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친구들도 아니고, 우리반 아이들도 아니고, 요새 얼굴을 많이 보는 수진쌤도, 이쌤도 아닌 교장 선생님이 나올 줄이야! 벌떡 일어나서 꿈인 것을 확인하고 시계를 보니 8시 40분이었다.
“악, 늦었다!”
꿈에 계획서 문제로 교장선생님한테 정신없이 혼이 났던 나는 말도 안 되는 시간에 눈을 떴다는 사실에 놀라 모든 정신이 몸 밖으로 달아나 버린 듯했다. 어쩔거야. 말도 안되는 시간에 일어났어. 수업이 9시 부턴데 지금 일어나다니! 오늘 왜 알람이 안 울린 거지? 나는 서둘러 잠옷을 벗고 옷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아무 옷이나 주워 입기 시작했는데 바지 한 쪽에 두 발을 모두 끼워 버리고 말았다. 요즘 유행한다는 통이 넓은 바지여서 다리 넣을 구멍을 헤매다가 정신없이 두 다리를 모두 넣은 것이었다. 정말 가지가지 한다. 나는 서둘러 다리를 빼내 제대로 바지를 입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달려가다가 발끝을 침대 모서리에 찧고 말았다.
“악. 아파...”
발끝을 대충 문지르다 계속 벨이 울리고 있는 휴대폰을 집었다. 화면을 확인하니 이쌤이라는 두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여보세요?”
내가 늦어서 전화한 건가? 다급한 목소리가 빠르게 입을 빠져나왔다.
“오늘 집에 가?”
“네?”
집? 무슨 말이지?
“오늘 토요일이잖아. 집에 가냐고.”
“토? 오늘 토요일이에요? 아...”
나는 벽에 걸린 달력에서 오늘 날짜를 빠르게 확인했다. 오늘은 14일 토요일이었다. 목요일에 공개수업하고, 어제 학교 갔던 게 금요일이니까 오늘이 토요일 맞구나. 벽에 걸린 달력 속에 적어놓은 공개수업이라는 글자를 통해 머릿 속을 빠르게 회전한 결과 오늘이 토요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저 오늘 학교가는 날인 줄 알고... 아, 감사합니다. 쌤 아니었으면 진짜 학교로 달려가고 있었을 거에요.”
그제야 큰 숨이 입을 통해 빠져나왔다. 나는 풀썩 침대에 주저 앉았다. 휴대폰을 왼손으로 고쳐 잡고 오른손으로 정신을 차리기 위해 얼굴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뭐라고? 학교? 하하하. 정말 정신없다... 너 진짜 버라이어티 하다. 하하하.”
이쌤이 재미있다는 듯 웃는 소리가 귀로 들려온다. 이런 이미지를 자꾸 쌓아 가면 안 되는데... 생각을 그대로 말해버리다니 나도 참 생각없다, 정말. 왜 짝사랑남한테 정신없는 이미지만 자꾸 적립하는 거니, 나누리!
“참. 그런데 토요일 아침부터 무슨 일로?”
자책을 멈추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러고보니 평소에 따로 전화 온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 의아했다.
“어제 계획서 여러 개 받았다고 했지?”
업무를 도와주려고 전화를 했나보다. 나는 서둘러 네, 라고 대답했다. 어제 퇴근 전까지 주변의 세 개 학교에서 계획서를 받아놓았다. 같은 업무를 하고 있는 다른 학교의 선생님들이 흔쾌히 도와주어 정말 다행이었고 감사했다.
“퇴근할 때 교무부장한테 들으니 다음주 중에 계획서 제출이라고 하던데 알고 있어?”
교장선생님이 나한테 계획서 제출 날짜를 알려주지 않았던 터라 알고 있지 못했다. 아니다. 이것은 어쩌면 내가 미리 찾아봤어야 했던 건지도 모른다. 일을 전달 받았으면 알아서 공문을 찾아보고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친구한테 들었던 것 같기도...
“알고 있을 리가 없지.”
내 생각에 불쑥 이쌤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알고 있었으면 이렇게 편하게 지금까지 자고 있지는 않았겠지?”
“저 안 자고 있었는데요?”
나는 황급히 변명을 했다.
“지금까지 자고 있었으니 날짜 확인도 안 하고 학교 가려던 거 아냐.”
이쌤의 말에 허를 찔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 네...”
예, 예... 다 맞는 말씀입니다. 계획서를 써야 한다는 사람이 제출 날짜도 알아보지 않았던 것도. 편하게는 아니지만 지금까지 자고 있었던 것도.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동학년 선생님들이다. 저번 나의 짝사랑을 알고 있던 수진쌤도, 그리고 지금 이쌤도. 나도 저정도 경력이 되면 저렇게 될 수 있으려나? 나는 일도 서투르고, 사람과의 관계도 내 마음을 숨기는 것도 서투른 것 같다.
