, 흘러 내렸다.
“울어?”
“아, 아니요.”
나는 서둘러 냅킨을 들어 눈물을 훔쳤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파스타를 우걱우걱 입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켁... 켁...”
눈물을 흘린 것도 모자라 사레까지 들어 기침이 나왔다. 입에 있는 파스타가 다 튀어나올 것 같아 간신히 냅킨으로 입을 가렸다. 왜 이렇게 보여주기 싫은 모습만 보여주게 되는 걸까. 이 사람 앞에서는...
“너무 갑자기 집어 넣어서 그렇잖아.”
어느새 의자에서 일어선 이쌤이 내 옆으로 걸어와 등을 두드려 주기 시작했다. 이건 무슨 상황? 갑자기 술을 먹고 토했을 때 내 등을 두드려 주던 이쌤의 모습이 생각이 났다.
“괜, 괜찮아요.”
나는 고개를 돌려 이쌤에게 말했다. 그리고는 자리로 돌아가는 이쌤을 신경쓰며 물을 몇 모금 마시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싫지만은 않았다. 여러 번 나에게 신경을 써주는 이쌤이 처음과 달리 따뜻하게 느껴졌다.
“어려서 그런지 여러 가지로 신경 써 줄 일이 많다... 나 여동생 있거든. 너보단 나이 많지만... 여동생 챙기는 게 이골이 났는데... 요즘 보면 그래서 써 먹을 데가 많다 싶어.”
여동생 같다는 건가?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 같다. 방금까지 설렜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나를 여동생으로 보고 있다는 거구나. 이런 내 마음을 모르는 이쌤은 웃으며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기분 나쁘게 듣지 마.”
맥주를 내려 놓으며 나를 쳐다보는 이쌤. 여동생 같다는 말을 취소하려는 건가?
“네?”
“아까 말 기분 나쁘게 듣지 말라고. 선배 교사로서 조언해준거니까... 안티 채팅까지는 아니지만 저경력때 나도 다 겪었던 일이라서 그래. 내가 너무 직설적인 거 수진이한테 여러 번 들어서 잘 알고 있거든. 특히 너한테 그러지 말라고 수진이가 계속 뭐라고 해.”
여동생... 선배교사... 나선생... 수진이가... 수진이... 이쌤이 계속 기분 안 좋은 말들만 늘어 놓고 있다. 기분 나쁘게 듣지 않을 수가 없잖아. 내 얼굴이 점점 더 굳어지고 있었다.
“저번 회식 때 수진이가 말한 것처럼 내가 틀에 박혀 있고, 좀 직선적이야. 돌려서 말을 잘 못해. 아,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이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왠지 이쌤을 쳐다볼 수가 없어 애꿎은 포크만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
이쌤은 그 말과 동시에 내 머리 위에 손을 툭, 얹더니 금세 몸을 돌려 화장실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시 심장이 쿵 떨어졌다. 이러다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제명에 못 살든지. 나는 맥주잔을 들어 꿀꺽꿀걱 소리를 내며 시원하게 목으로 넘겼다.
다시 돌아온 이쌤과의 저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끝이 났다. 이쌤은 나에게 조언을 해주려는 목적이었을테니 그 목적을 달성한 자리가 길어질 이유는 없었다. 내 앞에 놓여진 파스타는 아직 반이 남아 있었지만 복잡한 기분에 입맛이 생기질 않았다. 나는 이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이정석!”
누군가 이쌤을 반갑게 불러 쳐다보니 거기에는 교무부장과 그의 가족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너무 깜짝 놀라 나는 어디론가 숨고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나... 누리 선생님?”
교무부장이 이미 나를 발견했다. 맥주를 마셔 달아오른 얼굴이 화끈거리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나는 억지로 웃으며 인사를 했다.
“무슨... 사이?”
가족들은 테이블로 걸어가고 홀로 서 있는 교무부장이 손가락으로 우리 둘을 가리키며 수상쩍은 웃음을 지었다.
“혹시... 데이...”
“뭐야, 부장님. 동학년이잖아요.”
교무부장의 입을 막으며 이쌤이 말을 뱉었다.
“조언해줄 게 있어서 선배교사가 저녁 한끼 사준거에요. 뭐가 잘못됐어요? 부장님, 어디가서 쓸데없는 소리 하시면 안 됩니다.”
