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오래 생각해 본 결론이 그렇더라.”
수진쌤은 자신의 잔에 소주를 한 잔 더 따랐고, 나는 대답대신 급하게 남은 술을 마셨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수진쌤도 빨리 마셔서 그런지 눈에 초점이 흐려지고 말이 꼬이기 시작했다.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휴대폰을 들어 시계를 바라본다. 7:01, 라고 번쩍거리는 불빛이 알려주었다. 말도 안돼. 이렇게 술에 취해버렸는데 7시라고? 다른 사람들은 한창 맨 정신일 시간이다. 갑자기 부끄럽게 느껴졌다. 이 시간에 술에 얼큰하게 취해 있는 상황도, 이쌤을 좋아하는 것도. 그리고 그것을 이 사람에게 들켜버린 것도. 여기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망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리쌤이랑 풀려고 이런 자리 마련한 거야. 동학년끼리 불편하면 일 년 진짜 힘들다? 그거 아직 모르지?”
수진쌤은 점원에게 술을 건네받아 나와 자신의 술잔에 다시 술을 따르려고 했다. 나는 그 술병을 빼앗아 이번엔 내가 수진쌤의 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어쭈? 언니가 따라주려고 그랬는데? 암튼 너 이정석 좋아하는 거 언니한테 다 들켰어.”
나의 얼굴에 손가락질을 마구 해대며 장난스럽게 말을 마친 수진쌤은 이번엔 쌈을 싸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 쌈을 내 입에 밀어 넣었다.
“나 이정석 안 좋아해. 나 저번에 소개팅한 사람이랑 썸 잘~ 타고 있다고. 그러니까 걱정 마. 마음 푹~~~~~~~ 놓으라고.”
그 말에 또 마음이 풀어지는 걸 보니 내가 진짜 어리긴 어린 것 같다. 이쌤을 좋아하는 것도 그걸 들킨것도 모자라 일터에서 같은 동료를 불편하게 만들다니. 그리고 심지어 불편함을 느낀 수진쌤이 이런 화해의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것만 보아도 내가 진 게 확실하다. 쓸데없는 싸움을 걸고 혼자 주저 앉은 꼴이다. 지금 내 꼴이.
“죄송해요. 수진쌤…”
쌈을 씹으며 괜히 눈물이 터져 나왔다. 간신히 입을 다물고 있는데 울음 소리가 엉엉,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누가 보면 얼마나 더러울까 싶어 손을 펴서 입을 막아보았다. 이쌤말대로 정말 가지가지 하고 있다. 나 정말… 민폐다, 싶다. 수진쌤이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와 나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요즘 혼자 좋아하고, 혼자 미워하고, 혼자 여러 일에 괴로워 하다보니 혼자 지쳐있었던 것 같다. 직장생활 1년차, 버거운 삶을 살고 있었던 것 같다. 이렇게 어리기만 한 데 아이들 앞에서도, 학부모 앞에서도, 동료 선생님들 앞에서도 어른 인척 선생님인 척 하는 것이 힘들었던 것 같다. 원하던 선생님이 되어 마냥 들떴던 3월을 지나 5월의 끝쯤에 다다르니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것처럼 너덜너덜해지고 있었다.
“알아. 나도 신규 때 그랬어. 힘들었지? 많이… 힘든데 어디다 말할 데도 없고… 그 마음 안다고. 그러니까 나한테 잘해. 언니가 들어줄게. 이런 편 하나 있어야 학교 생활이 즐거운 거라고. 솔직히 이정석이 뭐 도움이나 될 것 같아? 내가 훨~ 낫지.”
이제야 수진쌤 답다. 수진쌤의 장난에 금세 웃음이 났다.
“너 울다가 웃으면 어떻게 되는 지 알지? 그래도 이제야 나누리 같네. 그렇게 웃어. 막내가 맨날 씁쓸한 표정으로 돌아다니고 말이야… 그거 아주 혼날 일이었어… 자, 고기 더 먹어. 저번에 보니까 고기 좋아하던데.”