“자책할 필요는 없고.”
내 생각의 흐름까지 알고 있다. 갑자기 무서워진다. 이 사람.
“어쨌든 오늘 집에 안가면 계획서 좀 보고 싶은데... 다음 주 중에 제출이면 주말 지나서는 대충 초안이라도 교장선생님한테 들고 가는 편이 나아. 파일이면 이메일로 보내줘도 되고.”
번개같이 머릿 속으로 계획이 짜여지기 시작했다. 오늘 중 가장 빠른 두뇌회전을 시작했다. 파일이면 이메일로 보내줘도 된다는 말은 파일이 아니면 만나서 보여줘야 된다는 거네?
“잠, 잠시만요...”
나는 서둘러 책상위에 널브러진 가방으로 달려가 어제 출력해놓은 계획서가 있는지 확인했다. 손으로 가방 속에 있는 공책이며 교무수첩이며 책상으로 빼기 시작했다. 제발 있어라. 파일 어제 출력한 거는 확실한데 챙겨왔나? 챙겨 왔길 바라는 마음으로 파일철에 묶인 A4 용지 출력물들을 확인해보기 시작했다.
“있다!”
나는 환호하듯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실수다.
“뭐가 있다고?”
“아, 저... 파일을 USB에 담아오지 않아서...”
“뭐야? 그런 걸 안 챙기면 어떡해. 정신이 있는 거야? 계획서 작업을 바로하려면 파일이 있어야 하는데...”
휴대폰 저 편에서 좌절하고 있는 이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때 내가 이쌤의 말을 오랜만에 막아서며 입을 열었다.
“저 출력물은 가지고 있는데... 시간 괜찮으시면 밖에서 봐주시면...”
마음은 굴뚝같은데 말로 그럴듯하게 포장이 되질 않는다. 이거 완전 데이트 신청처럼 들리는 거 아닐까? 갑자기 얘 왜이래,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면 곤란한데... 나는 왜 수진쌤처럼 말을 세련되게 못하는 걸까. 이쌤이 대답하지 않고 있는 시간 동안 자책이 시작되었다.
“흠... 할 수 없지, 그럼. 일단 봐주기는 해야 할 것 같으니까. 어디서 볼래?”
아싸!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나는 너무 기뻐서 폴짝폴짝 뛰고 있었다.
“여보세요? 잘 안들려?”
이쌤의 목소리에 정신이 든 나는 점프를 멈추고 숨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뇨. 잘 들려요. 이쌤 편하신 데서 봐요. 어디서 보는 게 편하세요?”
“너 나한테 밥 두 번 사야 되는 거 기억하지? 아침 먹었어? 아, 지금 일어났으니 먹었을 리가 없지. 그럼 밥부터 먹자. 지금 시간에 여는 데가 해장국 집 정도 밖에 없는데 콩나물 해장국 괜찮아?”
내가 괜찮다고 대답하자 이쌤이 근처 콩나물 해장국 집의 위치를 설명해주었다. 전화는 곧 끊겼고 나는 서둘러 화장실로 가서 세수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빠르지만 정성껏 화장을 했다. 풀메이크업이지만 저 BB만 발랐어요, 할 수 있는 느낌으로.
“아, 멍청이. 옷을 먼저 입었어야되는데...”
윗옷을 화장한 얼굴로 입으면 분명 화장이 번지게 될 것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단추로 된 셔츠를 골라 입었다. 그리고는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계획서, 노트북, 필통, 노트... 그러다 손에 잡힌 향수를 뿌려본다. 금방 상쾌하면서도 달콤한 향이 온 몸을 감쌌다. 기분이 달아오른다. 나름대로 데이트니까. 휴대폰을 가방에 챙겨 넣으며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콩나물 해장국집에 들어서자 먼저 와 있던 이쌤이 손을 드는 것이 보였다. 나는 이쌤이 앉은 테이블로 걸어가 이쌤 맞은편에 의자를 빼고 앉았다. 옆에 놓인 의자에 노트북이 든 가방을 내려 놓자 이쌤이 입을 열었다.
“일하려고 온 사람 답네. 가방 진짜 크다. 미리 콩나물 해장국 두 개 시켰어.”
내가 네, 라고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점원이 뜨거운 콩나물 해장국이 들어있는 뚝배기 두 개를 가져왔다.
“뜨겁습니다. 비키세요.”