이쌤의 말에 교무부장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고, 곧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휑한 마음을 붙잡으며 이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때 이쌤의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응... 아. 알았어. 그래. 거기로 갈게.”
계단을 내려가며 이쌤이 통화를 마치고 나를 바라보았다.
“어쩌지?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갈게요. 저녁 사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아... 그리고 조언도...”
나는 고개를 숙였다. 이쌤은 미소를 띈 얼굴로 손을 흔들고는 차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고, 나는 바로 앞 도로에서 택시를 잡았다.
“형신아파트요.”
택시는 곧 움직이기 시작했고, 창을 통해 바라보니 이쌤의 차는 나와 반대편으로 가고 있었다. 이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오늘 대화를 통해 여동생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조언을 해주면서 해준 이야기들로 그 사람에 대해서 조금 더 알게 되었다. 직선적이지만 속은 따뜻한 사람이라는 걸 최근 들어 눈치 채고 있었다. 아까의 손길에 가슴 떨렸던 기억이 나서 슬며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다 나를 애 취급한 거며, 수진쌤의 이야기를 한 거며... 온갖 안 좋은 말이 동시에 생각났다. 수진쌤이랑은 도대체 무슨 사이야? 이쌤이 좋아하기라도 하는 걸까? 의문은 계속 늘어났다. 아직 이렇다 할 친한 사이가 아니니 물어볼 수도 없고 오늘의 대화로 의혹만 더 늘었다. 이쌤이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제대로 밀당을 당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혼자만의 짝사랑은 언제 해도 힘이 드는 구나. 오랜만이라 잊고 있었는데... 그때도 그랬었지. 생각은 어느덧 대학 시절로 향했다. 그런데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학부모였다. 대학생 나누리는 어느새 사라지고 교사 나누리가 되어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민정이 엄마에요. 오늘 이야기를 들어 대충 알게 되었습니다. 일단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고요... 이 채팅방에 가담한 엄마들하고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내일 찾아뵙자고들 하네요. 내일 시간 괜찮으시면 찾아 뵙고 말씀 나누고 싶어서 전화드렸습니다.”
처음 대화를 나누는 민정이 어머니였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말이 아나운서를 연상시키는 목소리와 더불어 귀에 쏙쏙 들어왔다. 어떻게 해야 하나 안 그래도 고민중이었던 참에 찾아온다는 말이 고맙게 까지 느껴졌다.
“네, 내일 괜찮아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선생님. 들어가세요.”
“네. 안녕히 계세요.”
약속을 잡자 전화는 곧 끝이 났다. 내일 학교에 가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눠본 뒤에 그 어머니들과 만나면 어느 정도 결론이 날 것 같다. 그리고 이쌤 말대로 나한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아이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게 있는 지 잘 생각해 봐야할 것 같다. 그런 생각에 도달하고 있을 때쯤 택시가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선생님 아이들 채팅방 캡처 사진 가지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저희 좀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아이들이 안 보여줘서 여기 아무도 못봤다고들 하시더라고요.”
고요한 교실, 어머니 여섯과 내가 앉아 있는데 민정이 어머니가 말을 시작했다. 그러자 다섯 명의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알겠다고 말하고 내 휴대폰에서 사진을 찾았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자 어머니들이 돌아가면서 사진을 보기 시작했다.
“어머...”
“심하네?”
“얘들이...”
사진을 보는 어머니들 표정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윽고 내 휴대폰이 한 바퀴 다 돌아서 다시 나에게로 왔다.
“일단 죄송하네요.”
“아, 근데 이건 누가 시작한 거죠? 이 사진으로 보면 민정이가 먼저 시작한 건가요? 혜민이는 민정이한테 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민정이 어머니의 사과에 이어 혜민이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그 말에 민정이 어머니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 이걸 누가 시작한 게 중요한가요?”
“아니... 보니까 심한 말은 거의 민정이가 한 것 같아서요. 나머지 아이들은 그냥 동조한 느낌이고... 그렇지 않나요?”
혜민이 어머니가 다른 네 명의 어머니에게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들끼리 싸움이라도 할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해지기 시작했다. 혜민이 어머니의 시선을 따라가 눈이 마주친 세 명의 어머니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면 안되는데? 나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나라도 말려야 하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런데 가만히 앉아 있던 지혜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지금... 누가 죄가 크고... 주도를 했고... 이런 건 말 안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차피 아이들 모두 채팅방에 가담한 이상 잘못을 한 거니까요.”