수진쌤이 내 접시에 고기를 덜어주었다. 그 말이,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나는 젓가락을 들어 고기를 와구와구 씹기 시작했다. 지금 흐르는 눈물인지 콧물인지도 함께 입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맥주가 더 맛있는 것 같단 말이야~”
수진쌤은 새빨걔진 얼굴로 고개를 계속 왔다갔다 하며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른손으로 턱을 괴었다. 그제야 수진쌤의 얼굴이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 수진쌤을 찍는 카메라 앵글이 마구 움직이는 걸 보니 내가 수진쌤마냥 얼굴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나보다. 이미 1차에서 많이 마셨는데 자리를 옮긴 이곳 맥주집에서도 금세 500cc가 비워졌다. 나는 앞에 놓인 접시에서 노가리를 하나 들어 고추장에 찍었다. 그리고는 술을 좀 깨기 위해 질겅질겅 씹기 시작했다.
“여기 맥주 500cc 하나씩 더 주세요~”
수진쌤이 손을 들어 점원을 불렀다. 오늘 수진쌤 정말 많이 마시는 것 같다. 덩달아 나도 내 주량을 경신하고 있다. 점원은 곧 우리 앞에 시원한 맥주가 가득담긴 잔 두 개를 올려두었다.
“수리시스터즈 된 기념으로 다시 짠~”
수진쌤이 해맑게 웃으며 잔을 들어올렸다.
“언니 짠~”
언니라는 말이 나오는 걸 보니 내가 제정신은 아니구나 싶다. 그렇지만 뭐 어떠랴. 여긴 일터도 아니고, 당장 급한 일들은 모두 끝났고, 기분이 이렇게 좋은 걸. 오랜만에 알딸딸하게 그리고 몽롱하게 기분이 날아오른다.
“잠깐만. 나 썸남한테 전화 왔다~ 여보세요?”
한껏 목소리톤이 높아진 수진쌤은 전화를 받기 위해 휘청거리며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수진쌤이 말했던 소개팅남이구나. 1차에서 수진쌤은 이번 소개팅의 에피소드를 줄줄 이야기해주었다. 오랜만에 이야기가 잘 통하는 상대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수진쌤의 연애가 시작되기를 응원해주었다. 그랬더니 수진쌤도 나의 짝사랑를 응원해주었다. 이미 들켰겠다, 술도 거나하게 취했겠다 생각한 나는 수진쌤에게 잘도 나의 짝사랑기를 털어놓았다. 내일 아침이 되면 분명 후회하겠지? 적당하게 좋아한다는 말만 하고 뺐어야 하는 거 아니었을까? 아직 어려서 감정 조절이 잘 안되는지 쉽게 사람에게 속내를 털어놓고 만다. 수진쌤이 사라진 휑한 의자를 바라보며 나는 두 번째 노가리에 손을 뻗었다. 이를 움직이니 술이 조금 깨는 것 같다. 이제 속도를 줄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마셔대다가는 내일 수업에 지장을 줄 게 분명하니까.
“그만 좀 마시지?”
갑자기 수진쌤 의자에 수진쌤이 아닌 사람이 앉았다. 이건 뭐야? 흐릿해지는 시야를 밝게 하기위해 눈을 깜빡이며 앞을 바라보았다. 순간 절로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술이 확 깼다.
“열시밖에 안됐는데 이 상태면 도대체 얼마를 마신거야?”
트레이닝복에 야구모자를 눌러 쓴 이쌤이 나를 빤히 바라보며 말하고 있다. 이건 꿈인가?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있지? 나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아 이런 꼴로 마주치는 건 아닌데… 그렇지만 한 켠에서 반가운 마음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아, 정말 나도 내 마음을 도대체 모르겠다.
“이, 이쌤이… 왜, 왜… 여기에?”
너무 놀라서 그런지 말도 잘 안 나왔다.
“뭐야. 말을 그렇게 더듬을 정도로 마셨어? 얼굴만 봐도 얼마나 마셨는지 나오긴 한다… 내가 어떻게 알고 여기 왜 왔겠냐? 오수진 때문이지. 친구랑 오랜만에 만나서 술 한잔 하고 있었는데 동학년 회식에 참여를 안한다고 어찌나 카톡질을 해대시는지… 귀찮아서 왔다… 아, 여기 맥주 한 잔 주세요.”
나에게 말을 하던 이쌤은 갑자기 소리를 높여 점원을 불렀다. 점원이 네, 하는 소리와 동시에 이쌤은 내 앞에 놓인 접시에서 노가리를 집어 씹기 시작했다.