내 앞에 내려 놓은 뚝배기를 바라보는데 여전히 국물이 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쌤은 벌써 뚝배기에 숟가락을 넣어 밥과 콩나물을 잔뜩 푸고는 입으로 후후 불고 있었다. 그러다가 크게 입을 벌려 해장국을 먹기 시작했다.
“완전 뜨겁다.”
입 안에 넣은 콩나물 해장국이 여전히 뜨거웠던지 바로 물컵을 가져와 물을 몇 모금 마시는 이쌤.
“뭐해, 안 먹어? 맛있어.”
이쌤이 두 번째 숟가락질을 하는 걸 보며 나도 숟가락을 들었다.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어쩔 수 없지... 그런 생각을 하며 한 입 맛을 보는 순간.
“우와. 되게 맛있다!”
나도 모르게 감탄을 하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고 이쌤이 크게 웃었다.
“무슨 먹방 보는 줄 알았다. 하하하. 맛있지? 나는 맛집만 다닌다고. 일해야 되니까 서둘러 먹자.”
그 말에 나도 이쌤을 보는 것을 멈추고 해장국을 제대로 먹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침에 뜨거운 것이 속에 들어가니 든든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학교가 우리랑 제일 비슷한 것 같다. 목적, 방침 이런 건 비슷하게 가고... 교장선생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니가 말을 잘 만들어봐. 예를 들면...”
1차 식사를 마치고 2차로 커피숍에 앉은 우리는 서둘러 일을 시작했고, 지금 이쌤은 내 노트북을 자신의 앞으로 가지고 가 한글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쌤이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왠지 모르게 기분 좋게 느껴졌다. 일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멋있기도 했고.
“어때?”
이쌤은 맞은 편에 있는 나에게로 노트북을 돌려 그동안 자신이 작업한 것을 보여주었다.
“좋... 좋은데요?”
대박. 역시 이쌤답다고 해야하나. 이쌤이 금방 만든 문장 몇 개를 살펴보니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으로 필요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였다면 몇 시간 걸려서 문장을 만들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더욱 이쌤을 우러러 보게 되었다.
“다 좋지? 생각이 없으니 그렇지.”
이쌤은 잡고 있던 볼펜을 들어 내 머리를 콩, 때리는 듯한 제스추어를 취했다.
“이거 니 일이야. 이제 부터는 니가 말 만들어봐. 이제 내용을 적어야 된다고. 세부적인 계획을 적어 넣어야 되는데... 이 학교 보다는 이 학교처럼 작업하는 게 더 깔끔하게 보이지?”
이쌤은 펼쳐져 있는 출력물들을 넘기다가 한 부분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이미 나도 다 살펴본 계획서들이었지만 나는 그저 다 잘 썼네, 라고만 생각되었던 것들이었다. 역시 일을 잘하긴 하는 구나. 잘은 모르지만 그런 포스가 느껴졌다.
“이런 식으로 말 만들어봐.”
이쌤의 말에 나는 노트북을 앞으로 가져와 머리를 짜내며 문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이 이런 거구나. 창작의 고통을 느끼며 말을 만들고 있다.
“내일은 스승의 날이네. 벌써.”
이쌤이 기지개를 켜며 한 말에 나도 이쌤을 바라보았다.
“그러네요. 이번엔 일요일이 스승의 날이네요.”
교사가 되어 처음 맞는 스승의 날이 일요일이라는 생각에 괜히 슬픈 기분이 들었다. 선물을 바라는 건 절대 아니었지만, 아이들이랑 스승의 날 파티도 하고 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쉬워하지마. 일요일이라 더 좋은 거야. 파티고 선물이고 뭐고 다 귀찮아. 애들 파티하는 것도 자기들이 하고 싶어서 하는 거고. 괜히 학부모 선물 들어오면 돌려보내는 것도 이만저만 힘든 일이 아니라니까. 받으면 받는다고 민원 나오고, 돌려 보내면 돌려 보낸다고 섭섭하다고 전화받는 게 스승의 날이야. 이번엔 일요일이라 진~짜 좋다, 좋아.”
말을 마친 이쌤은 앞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 빨아 들이기 시작했다. 이쌤 말을 듣고 보니 그럴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직 뭘 모르는 구나, 진짜. 그저 즐거운 날일 줄만 알았는데 생각없이 스승의 날을 맞았다가 큰 코 다칠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뜩이나 학부모 관계가 어려운 나에게 일요일에 맞는 스승의 날은 다행이었다. 그때 딩동, 하고 이쌤 휴대폰에 메시지가 수신되었다는 알림음이 울렸다.
