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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포레relifore Sep 15. 2021

전원주택에서 출퇴근을 한다는 건

바쁘게 달린 하루의 터닝포인트가 되어주는 길


어쩌다, 무작정 전원주택으로 왔습니다.


보통 전원주택지를 선정하실  출퇴근 거리중요하게 고려해야하는 요소 중에 하나로 꼽으실테지만, 저는 하나도 고려를 하지 않았어요.

이전 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오로지 아이의 건강을 염두해두고 선택한 집이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다행이도 우회도로와 고속도로 근처에 위치한 집이었습니다.


저희집 근처에 어떤 IC가 있는 지도 모르고 집을 매매했는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출퇴근 길이었습니다. 사실 어떤 날은 매우 만족하는 출퇴근길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전원주택에서의 출퇴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출근은 보통 마음이 급하죠. 빠르게 가야할 땐 고속도로를 이용합니다. 이사와서보니 저희집에서 5분 거리에 IC가 있더군요. 직장도 다행이 IC 근처라 고속도로가 출퇴근할 때 가장 빠른 길입니다.


바쁘게 집으로 돌아가야하는 퇴근길이 아니라면 보통은 우회도로를 이용합니다.

고속도로 만큼은 아니지만 신호가 없어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우회도로를 타고 근교로 나가서, 다시 일반 도로로 그러다 어느 사거리부터는 시골길을 만나게 되죠.

그런데,

딱, 그 부분이 하루의 터닝포인트가 됩니다.


갑갑한 도시에서 벗어난 한적한 시골길.

여기부터는 제대로 숨쉴 수 있다고 알려주는 길이예요.


에어컨을 끄고, 창을 내리면 공기부터 달라요. 나무와 흙내음이 함께 어우러진 보약과도 같은 공기가 마구 흘러들어옵니다.

차도 거의 없는 도로라, 일단 문을 열어도 다른 차 소리나 소음이 들리지 않습니다.

이사 와서 알게되었는데 이 길에서 자전거를 많이들 타시더라고요. 자전거가 앞에 있을 때도, 뒤를 따라올 때도 있어요. 자동차를 위한 길이라기 보다는 자전거를 위한 길인듯 느껴질 때가 많아요. 그래서 저도 그들처럼 바람을 느끼며 운전을 하게 됩니다.


봄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가을에는 그 자리에 코스모스 길이 펼쳐집니다.


이 시기에 남들은 일부러 시간내서 오는 드라이브 길일텐데, 저는 거의 일상으로 보는 꽃길입니다.

급할 것 없는 퇴근길에 마음을 놓고, 눈호강을 하며 운전을 해요.



전원주택에 살게 된 이후, 어느 정도 출퇴근을 하다 느낀 점이 있어요.

저도 모르게 도시로 진입하면 더 빨리 가려고 하더군요.

‘저 신호를 받을 수 있을까?’

‘신호 끊기기 전에 얼른 가자.’

지지부진하게 가는 차가 있으면 끼어들기도 하고 말이죠.

바쁜 출근길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달리고 있더라고요.

옆의 차도, 뒤의 차도, 앞의 차도 다 그런 식으로 지나가니까 어느덧 저도 모르게 그런 운전들에 익숙해져 버린 것 같아요.

초록색 불이 켜졌는데 조금만 늦게 출발하면 바로 경고음을 울려대는 뒷 차들. 그런 차들의 눈치를 보며 신호등이 바뀌자마자 쏜살같이 그 자리를 떠나버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린 그 터닝포인트가 되는 지점에 다다르면, 갑옷을 입은 것 같은 저의 운전도 무장해제가 되더라고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죠.

천천히 가는 차가 있으면 천천히 뒤를 따라 달리고,

자전거가 있으면 조심스럽게 피해 달리고,

노래에 귀를 기울이며,

잎이 돋아나는 나무, 꽃이 피어나는 가지, 단풍이 드는 나무, 살랑살랑 흔들리는 코스모스, 그리고 조용히 눈이 쌓이는 논밭의 풍경들… 이런 자연의 변화들을 눈으로 담으며 운전하고 있더라고요.

여기에는 저를 이렇게, 저렇게 채근하는 다른 차들이 없으니까요. 눈치를 볼 필요없이 나만의 속도로 달리면 됩니다.


내 속도가 뭔지 알게되는 길입니다.


그래, 이정도면 충분하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빨리 달려봤자 5분 차이인데,

그동안 뭘 그렇게 아등바등 달렸나.


천천히 달려야만 보이고, 느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

살랑이는 바람, 숲내음이 느껴지는 공기, 흔들리는 꽃잎.

그리고 나.


그제서야 내 생각을 합니다.

일터에서는 나는 없으니까요. 해야할 일을 체크하고, 앞으로 올 일들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일로 평가를 받습니다. 놓친 일이 있으면 질타를 받기도 하고요.

이 터닝포인트의 길 위에서는 진짜 내 생각을 합니다. 비가 와서 흙냄새 나는 공기가 참 좋네, 집에 가서는 뭘 먹을까, 뭐 그런 생각들이요. 별 거 아니고, 하찮을 수도 있지만 진짜 내 삶에 대한 생각 말이예요.


물론, 가끔은 그저 멍하니 풍경에 취해서 차를 움직이기만 해도 참 좋은 길입니다.





노인보호구역이라고 쓰여있는 도로를 본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늘 어린이보호구역이라고 써 있는 도로 근처에서만 살았거든요. 그런데 이사온 저희집 근처 도로에는 온통 노인보호구역이라고만 적혀 있더라고요.


아이들이 많이 살던 세상을 떠나 노인들이 많이 사는 곳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어린이보호구역에만 익숙했어서, 노인보호구역이라고 쓰인 도로 위 글씨가 한동안 참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세상엔 여러가지 삶이 있구나, 이미 알던 지식이었지만, 이곳으로 이사오고 나서야 진짜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각각의 사는 모습이 다른 것 처럼,

인생의 속도도 각각 다릅니다.

어떤 속도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지도 다 다르죠.


그래서 정해진 시간안에 골인하지 않아도 되는, 남의 눈치를 보거나 남과의 비교 없이 오로지 내 속도로 운전을 할 수 있는 제 퇴근길이 참 소중해요.


그 시골길에 이제 코스모스가 피기 시작했습니다.


봄의 벚꽃 퇴근길을 그렇게 즐겼듯이,

가을의 코스모스 퇴근 길을,

느긋하게,

저만의 속도로 드라이브 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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