“안주가 이게 뭐야? 오수진이 이런 거 밖에 안 사줘?”
나는 여전히 말이 안 나와서 멍하니 이쌤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을 하면 아까처럼 당황하거나 더듬을 것만 같아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사이 수진쌤이 등장했다. 마치 구세주 같이 느껴졌다.
“오~ 이정석! 생각 보다 일찍 왔네?”
수진쌤이 내 옆에 앉으며 신호를 보내듯 내 등을 툭치고는 윙크를 했다. 그제야 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수진쌤이 나를 위해서 이쌤을 부른 거라는 것을.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이런 몰골일 때 부르는 건 별로에요, 해야 하는 걸까. 확실히는 알 수 없었지만 시선이 계속 이쌤에게 향하고 있는 걸 보니 고마워해야 할 것 같다. 이쌤이 수진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는데 그쪽만 반사판을 댄 듯 환하고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내가 술을 많이 먹긴 많이 먹었구나.
“나 왔으니까 이제 제대로 마셔야지. 건배!”
이쌤이 도착한 맥주잔을 높이 들어올렸다. 수진쌤과 나도 술잔을 들어 건배를 했다. 그리고는 또 다시 술을 넘겼다. 이제 내 앞에 모든 것이 뿌옇게 보이고, 소리가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띠리리리링! 띠리리링!”
요란하게 울려대는 휴대폰 알람을 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건배 장면에서 이 장면으로 바로 이어지는 거지?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니 내 집이었다.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뭔가 아쉽기도 했다. 잠을 깨기위해 손을 들어서 눈 주변을 문질렀다. 그런데 검은 화장품이 손등에 묻어났다. 아, 나 화장도 안 지우고 잔 거야? 아, 속도 너무 안 좋아… 금방이라도 게워낼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냉장고 문을 열고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이제야 정신이 좀 드는 것 같다. 화장실로 걸어가 잔뜩 참았던 소변을 보며 양치를 시작했다. 그리고는 물을 내리고 클렌징 오일을 집어 화장솜에 묻혔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판다나 다름없었다. 축축하게 젖은 화장솜으로 번진 화장을 지워내고 클렌징폼을 손바닥에 짰다.
그런데 어떻게 집에 왔지?
손바닥을 비벼 거품을 만들며 어제의 기억을 주섬주섬 찾기 시작했다.
수진쌤이 이쌤을 불러서 이쌤이 왔고… 맥주 한 잔을 더 시켜서 건배를 하다가… 다 같이 나와서…
잔뜩 만들어진 거품을 얼굴에 문지르며 생각을 이어갔다.
수진쌤이 이쌤보고 나를 데려다 주라고 했고… 우리 둘이 걸어왔…
그래도 생각이 나긴 나는구나. 다행이다.
‘나 선생님 좋아해요.’
갑자기 떠오른 내 목소리. 이거 뭐지? 너무 놀란 나머지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아 따가… 따가워!”
지금 급한 건 눈이다, 눈. 나는 얼른 물을 틀어 얼굴에 묻은 거품들을 씻기 시작했다.
설마… 진짜 말도 안 돼…
씻는 동안에 미쳤어, 미쳤어, 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이미 조각날 데로 조각난 기억들은 아무리 짜 맞추어봐도 완벽한 하나의 그림이 되지 못했다. 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화장수를 꺼내 얼굴에 문지르기 시작했다. 다시 생각해보자… 노력해 보자.
우리 아파트 근처까지 걸어왔고…
‘우웩!’
소리와 함께 영상이 떠올랐다. 눈앞에 보이는 아파트 담벼락과 토사물…
아, 나 또 토한 거야?
나는 크림을 바르다 말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창피해… 진짜 창피해… 어쩌려고 그러니 나누리.
플레이 버튼도 누르지 않았는데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또 영상이 재생됐다.
이번엔 땅이 솟아 오르는 광경.
‘괜찮아? 나누리?’
이쌤이 나를 부축하는 모습.
나 넘어졌었나? 얼른 무릎을 보니 시뻘겋게 까져 있는 살이 눈에 들어왔다.
아… 진짜 가지가지 한다. 토하고, 넘어지고?
‘선생님 좋아한다니까요!’