“어? 민정이네? 선생님 스승의 날 축하드려요. 얘 작년 제자거든. 캬. 여전히 말도 이쁘게 잘한다.”
아마 작년 제자한테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문자가 온 모양이다.
“선생님과 함께했던 일년이 그립네요. 내년엔 꼭 찾아 봴게요.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이게 진짜 보람이지. 진정한 스승의 날 선물이다.”
기분이 좋은지 이쌤은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부러워요.”
“부럽지? 지금 맡고 있는 애들보다도 이렇게 지나간 제자들이 연락해올 때가 가장 보람있는 것 같아. 너도 내년 쯤 되면 이런 애들 한 둘은 생기겠지?”
“겨우 한 두명이요?”
“야. 한 두명이라도 남으면 많이 남는 거야. 내년에도 걔들은 담임 선생님이 있다고. 그럼에도 작년 선생님 생각해주는 애들은 진짜 고마운 거지.”
이쌤 말이 맞았다. 우리반 아이들이 내년엔 중학생이 되지만 또 다시 담임 선생님이 있겠지. 나만 이 아이들 기억에 남을 거라는 생각 자체가 오류였다.
“그러네요.”
씁쓸한 마음이 들어 내 앞에 놓인 달디 단 바닐라라떼를 마시기 시작했다. 금세 단 커피가 목을 타고 내려온다.
“한 명이라도 기억할 수 있게 올 해 잘 가르쳐. 하긴 잘 가르치는 것보다 사랑 많이 해주고, 재미있게 지내는 게 제일인 것 같아, 난. 너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이 국어 수업 어떻게 했는 지 기억나?”
이쌤의 말에 나는 잠시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나 선생님들의 특징이나 재미있었던 일은 기억이 났지만 정작 수업은 기억에 나질 않았다.
“거 봐. 그런 건 기억 안난다니까. 나쌤이 수학은 정말 잘 가르쳤는데... 이런 애들 없어. 즐겁고 재미있는 일들을 많이 만들어주는 게 초등학교에서는 맞는 거 같아.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말이야. 아, 이제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하고 일하자, 일. 나 한 삼십분 있으면 가봐야 돼. 그 전까지 많이 빼먹으라고.”
말하면서 휴대폰을 보던 이쌤이 갑자기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마쳤다. 괜히 또 심장이 두근두근하기 시작했다.
“알겠냐고.”
그제야 정신이 든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네? 아, 알겠습니다!”
“목소리는 우렁차서 마음에 드네. 하하하. 그렇게 멍~ 하니 보지 말고 얼른 타자 쳐.”
이쌤의 말에 나는 네, 라고 대답하고는 시선을 노트북으로 떨구었다.
그리고 돌아온 월요일. 나는 이쌤 덕분에 무사히 교장실에 숙제를 제출할 수 있었다. 교장 선생님은 신규치고 잘 했다는 칭찬을 오랜만에 보내주셨고, 남은 시간 동안 잘 다듬어서 제출하라는 또 다른 숙제를 받아왔다. 그래서 이렇게 월요일부터 야근 중이다. 남들이 퇴근하는 소리를 들으며 먼저 내일 수업을 준비했다. 아이들이 하교하고 동학년 회의를 했더니 내일 수업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6교시까지 계획을 마치니 여섯 시. 나는 집에서 가져온 컵라면에 물을 부어 놓고 오늘 도착한 업무는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교무업무시스템에 접속했다. 방송 관련 공문들이 많이 오긴 했지만 접수만 하면 되는 내용들이라 결재라인에 맞게 결재를 올렸다. 그리고는 괜히 나이스를 접속해 오늘의 근무 현황을 클릭했다. 일단 나누리 시간외근무가 잘 올려졌는지 확인했다. 결재 완료라고 적힌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데 그 밑에 ‘이정석 시간외근무’라고 적혀있는 것이 보였다. 앗! 그렇다면 이쌤도 지금 시간외근무 중이라는 소리? 몇 시까지 신청했는지 확인해보니 7시까지로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한 시간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소리네? 아침부터 지금까지 수업과 업무를 반복해서 지쳐 있었던 터에 갑자기 기분이 들뜨기 시작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컵라면을 하나 더 싸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배에서 꼬르륵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내 배부터 채우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어 컵라면 뚜껑을 열고 나무 젓가락으로 크게 한입을 잡아 올렸다. 그리고 뜨거운 면발들을 한 입 크게 배어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리는 게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 입에 머금었던 라면들을 뱉고 말았다. 그리고는 의자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야, 더러워. 먹던 건 왜 뱉고 그러냐.”
이쌤이었다. 하필 이럴 때 올 거는 또 뭐야.
