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수업을 위한 일주일이 지나가고 있다. 선배 선생님들 조언에 맞춰 아이들 발표 자세도 더 지도하고, 교실 환경 정리 및 청소에 열을 올리며 화, 수요일이 지나갔고 오늘은 드디어 공개수업 당일이 되었다. 아침부터 평소답지 않게 정장 투피스에 화장을 더 신경 쓰고 출근을 하느라 저녁과 같은 피곤함이 밀려들었다. 아이들은 체육 전담시간이라 운동장에 나갔고, 나는 이십분 뒷면 시작될 공개수업의 지도안을 다시 살펴보며 교사 발언과 수업의 흐름을 머릿 속으로 외우고 있었다. 칠판에 붙일 자료들을 순서대로 배열해 칠판 아래에 놓아두고, 아이들 책상과 의자의 줄을 맞추기 시작했다. 환경판도 사물함 정리도 저만하면 됐고, 책상 배열도 좋고... 손으로 하나씩 짚어가며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는데 교실 앞 문이 드르륵 열렸다. 그리고 드러난 사람은 교... 교장 선생님?
“아, 안녕하세요? 교장선생님?”
평소에 일대일로 대면할 일이 없어서 그런지 교장선생님만 보면 긴장하게 된다. 그 바람에 자리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나선생. 저기 뒤에 걸레 좀 만국기처럼 걸어 놓지 말고.”
걸레? 만국기? 무슨 소리인가 싶어 멍하니 서 있는데 교장선생님이 앞문을 다시 닫고 나갔다. 닫히는 문에 대고 네, 라고 대답을 했는데 들었는 지 알 수는 없었다. 걸레? 나는 고개를 돌려 교실에서 걸레를 찾기 시작했다. 아! 저기! 교실 뒤 창가에 걸레를 걸어 놓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 생활하고 있는 곳이라 그런지 나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던 것을 교장 선생님이 지적한 것이었다. 나는 서둘러 뒤쪽으로 걸음을 옮겨 걸레를 접었다. 그리고는 빈 사물함 한 칸에 걸레를 집어 넣었다. 그제서야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학창시절 선생님한테 지적받은 기분이다. 별거 아니라도 찝찝한 기분. 아, 그리고 노크는 왜 안하는 거야? 저번에 운동장에서 기분 나빴던 일이 생각이 났다. 요즘 교장선생님 계속 마이너스네. 원래 상사들은 다 이런 건가? 얼굴을 아예 안 마주치는 게 나을 것 같다. 역시 자주 봐서 좋을 일이 없다. 그 때 아이들이 교실로 들어오는 소리가 웅성웅성 복도에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시계를 보니 공개 수업 십여분 전. 내가 체육 선생님한테 평소보다 조금 일찍 끝내달라고 부탁했는데 그에 맞춰 아이들을 보내준 것이었다. 뒷문과 앞문이 동시에 열리고 아이들이 손부채질을 하며 자기 자리에 하나 둘 풀썩 주저 앉기 시작한다. 다들 하나 같이 물통을 찾아 벌컥벌컥 물을 마셔댄다.
“아, 더워.”
“오늘 진짜 재미없었어.”
“선생님 에어컨 틀어주세요.”
에어컨? 5월에 에어컨을 틀어줄 리가 없는 걸 알텐데 아이들은 생각없이 나에게 요구를 해댔다. 아직 선풍기도 청소를 안 해서 그런지 중앙에서 틀어주지 않고 있는데 에어컨이라니.
“나도 틀어주고 싶다. 근데 아직 학교에서 안 틀어줘. 얘들아 이제 다들 자리에 앉아서 국어 책 펴세요. 2교시에 부모님들 수업 보러 오시는 거 알죠?”
아이들은 네,를 외치며 가방에서 책을 꺼내기 시작했다.
“선생님. 저 화장실요.”
“화장실 다녀올 사람은 쉬는 시간이니까 얼른 다녀오세요.”
손을 들고 발언한 연우를 보며 내가 대답을 하자마자 아이들이 우르르 복도로 몰려나갔다. 화장실을 가는 아이들 반, 놀러 가는 아이들 반이다. 복도가 금세 시끌벅적해진다. 그 상황에 하나 둘씩 부모님이 뒷문을 통해 교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제야 공개수업이 실감 난다. 다리가 후덜덜하고 심장이 조여 오는 기분. 몇 분이나 오실까?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아이들이 복도에서 소란스럽게 떠드는 소리가 신경 쓰인 나는 복도로 나갔다.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며 교실로 데려오기 위함이었다.
“얘들아, 조금 조용히 하고 얼른 교실로 들어가자.”