또 다시 재생된 소리. 그러나 영상은 재생되지 않았다. 내 목소리만 메아리 칠 뿐.
“아악~~~~~~~~~~~~~~~~~”
나는 이불에 엎어져 마구 발길질을 해댔다. 이게 소위 말하는 이불킥이구나. 이불킥을 내가 할 줄이야! 그러다 벌떡 일어나서 침대에 걸터 앉았다. 찬찬히 생각을 해보자. 나누리. 일단 심호흡 좀 하고…
“후~~~~~~~~~~~~”
긴 숨을 연속해서 내뱉었다.
‘좋아해요.’
‘좋아한다니까요!’
소리만 계속 머릿 속을 맴돈다. 이것은 그를 보면서 품었던 나의 마음의 소리일까. 아니면 진짜 입 밖으로 꺼낸 소리일까. 나는 조각난 기억을 찾아내려 무지 애를 썼다. 그러나 끝내 소리 아닌 영상은 재생되지 않았다.
“그래. 아닐 거야! 그 말을 들은 이쌤 얼굴이 떠오르지 않잖아? 아닐 거야. 내가 생각한 걸 거야.”
좋게 생각해보려 마음 속의 기억을 왜곡시키기 시작했다.
“띠리리리링! 띠리리링!”
그 때 다시 울리는 알람소리. 이 것은 평소에 집을 나갈 시간에 맞춰 저장해 놓은 알람이었다.
“꺄악~~~~~~~~~~~~ 벌써 8시야?”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입던 옷은 마구 침대 위에 던져 놓고 화장대로 달려가 미친 듯이 BB크림을 발랐다. 오늘은 아무래도 눈썹만 그리고 출근해야할 것 같다. 그런데 오늘따라 마음대로 그려지지 않는다.
“아, 바빠죽겠는데… 왜 자꾸 짝짝이냐!”
비뚤어진 한 쪽 눈썹을 얼른 지우고 재빨리 그린다. 그래 됐어, 대충 그리고 나가자. 가방에 휴대폰을 던져 넣고 가방을 들고 집을 나온다.
“아, 불!”
신발을 다시 벗어 던지고 켜져 있는 전등을 다 껐다. 그리고는 다시 신발을 신고 집을 뛰쳐 나왔다.
학교로 달리면서 생각을 마무리 지었다. 일단 고백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쌤과 마주쳐보자. 이쌤이 아무렇지 않게 대하면 고백한 건 확실히 아니다. 그런 가설을 세워두었다. 드디어 교문이 보인다. 눈썹을 휘날리게 달리던 속도를 줄여 교문을 통과했다. 운동장 앞에 세워져있는 큰 시계를 보니 8시 20분이었다. 다행히 늦지는 않았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현관을 통과해 신발장으로 걸어들어갔다.
“어? 누리쌤! 좋은 아침!”
신발을 갈아신던 수진쌤이 나를 보고 인사를 건넸다. 오늘도 원피스를 입고 화장을 곱게 한 수진쌤을 보며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박… 어떻게 똑같이 마셨는데 오늘 한 사람은 여전히 아름답고… 나는… 거지꼴일 수가 있냐… 절로 기가 꺾인다. 저 사람과 사랑의 라이벌이었다면 이쯤에서 마음을 접었어야 할 것이다.
“안녕하세요?”
고개를 숙이고 다시 드는 동시에 수진쌤 뒤에 서 있는 이쌤과 눈이 마주쳤다.
악!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한 입을 간신히 틀어막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잘 잤어? 어제 토하고 넘어진 건 괜찮고?”
이쌤이 웃으면서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신발을 갈아신고 있던 다른 학년 선생님들이 모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 쌤! 괜... 괜찮아요.”
나는 조금이라도 얼굴을 가린 채 서둘러 신발을 갈아 신고 수진쌤과 이쌤과 함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앞서 걸어가던 이쌤은 뒤에서 따라 올라가고 있는 수진쌤과 나를 번갈아 보며 입을 열었다.
“얘 완전 웃겨. 볼 때마다 일을 치고... 아무튼 버라이어티 하다니까? 어제도 가는 길에...”
가는 길에? 가는 길에 뭐... 설마 고백했다는 건 아니지?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갔다. 제발... 제발...
“뭔데?”
수진쌤이 말을 재촉했다.