“쌤때문이잖아요. 깜짝 놀라서.”
창피한 기분이 들어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아, 놀랐다면 미안하네.”
“그런데 저 있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지나가다 불 켜 있길래. 내가 그럼 뭐 나이스 열고 확인이라도 했을까봐?”
괜히 뜨끔한 기분이 들었다.
“아, 아뇨. 그건 아니고... 그런데 저희 교실에는 왜?”
“그냥 지나가다가 불 켜져 있길래. 웬 야근인가 싶기도 하고... 그 일 때문이면 잘 작업하나 봐야할 것 같은 생각도 들어서?”
이쌤은 그렇게 말하며 컴퓨터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들어왔다. 이쌤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더욱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이러다 심장 소리가 이쌤한테까지 들릴 것 같아 이쌤이 컴퓨터 앞에 서자 약간 옆으로 몸을 피했다. 이쌤은 마우스를 잡아 스크롤을 내리기 시작했다.
“오. 생각보다 잘 썼는데?”
이쌤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생각지 못한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활짝 미소가 지어졌다. 오랜만에 교장선생님한테도 칭찬을 받았는데 이쌤한테까지 받으니 뭔가 일적으로 조금은 성장한 기분이 들어 기뻤다.
“거의 다 했네? 기대효과 부분만 좀 더 적어 넣으면 되겠다.”
이쌤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네. 감사합니다.”
한껏 들뜬 기분에 표정 관리가 잘 되진 않았지만 최대한 안정적인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금요일에 결재 올린다고 했지?”
“네.”
“그럼 그 전에 교장선생님 한 번 더 보여드리고.”
“네.”
나는 연달아 네, 라는 대답만 하고 있었다. 이쌤은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고 고개를 몇 번 끄덕인 뒤 앞문으로 걸어갔다. 이쌤이 가는 것이 아쉽게 느껴졌지만 잡을 핑계가 생기진 않았다.
“하다가 어려운 거 있음 물어보고.”
문을 열던 이쌤이 뒤를 돌아다 보았다. 하다가 어려운 거 있으면 물어보고. 어려운 거 있으면 물어보고. 물어보고. 영화 속 에코 효과를 낸 것처럼 머릿속에서 이쌤의 목소리가 느리게 그리고 울리면서 반복되고 있었다.
“아... 네. 감... 감사합니다.”
어설프게 인사를 하고 말았다. 인사를 건네듯 이쌤이 손을 들어보이고는 곧 문을 닫았다. 나는 풀썩 의자에 주저 앉았다. 이미 퉁퉁 불어버린 컵라면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배가 고프지 않다. 행복한 기분으로 온 위장이 꽉 찬 느낌. 저녁 한 끼 안 먹으면 어때. 마냥 기분이 좋다.
“아~~ 기분 좋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이럴 때 애들이 없어 정말 다행이다. 애들이 봤으면 ‘쌤. 창피해요.’ 했으려나. 집에서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듯, 학교에서는 교사가 행복해야 아이들이 행복하다고들 한다. 지금같은 기분이면 내일도 모레도 아이들에게 더 사랑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업무도 더 열심히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아직 기약없는 짝사랑이지만 어쨌든 사랑이라는 건 좋은 것 같다. 이제 상념에서 벗어나 일을 열심히 할 시간이다.
“아자아자!”
열심히 일 하자! 나누리! 파이팅! 마음속으로 외쳐 보았다. 그리고는 덧붙여 이정석 파이팅이라고 작게 마음속으로 외쳐 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금요일이 되었다. 지금은 2교시 수학시간. 아이들은 한창 단원 마무리 시험을 보고 있다. 사각사각 연필 소리만이 반에 가득하다.
“이거 틀린 것 오답노트 만들어서 다시 검사받아야 하니까 아는 것 틀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길 바래요.”
아이들이 시험을 보고 있는 사이 사이를 걸어다니며 내가 말했다. 그러자 석훈이와 소정이, 혜민이는 고개를 시험지에 바짝 붙이고 더욱 문제 풀이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뒷 줄에 앉은 동환이는 고개를 들고 여기 저기를 바라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선생님은 누구나 백점 맞기를 바라지 않아요. 자기가 아는 것만 열심히 풀어 보세요. 친구들 것을 컨닝하지 말고. 또 컨닝하지 않더라도 오해받을 행동을 하는 것도 금물입니다. 동환이 열심히 풀어봐.”
