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 살고 있을 때였다. 딸 집에 놀러 온 60대 후반 엄마는 탁월한 친화력과 화려한 바디랭귀지 스킬로 옆집, 건넛집, 뒷집에 살고 있는 이웃들과 일찌감치 인사를 텄다. 사건 당일은햇볕이 찬란하게 비추던 한 여름날이었다. 뒷마당에 심어놓은 상추를 뜯으러 나갔던 엄마가 혼비백산하여 거실로 뛰어 들어왔다. 얼굴도 하얗게 질려 있었다. 놀란 엄마가 두서없이 했던 이야기를 재구성해본다.
햇빛 쨍쨍한 여름날이면, 뒷집 몸짱 할아버지는 손바닥 만한 삼각 수영팬티만 입고 2층 테라스에서 선탠을 즐기곤 했다. 그날 역시 수영복 차림으로 햇볕을 쬐다가마당에 나온 엄마를 본 것이었다. 반가운 마음이었겠지? "Hallo."(안녕하세요.) 할아버지는 벌떡 일어나서 엄마를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를 환하게 했다.
"Hallo." 소리에 엄마는 이목구비를 활짝 개방할 준비를 끝내고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봤다. 아래에서 위로 고개를 든엄마의 시선은 할아버지 삼각 수영팬티의 그곳에 정확히 꽂혔다. 하필 그곳을 쳐다봤다는 당혹감과 민망함에 엄마는 몹시 허둥대며 집안으로 뛰어 들어온 거였다. 엄마는 눈에 보이는 그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보지 않는다. 그런 엄마의 눈에 비친 할아버지모습은 '60금'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몹시 야하고 야릇했나 보다.지금까지도 엄마는 '삼각팬티 할배' 흉을 본다. 할아버지는 인사를 했을 뿐이었는데...
며칠 후, 마당에 풀을 뽑으러 나갔던 엄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들어왔다.
"아이고. 독일은 참말로 희한한 나라네."
옆집 할머니가 수영복을 입고 잔디를 깎고 있다고 했다. 사실 나도 그 모습을 처음 봤을 때움찔 놀라긴 했었다. 옆집 할머니도 여름날 쏟아지는 햇볕을 단 한 줌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 거다.
이래저래 유교 할매 눈에는 문화 충격이었나 보다.
독일의 가을과 겨울은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이 대부분이다. 축축하고 눅눅하다. 집안 곳곳에는 곰팡이가 많이 피기 때문에 환기에 신경을 바짝 써야 한다.어두운두 계절을 보내고 나면 그래도 조금은 해가 나오는 봄이 온다. 그리고 마침내 맞이하는 여름은 밤 10시, 11시까지 환하고, 햇볕은 풍부하다. 독일 사람들은 눈부시게 내리쬐는 여름 햇볕을 즐기려 한다. 공원이나 집 마당에 누워서 일 년 치 햇볕을 온몸에 저장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독일에 사는 동안 햇볕 저장 강박증이 나에게도 생겼다. 여름이 오면 장롱 안에 있던 이불과 옷 등을 다 꺼내서 마당에 널었다. 햇살을 머금고 뽀송뽀송해진 이불과 옷의 촉감이 좋았다. 나도 그 옆에 누워서 쏟아지는 햇볕으로 샤워를 했다.
그런 날은 해외살이에서 겪는 소소한 설움들이 다 시시해 보였다. 다른 고객들에게는 친절하지만 내 인사는 씹는 그 슈퍼 캐셔의 거만하고 얄미운 눈빛도, 어눌한 내 독일어에 노골적으로 짜증을 내던 빵가게 아줌마의 행동도 웃으면서 반사해 버릴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귀국 후, 계절에 상관없이 쏟아지는한국 햇볕 덕에 저장 강박증은 사라졌지만 햇볕 좋은 날은 그냥 나가서 걷는다. 반짝반짝 비치는 햇빛을 보고 있으면, 내가 이고 지고 있는 불안이나 걱정들이 그 순간만큼은 하찮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뒷집 몸짱 할아버지와 옆집 할머니는 올여름에도 수영복 패션으로 일 년 치 햇볕을 몸과 마음에 풍족하게 저장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