“토하고 넘어지고 장난 아니었다니까? 아, 진짜 버라이어티한 막내야.”
이쌤이 웃으며 말했다. 수진쌤도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저렇게 말을 마친 걸 보면 고백한 건 아니겠지?
“귀엽고 좋은데 뭘.”
풀 죽어있는 나를 눈치챘는지 수진쌤이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
“아, 안녕하세요?”
갑자기 걸음을 멈춘 이쌤이 인사를 하는 쪽을 보니 교장선생님이 서 있었다. 나와 수진쌤도 얼어붙은 채 인사를 했다. 교장선생님도 고개를 잠깐 숙여 인사를 하고는 교장실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갔다.
“도통 표정이 없으셔서... 우리 늦었냐? 아직 안 늦었지?”
수진쌤이 나를 향해 속삭였다.
“몰라. 나 어제 결재 올린 거 맘에 안 드셨나? 반려 당한 거 아냐?”
서둘러 걸음을 옮기며 이쌤이 입을 열었다. 다들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
“아, 어쨌든 찝찝해.” “찝찝해...”
신기하게 찝찝해, 라는 말이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튀어나왔다. 그리고 둘은 서로 마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찌찌뽕!”
수진쌤이 앞서 걸어나가며 말했고, 이쌤은 내가 먼저 하려고 했다며 수진쌤을 향해 빠른 걸음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뒤처져 걷던 나는 생각했다.
진짜 찝찝한 건 나라고. 나.
점심을 먹으면서도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했다. 고백한 게 맞을까? 아냐, 아닐거야. 혹시 맞으면 어떡하지?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 듯 오늘 하루 종일 같은 생각만 하고 있다.
“쌤~ 다 먹었어요!”
“어? 석훈이 잘했네. 오늘 도장 한 개 더 찍어줄게.”
지금은 급식지도를 하는 시간이다. 정신을 차리고 석훈이에게 교사다운 멘트를 했다.
“아싸!”
나에게 검사를 받은 석훈이가 기뻐하며 급식판을 들고 자리를 떴다. 아닐거야. 아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쯤되면 교사와 서툰 여자 사이의 역할 갈등이다. 교사로서 앉아 있는 시간에 본연의 나누리가 마구 튀어 나온다.
“선생님 뭐하세요?”
옆에 앉아 있던 종호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아, 아냐. 아무것도.”
순간 얼굴이 화끈거린 나는 교사답게 급식을 먹고 지도하는 것에 몰두하기로 했다. 그때 내 앞에 세정이가 검사를 받기 위해 급식판을 들고 다가왔다.
“응. 잘 먹었네. 가도 좋아.”
내가 말을 마치자 세정이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서 잔반 처리하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또 나누리가 되고 만다. 오늘 아침부터 이쌤의 모습을 생각해본다. 평소와 다름없게 나를 대하고 있는 모습으로 봤을 때 분명히 내가 고백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니겠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아냐. 아니야. 확실해. 나는 건너편에 앉아서 급식 지도를 하는 이쌤의 얼굴을 힐끔 바라보았다. 이쌤은 나의 시선을 눈치 채지 못한 채 열심히 급식 지도를 하고 있었다. 저것 봐.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생활하는 걸 보면 내가 고백하지 않은 게 분명해. 확실해! 이제 생각 그만하자. 확실히 아닌 걸로 마무리! 나도 모르게 숟가락을 테이블에 탁, 소리나게 올렸다.
“아, 깜짝이야.”
여전히 내 옆에 앉아서 친구와 장난을 치면서 급식을 먹던 종호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종호 옆에 앉아 있는 건우도 함께 나를 쳐다보고 있다.
“아, 미안. 선생님 소리가 너무 컸지?”
나는 애써 하하하,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먼저 올라가니까 지금부터는 반장한테 검사 받고 가.”
나는 아직 급식을 먹고 있는 세 명의 아이들에게 당부를 해두었다.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네, 라고 대답하는 모습을 확인 한 뒤 급식판을 들고 정리하는 곳으로 향했다. 급식판을 정리하고 옆에 있는 컵을 하나 집어 물을 받아 마셨다. 그리고는 컵을 다시 정리하고 급식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5교시 시작하기 전에 화장실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급식실 앞에 있는 화장실로 걸어가 문을 열자 손을 씻고 있는 수진쌤이 보였다.