나는 남자화장실에서 나온 남자 아이들에게 말을 건넸다. 그 뒤에 여자화장실에서 나온 아이들에게도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데 복도를 걸어가는 이쌤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왜 그렇게 상기되어 있어? 떨려?”
이쌤의 말에 교실로 걸어가던 아이들이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아, 정말 이쌤. 갑자기 기분이 상했다. 이쌤의 말이 사실이지만 여기서 체면 구겨지게 ‘네, 떨려요.’라고 어떻게 말하느냔 말이다.
“아, 아뇨.”
나는 금방 탄로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는 종종걸음으로 교실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선생.”
이쌤이 부르는 소리에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시간이 없어서 이쌤 근처로 다시 되돌아가지는 않았다. 그러자 이쌤이 내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몸을 낮춰 나만 들릴 수 있게 낮고 작은 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학부모들은 다 아이들 자식 보러오는 거야. 수업 시작할 때만 나선생을 보지, 조금만 더 지나면 다 자기 아이들 보느라 바쁘다고. 그러니까 그렇게 떨 필요 없어.”
말을 마친 이쌤은 재미있다는 듯 씩, 웃으며 자기 교실로 걸어갔다. 잠시 이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갑자기 수업 시작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나는 서둘러 교실 뒤편으로 걸어가 학부모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학부모들과 인사를 나누며 수업 평가지를 한 장씩 나누어줬다.
“수업 보시면서 작성 부탁드립니다.”
어느새 수업을 참관하기 위해 들어온 학부모 수만 열이 넘었다. 우리 반은 정말 자녀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가보다. 나를 보기 보다는 자신의 자녀들을 보기위해 온 것일 거라는 걸 알면서도 입에 침이 바싹바싹 말라 온다. 시계를 보니 이제 수업 일분 전이다. 40분이라는 정해진 시간에 맞춰 기승전결 있게 수업을 마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교실 앞으로 돌아갔다. ppt 슬라이드쇼를 시작하고, TV 화면을 켜두었다.
“선생님들은 공개수업때 꼭 ppt 하더라?”
교실 앞에 앉아 있는 상렬이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나 원래 ppt 자주 썼거든요?’라고 대꾸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더 속상했다. 아이들은 생각없이 말한 것이지만 선생님 마음은 아프다.
“자, 여러분 책 펴세요. 이제 수업 시작하겠습니다.”
말을 마치며 마음 속에 놓여 있는 모래시계를 확 뒤집는다. 모래가 쪼르르 떨어지기 시작한다. 결말이 어찌되든 수업은 시작되었다. 칠판에 학습문제를 적으려 뒤를 돌아 아무도 보이지 않게 되자 스스로에게 힘을 주기위해 나누리 파이팅, 이라고 작게 말했다. 그리고 다시 뒤를 돌았다.
“저번 시간에 배운 것을 복습 먼저 해볼까요?”
유명 프로그램 MC라도 된 것처럼 활짝 웃으며 말을 시작했다. 아이들이 이런 나를 가식이라고 생각하려나. 아이들도 신경 쓰이지만 역시 가장 신경쓰이는 건 교실 뒤편에 일렬로 서서 나를 바라보는 학부모들이다. 실제로는 자기 자녀를 신경쓰는 거겠지만 왜 내 입장에서는 내 일거수일투족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까.
동기유발을 하고, 학습문제와 오늘 수업할 활동을 안내했다. 아직까지는 매끄럽게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지도안에 적어놓은 시간과 비슷하게 실제 시간이 흐르고 있다. 또 이쌤의 말대로 학부모들은 다 자기 자녀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심장을 조여오던 긴장감이 사라지고 기분이 느슨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오케이, 좋아. 이 상태로 쭉 끝내는 거야. 신규치고 너무 잘하는 거 아냐? 교실 뒤편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학부모, 웃음을 짓고 있는 학부모와 눈이 마주치자 스스로 우쭐해졌다. 그래, 수업 분위기는 나쁘지 않아. 잘 하고 있어. 그때 뒷문이 조금 열리고 교장, 교감 선생님과 연구부장님이 등장했다. 학부모보다 더 신경쓰이는 것이 역시 같은 선생님들의 평가일 것이다. 갑자기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지만 신경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ppt의 영상을 재생했다.