나는 지나가면서 동환이의 머리를 꾹 눌러서 쓰다듬어 주었다. 동환이처럼 이미 시험을 포기하고 있는 아이들 몇이 눈에 들어온다. 6학년 과정에서 특히 수학은 그동안 누적되어온 결손들이 많으면 공부 자체가 어려워진다. 덧셈을 잘 모르는 아이가 어찌 사칙연산을 풀 수 있겠는가. 이런 아이들은 남겨서 6학년 과정을 가르치는 것도 어렵다. 문제를 풀 수준이 안 되기 때문에 문제를 풀 수 있는 아래 학년 과정부터 가르쳐야 한다. 동환이도 요즘 3학년 수학을 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문제는 동환이에게 당연히 풀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수준이 되는 아이들만 데리고 수업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과목이야 어렵지 않게 모두 함께 참여하는 수업이 가능하지만, 수학은 그렇지 못했다. 잘하는 아이들은 이미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해 와서 수업 시간이 지루하고, 못하는 아이들은 수업 자체가 어려워 집중하지 못했다. 수업을 제대로 따라오는 아이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어떻게 하면 수학을 포기하지 않게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즐겁게 수학 수업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요즘 나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다.
“이제 십 분 남았습니다.”
시계를 힐끔 본 내가 아이들에게 남은 시간을 알려주었을 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얘들아, 미안.”
시험 시간에 방해를 주기 때문에 얼른 전화를 받아 작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6학년 2반 나누...”
내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수화기에서 말이 들려오고 있었다.
“오늘이 마감일인데 왜 아직 결재를 안 올리지?”
교장선생님이었다. 나는 갑자기 들려온 볼멘소리에 기분이 확 나빠졌다. 기승전결없이 바로 결을 말하고 있는 교장선생님. 게다가 교사의 임무 중 가장 중요한 건 수업이 아닌가? 왜 하필 수업시간에 전화를 건 거지? 모르는 건 아닐테고.
“수업 끝나고 결재 올릴려고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 최대한 작게 통화를 했지만, 아이들 몇 몇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눈이 마주친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러면 결재가 너무 늦어. 나 오늘 출장이 있으니 빨리 올리세요.”
네, 라고 대답이 채 나오기도 전에 전화는 끊겼다.
“하.”
멍하니 수화기를 바라보며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 기분이 나쁘다. 첫인사, 끝인사 다 생략에 수업 방해에... 그렇지만 이걸 잘못했다고 말할 수 없는 신규교사. 그리고 뭐, 말한다고 수긍할지도 미지수다. 보통 선생님들이 말하지 않았으니까 여전히 이런 전화를 걸고 있는 거겠지만.
“선생님 다 풀었어요.”
석훈이가 손을 들며 말했다. 그 덕분에 나는 나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기분이 나쁘다가도 아이들만 보면 기분이 풀어지곤 했으니까.
“검토했니?”
“네.”
“그럼 선생님한테 가져와.”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석훈이가 시험지를 들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걸 본 혜민이도 시험지를 가져오고 있었다.
“다 푼 사람은 선생님한테 제출하고 체육 하러 운동장으로 나가세요.”
수업이 거의 끝났음을 확인한 나는 아이들에게 전달했고, 시험지를 제출한 아이들은 조용히 교실을 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결재나 올려야겠다. 오늘까지니까 좀 이따가 해도 되겠지 했었는데 교장선생님 전화까지 받았으니 서둘러 올려야 할 것 같다. 일단 교무업무 시스템으로 들어가 공문 쓰기를 시작했다. 공문 제목과 내용을 적은 뒤 내가 만든 계획서 파일을 첨부하면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일단 제목부터 적자. 받은 공문의 제목과 같게 올리면 된다고 했었지? 나는 서둘러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제목과 내용을 다 적고 첨부파일을 넣어 결재자를 선정한 후, 결재올리기 버튼을 눌렀다. 이제 끝났다, 라고 작게 말하며 아이들이 제출한 시험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교실에 누가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동환이었다. 평소 같으면 체육 시간에 제일 먼저 달려나가곤 했었는데 오늘은 자기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동환이 안 나가니? 시험 다 못 풀었어?”
“대충... 풀었는데 애들 있어서 못 냈어요. 창... 피해서...”
저런 이유가 있었구나. 그래도 나에게 말해주어 고맙다.
“가져와 봐. 동환아.”
잠시 망설이던 동환이가 시험지를 들고 나에게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곧 나의 손에 시험지를 넘겨 주었다. 대충 눈으로 훑어봐도 정답이 두 개 있을까 말까했다. 동환이는 풀이 죽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괜찮아. 그래도 열심히 풀려는 흔적이 많네. 저번보다 많이 발전했다. 남아서 공부하고 있는 게 아직 6학년 문제가 아니라서 그래. 조만간 더 많이 풀게 될거니까 기죽지마. 조금씩 나아지면 되는 거야.”