“쌤. 점심 잘 드셨어요?”
“응. 누리쌤도?”
“쌤. 저 어제 혹시... 실수 한 거 없었죠?”
나는 수진쌤 옆으로 걸어가 조심히 말문을 열었다.
“없어... 나야 말로. 너무 기분이 업 되가지고는 물어보지도 않고 이정석 불러서 미안했어... 그치만 우리 즐겁게 잘 놀았잖아? 나도 그렇고 누리쌤도 그렇고 실수한 거 없으니 걱정하지마.”
“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나 먼저 올라갈게.”
수진쌤의 말에 내가 네, 하고 대답하자 수진쌤이 손을 흔들며 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화장실 칸으로 들어갔다.
화장실에서 나와 계단을 오르는데 교장실 문을 열고 나오던 교장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러자 교장선생님이 나를 보고 입을 열었다.
“아, 나누리 선생님. 잠깐 내 방으로 들어오지.”
교장선생님이 말을 마치고는 교장실로 다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적이 지금까지 없었기 때문에 긴장이 된 나는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조심히 교장실로 들어갔다.
“거기 앉아요.”
교장선생님이 가리킨 의자에 앉자 교장선생님도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잠깐 방송업무를 맡은 건데 이런 일을 줘서 미안하게 생각해요. 그렇지만 지금이 신청 기간이라... 알다시피 우리학교 방송실이 다른 학교에 비해 낡았어요. 디지털 방송실을 만드는 것이 나의 목표 중에 하나라 그걸 신청했으면 하는데...”
지금 교장선생님이 뭐라고 말하고 있는 건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외계어를 잔뜩 듣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저 멍하니 교장선생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방송실 현대화 관련해서 계획서를 하나 올려줘요.”
방송실 현대화는 무슨 말인가. 아까 말한 디지털이랑 관련이 있는 건가? 계획서가 뭐지? 한번도 써보지는 않았지만 들어보기는 했던 공문이라는 걸 써야 되는 건가? 머릿속에서 영어 듣기평가를 하는 것처럼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온갖 해석과 추측이 난무하고 있었다.
“계획서를 잘 써서 사업을 따온다고 해도 아마 나누리 선생님이 맡고 있는 동안에는 공사가 진행되지는 않을 거니까 너무 부담가지지는 말고. 그냥 계획서 하나만 결재 올리라는 겁니다.”
“아... 네...”
이 시점에는 뭐라고 대답을 해야할 것 같아서 일단 네, 라고 말을 뱉었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내가 네, 라고 대답해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맞을까? 어차피 내 대답과 관계없이 내가 해야하는 일이겠지만. 머릿 속에서 이런 저런 생각들이 한꺼번에 꽃을 피우고 있을 때 교장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문이 열리고 교무부장님이 얼굴을 들이 밀었다.
“아, 이야기 중이셨으면 좀 이따가 오겠습니다.”
“아냐. 다 끝났어. 그럼 나가보세요.”
“아, 네.”
교장선생님의 말에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들어오는 교무부장님과 교차해서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이 외계어 총출동인 업무를 어떻게 처리해야 되는 거지? 이제 학년 업무가 조금 덜 바빠지는 찰나에 새로운 일이 등장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회만 잘 끝내면 될 줄 알았더니만... 나는 계단을 올라 6학년 연구실로 향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던 수진쌤이 나에게 말했다.
“아, 교장선생님이 보자고 하셔가지고.”
말을 마친 나는 칫솔과 치약을 꺼내 칫솔에 치약을 짜고는 양치질을 시작했다.
“왜? 무슨 일로? 설마 혼나거나 한 건 아니지?”
수진쌤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잔뜩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 방송실 디지털이라나 현대화라나... 이런 계획서 하나 올리라고...”
수진쌤을 바라보며 열심히 칫솔질을 하던 나는 웅얼거리는 소리로 간신히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을 마쳤다.
“헐.”
수진쌤이 외마디 소리를 내뱉고는 이쌤을 넋나간 듯 바라보았다.
“큰 거 하나 떨어졌네.”
그러자 이쌤이 종이컵에 뜨거운 물을 부으며 입을 열었다.
“네?”