“선생님 안 나와요~”
그 말을 한 윤재에게 나도 알고 있어, 라고 대답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몇 번 연습해 볼때도 잘 나오던 영상이 왜 버벅대는 거지? 이거 꼭 보여줘야 하는 영상인데... 이마와 등에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눈이 마주친 교장, 교감, 연구부장 선생님의 표정이 어두운 것 같이 느껴졌다. 심지어 연구부장은 들고 있는 지도안 파일에다가 뭐라고 적어 넣고 있었다. 분명이 실수를 했다고 적는 거겠지? 내가 실수를 하고 있다고 인정하자 손이 더 떨려오기 시작했다. 지금 저 사람들 신경 쓸 때가 아냐... 어서 방법을 찾아야 해... 어서.
“이... 이게 갑자기 안 되네요... 선생님이 다시 보여줄게요.”
나는 ppt를 얼른 내려놓고, 동영상을 넣어둔 폴더를 컴퓨터 바탕화면에서 직접 찾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파일을 찾아 더블 클릭. 제발 이번에는 재생돼라... 돼라... 주문이라도 외우듯 마음 속으로 여러 번 말하고 있었다. 결과는? 다행히도 재생이 시작되었다! 아이들과 학부모, 뒤편의 선생님들도 내가 재생한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 그 틈에 재빨리 한숨을 내쉬었다. 아, 진짜 다행이다. 한 고비 넘겼네. 어쩐지 뭔가 너무 잘 되어간다 싶었어... 앞으로 남은 시간을 체크하기 위해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간은 25분쯤 남아 있었다. 공개수업이라 그런가 시간이 더 안 간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영상이 끝났다.
“네, 여러분 영상 잘 봤죠? 그럼 이 영상이 무슨 내용이었는지 발표해 볼 사람?”
아뿔싸. 아이들이 모두 손을 들지 않았다. 너희들까지 도대체 왜 이러니... 평소에는 발표 잘 했잖아? 선생님 좀 도와줘... 여기서는 발표가 꼭 필요했다. 아이들이 비슷하게라도 말을 해주어야 내가 수업의 흐름을 잘 이끌어 갈 수가 있었다. 나는 평소에 대답을 곧잘 했던 혜민이, 민정이, 정석이를 번갈아 바라보기 시작했다.
“우리반 평소에 발표를 잘 했는데... 오늘은 떨려서 그렇죠? 용기를 내서 발표 한 번 해 볼 사람?”
나는 경직된 입꼬리를 잔뜩 올리며 쇼를 진행하기 시작한다. 그 순간 다행히 민정이가 손을 들어 주었다. 나는 민정이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그러자 민정이가 일어서서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영상은 공익광고로 한 친구가...”
휴, 다행이다. 제대로 답변을 하고 있는 민정이가 정말 고맙게 느껴졌다. 그 순간 뒷문으로 교장, 교감, 연구 부장 선생님이 퇴장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실수 하나 만회한 걸 보고 나가서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민정이 발표를 너무 잘했어요. 앉으세요.”
민정이가 자리에 앉고 나는 계획해 놓은 대로 다음 멘트를 하기 시작했다. 힐끔 시계를 보니 20분 남아 있었다. 20분 얼른 지나가라... 무사히 지나가라... 마음 속으로 간절히 빌며 칠판에 만들어 놓은 교구를 붙이기 시작한다.
“부장님 저 오늘 수명이 일년은 단축된 느낌이에요.”
연구실 소파에 앉아 있는 부장님을 보며 말했다. 부장님은 웃으며 일어서 내가 서 있는 싱크대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양치컵에 꽂혀 있는 칫솔과 치약을 꺼냈다.
“점심 먹은 거 다 체한 거 아냐?”
“정장이라 허리가 불편해서 많이 먹지도 못했어요, 다행인지도요.”
“수업은 잘 끝났고?”
부장님은 칫솔에 치약을 쭉, 짜서 입에 넣었다. 나도 부장님을 따라 칫솔과 치약을 들었다.
“네, 그럭저럭요. 실수할 때 교장, 교감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순간 헉, 했어요.”
“원래 실수할 때 꼭 들어와. 징크스야 징크스. 나도 아까 혼자 버벅 댈 때 등장하셨잖아.”
위 아래로 칫솔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부장님이 말을 했고, 나도 양치질을 시작했다.
“부장님도 그러시구나... 그 말씀을 들으니 조금 위로가 되네요.”
그 순간 이쌤과 수진쌤이 문을 열고 들어와 나란히 통에서 칫솔을 빼 가기 시작했다. 이쌤은 바로 소파에 털썩 주저 앉았고, 수진쌤은 치약을 가져가 먼저 묻히고는 이쌤에게 건네 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누리쌤 수업은 잘 했어?”
“네, 그럭저럭...”
입에 거품이 한 가득 있어서 대충 말한 나는 바로 입을 헹구기 시작했다. 그 사이 수진쌤이 다시 말을 이었다.