다행이다! 오~ 지혜 어머니. 내가 나서기 전에 이야기의 흐름을 잘 끊어주었다.
“네... 그건 그렇죠.”
지혜 어머니 말에 혜민이 어머니의 목소리가 작아지고 있었다.
“지금 저는...”
그 상황을 보다 내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를 벌하려고 이 자리를 마련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면 안될 것 같았다.
“아이들을 벌주려고 어머님들을 뵙자고 한 게 아닙니다. 아까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나눠봤는데 사춘기 여자 아이들인 만큼 별 것 아닌 일에도 제가 밉고 했던 것 같아요. 아이들도 저도 오해를 풀었고 앞으로 잘 지내자고 이야기도 했고요... 저는 어머님들께 부탁드리고 싶어서 이 자리를 마련한 겁니다. 앞으로 아이들이 저에 대해 불만 사항을 말하거든 저한테 바로 알려주시면 제가 지도하기 더 좋을 것 같고요... 어머님들께서도 저한테 말씀 하실 것 있으시면 어머님들끼리 말씀하시거나 아이들과 이야기 하지 마시고 저한테 직접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신규다 보니... 어머님들께서 아직 신뢰하지 못하시는 부분들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부족한 부분을 충분히 알고 있고, 죄송하게 생각하는 부분도 있고요... 그렇지만 일 년 아이들과 행복하게 잘 지내고 싶고 저도 노력 많이 할테니 어머님들께서도 많이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을 잘했던가? 밤새 생각했던 두서 없는 말들이 나름대로 조리있게 입을 빠져나왔다. 어머니들이 내 말 중간 중간에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봐 주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여 주기도 해서 더 자신감을 갖고 표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네, 선생님. 저희가... 오해한 부분도 있고... 그런 것 같네요.”
“아이들을 많이 사랑해 주시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저희도 반성하고 잘 도와드릴게요.”
“아무튼 이번 일은 저희 아이들이 잘못한 일이니 죄송합니다.”
“기분 푸시고 잘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지혜 어머니를 필두로 어머니들이 돌아가면서 말을 이었다. 마지막 즈음엔 모두가 미소를 지으며 대화할 수 있었다. 조금씩 마음이 통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은 소통의 물꼬를 튼 기분이다. 나는 그 순간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모든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이런 나의 마음을 알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신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저희는 그럼 가 볼게요.”
혜민이 어머니 다음으로 민정이 어머니가 말을 잇자 어머니들이 모두 의자를 뒤로 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더니 모두 금세 교실 앞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내 인사에 어머니들도 인사를 하며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목요일 공개수업 때 뵙겠습니다.”
가장 마지막으로 걸음을 걸어 나가던 연우 어머니가 말을 하며 나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나는 네, 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곧 어머니들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하며 나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 잊고 있었는데... 공개수업!
교사 안티채팅방 사건이 수그러들자 공개수업이 코 앞에 닥쳐 있었다. 지도안만 짜고는 준비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자리에 앉아 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4시 반. 아이들과 어머니들과 차례로 상담을 마치니 이 시간이 되었다. 오늘이야 말로 남아서 일하고 가야할 것 같다. 나는 일찍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내 자리로 돌아와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출력해 놓은 지도안을 토대로 교구를 만들기로 한다. 학습 문제랑 학습 활동은 미리 프린트 해서 당일에 붙이는 게 좋겠지? 나는 한글 프로그램을 열어 큰 글씨로 학습 문제와 학습 활동을 프린트 하기 시작했다. 프린트가 나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데 생각이 마구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왕따 사건, 이쌤과의 데이트(나만의 생각이지만), 아이들 상담, 어머니들 상담... 그러다 이쌤이 다시 떠오르고 고맙게 느껴졌다. 이쌤과 대화를 통해서 아이들과 잘 상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쌤이 아니었다면 화만 내고 잘못했다는 말을 듣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었을 수도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쌤의 조언 덕분에 나도 내 잘못을 인정한 채 마음을 열고 아이들과 어머니들과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잘 끝나서 정말 다행이었다. 이 기세를 몰아 공개수업도 잘 끝내보자! 나는 프린트 된 종이를 자르기 위해 가위를 찾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