나는 쌤들한테 조금이라도 업무 관련 이야기를 듣기 위해 서둘러 입을 헹구기 시작했다.
“어려운 일이에요?”
티슈통에서 티슈를 한 장 뽑아 입을 닦으며 소파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수진쌤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일단 교장선생님이 한 말 다시 해 봐.”
수진쌤의 말에 나는 교장실에서 있었던 일을 토씨하나 빠뜨리지 않고 두 사람에게 전달해 주었다.
“계획서를 써내서 돈을 따와야 한다는 거네. 그럼.”
종이컵에 든 차를 후후, 불어 마시며 이쌤이 내가 앉은 곳으로 다가왔다.
“그러네... 엇! 야. 우리 가야겠다. 5교시 시작시간이야.”
시계를 본 수진쌤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 연구실 문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 이쌤이 걸어갔고, 나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참.” 수진쌤이 문을 열다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바람에 이쌤은 수진쌤과 부딪힐 뻔한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고 자리에 우뚝 섰다. 나도 걸어가다말고 수진쌤을 바라보았다.
“계획서 이런 거 이정석이 잘 써. 이렇게 말하면 못하는 거 하나 없는 엘리트 교사 같지만... 사실이야. 이정석. 잘 도와줘라.”
수진쌤이 나를 보며 말하다 이쌤의 등을 툭 치며 나에게 떠미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는 수진쌤은 서둘러 문을 닫고 나갔다. 수진쌤은 나를 생각해준 거겠지만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나는 뭐라고 말을 하지도 못한 채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리고 이쌤도 황당했는지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이 상황에서 뭐라고 말을 해야 되지? 괜찮습니다, 라고 해야하나. 아니면 수진쌤이 준 기회를 덥썩 잡아야 하나. 머릿 속이 복잡했다. 물론 이쌤을 좋아하니까 조금이라도 같이 일을 하는 기회가 당연히 좋지만, 지금은 발등에 떨어진 업무 해결이라는 불이 더 급했다. 도와주세요, 라고 해야 맞는 거겠지? 생각의 끝에 결론에 도달할 즈음, 이쌤이 종이컵에 든 남은 차를 싱크대에 따라 버리고는 종이컵을 싱크대 옆에 내려놓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아, 저... 저는...”
괜히 스스로 발이 저린 내가 웅얼거리며 말을 시작했다. 말을 시작하면서도 무슨 말을 이어가야할지 도통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일단 근처 학교에서 전화해서 방송실 디지털 되었는지 확인해보고, 관련 계획서 있으면 참고용으로 여러 개 받아 놔.”
이쌤은 빠르지만 정확하게 말을 전달하고는 금세 연구실 문을 열고 나갔다.
이건 지금 도와준다는 거? 나도 모르게 미소가 씨익, 지어졌다. 막막했던 찰나에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살았다, 싶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을 닫은 이쌤이 다시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아, 깜짝이야.”
생각지도 못한 등장에 놀란 나는 커다랗게 뜬 눈으로 이쌤을 쳐다보았다.
“다 도와준다는 건 아니야. 팁만 알려줄거야.”
이쌤이 두 번째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가리키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나는 나도 모르게 계속 짓고 있던 미소를 서둘러 없애고 결연한 의지를 보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지금은 일단 짝사랑하는 여자의 입장이 아니라 일을 배우는 신규교사의 자세로 돌아가야 할 때다.
“그리고 이걸로 밥 두 번 얻어먹을 거야.”
내 대답을 들은 이쌤은 다시 등을 돌려 문을 빠져나가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쌤이 말을 마침과 동시에 연구실 문이 닫혔다.
“감...사합니다.”
뒤늦게 입을 빠져나온 인사는 이미 닫혀진 문에 부딪혀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문 밖의 이쌤은 아마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감사합니다, 라는 인사는 무엇에 대한 감사인사지? 일을 도와줘서 고맙다는 걸까. 아니면 밥을 두 번 같이 먹을 수 있게 되어 감사합니다, 라는 걸까. 어쨌든, 무엇이든! 다, 감사합니다. 나는 함박 웃음을 지으며 하늘에 두 손을 모으고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 늦었다. 얼른 가자.”
지금은 좋아할 때가 아니다. 수업하러 가야할 때다. 꼴찌로 연구실에 남아있던 나도 서둘러 연구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