“부장님. 저 완전 망할 뻔 했잖아요. 조별 발표시키는 수업이었는데 곧잘하던 애들이 왜 그렇게 개미소리만하게 목소리를 내던지...”
수진쌤의 말에 입 안을 다 헹구고 휴지로 입을 닦던 부장님이 시원하게 웃었다.
“공개수업 하고 마냥 행복한 사람 어디 있어? 다 그렇지. 어디 이선생도 실수 하나 털어놔 봐.”
부장님은 소파로 걸어가 이쌤 옆에 걸터 앉았다.
“저야 뭐. 워낙 퍼펙트 해서...”
이쌤은 연기를 하듯 과장된 얼굴 표정으로 장난스럽게 말했다.
“쟤는 실수도 안 해요. 무슨 AI야? 인간다운 매력이 없어...”
수진쌤의 말에 나는 휴지를 뜯어 입을 닦다 말고 이쌤을 바라보았다. 회색 수트 차림의 이쌤은 그제야 칫솔에 치약을 묻혀 이를 닦기 시작했다. 이쌤은 역시 수업도 잘 하는 구나, 라고 나도 모르게 생각을 하던 나는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정말 관점의 차이구나. 같은 말을 들어도 예전 같으면 잘난 척 되게 한다고 생각했을텐데 저런 모습까지도 멋있게 느껴지다니. 왠지 분하게 느껴졌다.
“이선생은 수업으로 상도 타지 않았어?”
“그거야 뭐 운으로...”
부장님의 말에 이쌤이 이번에는 잘난척을 하지 않고 겸연쩍다는듯이 일어나서 싱크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사이 부장님 옆 이쌤이 앉아있던 소파에 앉았고, 수진쌤도 양치질을 마치고 걸어와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수진쌤과 거리를 두기위해 엉덩이를 슬쩍 옮겨 앉았다. 그렇지만 언제부턴가 수진쌤이 불편해져서 이렇게 나란히 앉은 것도 오랜만인 것 같다.
“오늘 공개수업도 끝났고 동학년 회식 어때요? 누리쌤 시간 어때?”
갑자기 들어온 공격에 생각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얼떨결에 네, 라고 대답을 하고 말았다. 어차피 동학년 회식이니 뭐, 우리 둘이 먹는 것도 아니고 괜찮겠지, 라는 생각이 뒤늦게 머릿 속을 스쳐 지나간다.
“아, 나는 오늘 부장 회식이 있어서.”
어? 이런? 부장님이 슬쩍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이러시면 곤란한데... 그래도 이쌤이 있으니. 나는 입을 헹구고 있는 이쌤의 뒷모습을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나도 오늘은 안 돼. 선약이 있어서.”
“엥? 다들 뭐야. 그럼 누리쌤 밖에 시간 안 되는 거네?”
“그럼 다음에...”
내가 서둘러 말을 하고 있는데 수진쌤이 내 말을 딱 자르며 입을 열었다.
“좋아. 그럼 우리 둘이 먹지 뭐. 우리 오늘부터 수진 누리 시스터즈 할까?”
수진쌤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내 어깨를 꽉 끌어 안았다. 나는 이번에도 몸을 빼려고 노력했다. 아, 저기... 나는 요즘 당신이 매우 불편...
“누리, 수진 앞 글자 따서 누수 시스터즈 어때? 크크크. 어차피 둘 다 뇌세포가 누수 중인 것 마냥 정신이 없으니 딱이다, 딱!”
박장대소를 하며 이쌤이 말을 마쳤다. 그 사이 나는 수진쌤이 팔에 힘을 푼 틈을 타 몸을 빼냈다.
“뭐라니. 글자를 제대로 따야지. 예쁘게 수리 시스터즈 어때? 헐리웃 스타 예쁜 딸 이름 아냐. 아니면 수능때 수리 영역을 잘 했다는 의미도 있고?”
수진쌤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 둘에게 이렇게 묻고 싶었다. 아, 저기 다들 제 의견에는 관심이 없으신 거죠?
“저... 저도...”
내가 약속을 미뤄보기 위해 운을 띄웠다.
“헉,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 5교시 시작 시간이다. 누리쌤 그럼 끝나고 만나.”
수진쌤이 정신없이 말을 마치며 연구실을 나섰다. 엥? 이러면 곤란한데... 내 표정이 일그러지는 사이 그 뒤로 부장님과 이쌤도 재빨리 연구실을 나갔다. 휑한 연구실에 앉아 있는 나도 얼른 일어 서서 교실로 향하기 시작한다. 일단 5, 6교시 수업이나 마무리 짓고 애들 보내고 생각해보기로 하자. 빠져나갈 궁리는 조금 뒤로 미루었다.