내가 말을 하면 할수록 동환이가 고개를 조금씩 들고 있는 게 보였다. 말을 마치자 동환이와 눈이 마주쳤다.
“알겠지?”
“네...”
“니가 제일 좋아하는 체육시간이잖아. 나가서 신나게 뛰다 와.”
나는 일어나 동환이의 등을 툭, 쳐주었다. 힘을 실어주는 느낌으로. 그러자 동환이가 쑥스럽게 웃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는 나에게 네, 라고 대답해 주었다.
“기죽지말고! 파이팅!”
문으로 걸어가고 있는 동환이에게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파이팅을 외쳐주었다.
“쌤. 쪽팔려요.”
동환이가 문을 닫으며 말했다. 닫히는 동안 씩,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저렇게 웃으면 되는 거지. 학교가 즐거운 게 최고가 아닐까. 그런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또 다시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네. 6학년 2반 나누립니다.”
“아, 나누리선생님. 교감입니다.”
“안녕하세요?”
내가 올린 결재가 이상이 있는 걸까? 나는 긴장되기 시작했다.
“결재 반려했습니다.”
“반... 려요?”
“결재하지않고 다시 돌려보냈다는 뜻입니다. 공문 작성이 규칙에 맞지 않아요. 거기 김부장이나 옆반 선생님한테 다시 물어보고 올리세요.”
“아, 네... 죄송합니다.”
전화는 곧 끊겼다. 다시 인터넷 창을 열어 확인해보니 반려라는 글씨 옆에 (1) 이라는 표시가 적혀 있었다. 진짜 반려 당한 게 맞네. 공문도 처음 올려보고, 반려도 처음 당해보고. 오늘 별 걸 다 해보는 구나. 물론 이게 앞으로 수많이 올려야 할 공문의 시작이겠지만. 나는 책상 위에 붙어 있는 6학년 전체 시간표를 확인해보았다. 금요일 3교시를 확인해보니 부장님도 수진쌤도 다 수업이 있었다. 다행이 이쌤만 전담시간이었다. 다행인건가? 아니면 행운인건가? 행운의 여신이 나를 도와주고 있나보다, 요즘. 나는 목을 가다듬고 이쌤 교실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뭐? 반려?”
“그래서 교감선생님께서 주변 선생님께 여쭤보라고... 그런데 다른 선생님들은 다 수업이셔서요.”
최대한 논리적으로 말했다. 당신이 좋아서 다이렉트로 전화한 게 아니고 이래 저래서 당신밖에 연락할 데가 없었어요, 라고 들릴 수 있도록.
“휴...”
수화기 저편에서 긴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이 반응은? 힘들다는 건가? 그동안 많이 도와줘서 지치긴 했을 것 같지만... 그래... 이쌤과 일해서 좋은 건 나지. 이쌤은 할 필요도 없는 걸 도와주는 거니까.
“죄송해요.”
진심으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까는 마냥 좋아서 전화했는데,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니 이쌤 마음도 이해가 갔다.
“죄송할 건 없고. 일단 갈게. 가서 좀 보자. 뭘 얼마나 엉망으로 했길래.”
전화가 끊기고 얼마되지 않아 이쌤이 앞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왔다.
“반려당한 공문 열어봐봐.”
이쌤이 말을 마치자 나는 공문을 찾아서 클릭해놓고 이쌤이 의자에 앉을 수 있게 자리를 옆으로 피해주었다.
“대박. 너 이렇게 제출한거야?”
이쌤이 놀랍다는 듯이 서 있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혼 안난게 다행이다. 무슨 배짱으로 이렇게 올렸어? 물어보지도 않고. 완전 다 틀렸잖아. 공문 제목부터 마지막까지. 그리고 마지막에 끝하고 점도 안 찍었네. 너, 여기 앉아봐.”
나는 갑자기 학생이라도 된 것 처럼 이쌤이 일어난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이쌤이 모니터를 보기 위해 근처로 다가왔다.
“이거 받은 공문 있지? 먼저 관련을 써야되니까 어디과에서 온 건지 찾아봐.”
나는 책상 위에 수북히 놓인 서류 더미들 속을 찾기 시작했다. 현대화 계획서 제출하라는 공문을 찾기 위해 서류 사이 사이를 뒤지고 또 뒤졌다.
“아직도 못 찾았어?”
“차, 찾았어요.”
간신히 찾아낸 공문을 이쌤에게 보여주자, 이쌤이 맨 뒷장 아랫부분을 손으로 가리키며 내 얼굴로 들이밀었다.
“여기 있잖아. 교육과-1135라고. 이걸 적어넣어. 관련쓰고 땡땡 찍고.”
나는 이쌤이 가르쳐주는 대로 자판에서 글자를 찾아 눌렀다. 이윽고 마지막 줄로 커서가 내려갔다.
“끝이라고 쓰고 점을 꼭 찍어야 돼.”
“아.”
나는 마지막으로 점까지 찍었다. 공문의 세계는 생각보다 복잡했다.
“나중에 익숙해지면 별거 아닌데 처음에는 낯설어서 그렇지. 첨부했어?”
“아.”
나는 첨부파일 버튼을 눌러 첨부할 계획서를 찾아 클릭했다. 그러자 공문이 완성 되었다.
“이제 결재 올리기만 하면 돼. 난 그럼 할 일이 있어서 간다.”
이쌤은 늘 그렇듯 금세 자기 교실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쉬웠지만 이렇게라도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그래.”
문이 닫히고, 나는 결재 올리기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모니터에 결재 상신이 완료되었다는 메시지가 떴다. 이번에는 반려당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결재창을 닫았다.
“오월밖에 안 됐는데 왜 이렇게 덥지?”
일을 일단락 짓자 갑자기 진이 빠진 상태가 되어 더위가 확 밀려들었다. 나는 헤집어져 있는 서류 한 묶음을 들어 부채 대용으로 쓰기 시작했다. 오월부터 이렇게 덥다면 진짜 여름은 어떻게 보내지? 벌써 얼마 되지 않은 대학교 시절이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공강이 있어서 중간 중간에 볼일을 볼 수도 있었고, 책임에도 지금보다는 자유롭던 시절.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유와 왠지모를 안전을 보장받는 것 같던 기분들이 느껴졌다. 일반 대학 친구들이 부러워하듯 대학 졸업 후 바로 안정된 직장을 얻었지만 그래서 그런지 적응이 쉽지는 않은 것 같다. 2월까지만 해도 대학생이었는데 3월부터 갑자기 선생님, 그리고 직장인이 되다니.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 올라가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세계로의 진입인 것 같다. 그래도 어려운 시기에 취업에 성공한 걸 감사하고,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음에 또 감사하자. 갑자기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 이것도 직업병인지 언제나 결론은 훈훈한 교훈적 마무리가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선생님을 다들 재미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어가는 거겠지?
“아, 더워~”
“오늘 재미없었어.”
“전동환 진짜 짜증나. 태클을 왜 걸어.”
“체육쌤 대박 웃기지 않았냐?”
복도 저 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아이들이 벌써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교실 앞 뒤 문이 동시에 열리고 우르르 땀을 한바가지씩 쏟고 있는 시뻘건 얼굴의 아이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한다. 갑자기 땀냄새와 열기가 한꺼번에 밀려 들어왔다. 나는 부채질의 속도를 높였다. 스물 다섯명의 열기가 합쳐지니 아까 혼자있을 때보다 훨씬 덥게 느껴졌다.
“쌤. 에어컨 들어주세요!”
“에어컨! 에어컨!”
아이들이 응원 구호를 외치듯 한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선생님도 틀어주고 싶어. 중앙에서 안 틀어주는 걸 어쩌니.”
진짜 마음같아서는 내 돈을 들여서라도 에어컨을 틀어주고 싶다.
“쌤. 그럼 아이스크림~”
어디선가 그런 말이 시작되자 아이들이 또 우르르 호응을 보내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 나가서 살 수 없잖아.”
“작년 쌤들도 다 배달시켜서 사줬어요.”
“어디서?”
내가 놀라자 아이들이 한 목소리로 학교 바로 앞에 있는 작은 슈퍼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다들 알고 있다니 거의 전통적인 행사였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
아이들이 더욱 더 목소리를 높였다.
“알았어, 알았어! 오늘 선생님이 쏠게.”
“와아~~~~”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모두가 환호성을 내질렀고 몇몇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방 뛰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 하나에 저렇게도 기쁠까. 또 갑자기 순진한 아이들이 더욱 더 사랑스러워졌다. 나는 석훈이가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어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주인 아저씨도 워낙 익숙해서 인지 바로 가져다 준다고 했다.
“사회 시간에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공부 열심히 하기다. 알았지?”
“네!”
요즘 들어 가장 큰 목소리로 아이들이 대답했다. 나는 그 절도있는 군인과도 같은 모습에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익숙치 않은 업무가 고될 때가 많고 수업도 상담도 힘들지만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것은 정말 행복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어린이날과 스승의 날이 있는 푸르른 오월이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