‘그러나’, 라는 접속사가 딱 떠오르는 순간이다. 혹은 개그프로그램에서 주인공이 좌절할 때 나오는 ‘띠로리~’로 시작하는 음악이거나.
“짠~”
수진쌤의 말에 정신을 차린 나는 그녀의 잔에 내 잔을 부딪혔다. 수진쌤은 바로 입으로 가져가 시원하게 원샷을 했다. 나는 다시 수진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내가 어쩌다 이 사람과 단둘이 고깃집엘 왔을까. 알맞은 핑계를 찾지 못한 이유가 컸다고는 하지만 어쩌면 나도 수진쌤과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캬~ 역시 뭐니뭐니해도 공개수업 끝내고 먹는 소주 맛이 최곤 거 같애.”
수진쌤은 알맞게 구워진 고기를 하나 집어 입에 가져갔다. 그리고 고기를 씹으며 나를 향해 말을 건넸다.
“누리쌤 안 먹어?”
그제서야 다시 정신이 든 나는 수진쌤을 멍하니 보던 것을 멈추고 소주 한잔을 마셨다. 입에서 목으로 쓰고 뜨거운 것이 넘어갔다. 식도로 그리고 위까지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소주를 먹는 걸까? 이 쓰고 청량감도 없는 술을.
“요새 우리 둘이 이렇게 대화하는 거 오랜만이다?”
수진쌤이 다시 술잔에 소주를 따르며 말했다. 그 말에 괜히 내 마음을 들킨 것처럼 뜨끔했다.
“그... 그렇죠. 요새 바빴어서.”
“그런 이유는 아닌 거 같은데?”
제대로 들어온 일격이다. 수진쌤이 이번에는 건배도 하지 않고 바로 입으로 소주잔을 가져갔다. 당황한 나는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알수 없어서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되지? 평소 유한 수진쌤 답지 않게 오늘은 예리하고 빠져나갈 수 없는 질문을 연이어 던지고 있었다.
“오월 초 정도 부턴가... 뭔가 누리쌤이 날 피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제대로 정곡을 찔리고 말았다. 나는 도저히 수진쌤과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서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술을 스스로 입에 가져갔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나와 단둘이 저녁을 먹자고 한 거구나. 내가 생각이 모자랐다. 불편한 사람과 불편한 자리에 오는 게 아니었다.
“이정석한테 들으니 저번에 누리쌤 안티채팅방 사건도 있었다며? 평소같으면 나한테 먼저 다가와서 고민 상담하고 했을 거 아냐. 근데 이정석한테만 털어놓고... 솔직히 나 누리쌤 많이 아꼈는데 속상하더라.”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말을 마친 수진쌤은 고기를 한 점 집어 씹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빈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이번에는 내 잔도 비어 있어서 내 잔에도 술을 따라주었다. 수진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음을 찌르는 것 같이 느껴졌다. 연거푸 술을 두잔 마셔서 그런지 얼굴이 금세 달아올랐다. 그리고 머리가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런 감정이 더 아프게 다가오는 걸까.
“죄송... 해요. 선생님.”
이 말 밖에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진짜 죄송하지는 않지만 미안은 한 기분이다.
“뭐야, 죄송할 것 까지는 없고. 선생님이라니. 되게 멀게 느껴진다?”
수진쌤이 다시 한 잔 소주를 마셨다. 나도 수진쌤을 따라 잔을 들었다. 어느새 수진샘의 얼굴도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조금만 더 공격이 들어오면 내 스스로 이쌤을 좋아하고 있다고, 그래서 당신을 질투했다고 고백하게 될라나? 아니면 좀 더 술을 마셔서 술 기운에 말하게 될까? 아니면 끝까지 난 이 마음을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몽롱한 정신에 생각할 거리가 너무 많아져서 혼란스럽다. 그래서 쉽사리 잔을 입으로 가져가지 못했다.
“너...”
수진쌤이 갑자기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가리키더니 잠시 입을 닫았다. 이윽고 천천히 입술이 벌어지며 말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수진쌤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하고, 수진쌤의 입술 모양이 슬로우비디오처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정석 좋아하지?”
심장이 쿵, 내려 앉았다. 오늘 받은 공격중에 최고다. 제대로 급소 공격을 받은 나는 방어도 재공격도 하지 못하고 땅에 쓰러져 버렸다. 술잔을 테이블에 쿵 놓은 바람에 찰랑이던 술이 반은 밖으로 쏟아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