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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은 Jul 24. 2024

종이책_무대에 서다

책의 쓸모에 대해

무대 디자인 의뢰가 들어왔다. 어쩌면 부탁이라는 말이 맞을지 모르겠다. 지인이 실비정도의 비용을 제시했다. 돈이 많으면 더 멋지게 할 수 있겠지만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효율을 내는 디자인을 하면 되지'라고 생각하고 부탁을 수락했다.


어느 싱어송라이터의 연말 자선 콘서트였다. 기존 카페에서 진행되는 콘서트는 무대가 따로 없었다. 카페였기 때문에 무대와 객석을 구분 짓는 장치가 필요했다. 하지만 영업 중인 카페였고 커다란 설치물은 서로에게 부담이었다. 무대의 설치와 철거는 혼자 할 수 있는 노동이 여야 했다. 인건비가 제일 비싸기 때문이다.


무대디자인을 고민하면서 내가 생각했던 건

첫째, 재활용(재사용) 재료

둘째, 핸드케리 가능한 사이즈와 무게

셋째, 무대 이후 쓰레기가 최소로 나오는 것


어쩌면 나의 모든 가이드는 비용 절약이었다. 재료는 새로 구입하지 않아야 하고 이동시 트럭을 빌리지 않아야 하며 공연 이후 쓰레기봉투 한 장 정도 사용할 생각이다.



요즘 나의 친환경 생활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잘 사용하고 잘 사용하지 않은 잉여 물건들은 새로운 쓸모를 찾아가도록 노력한다. '친환경'의 반대말은 '소비'라는 생각으로 새것을 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물론 나도 종종(또는 꽤 자주) 소비의 꼬임에 넘어간다. 특히 재화가 넘쳐나는 한국에서는 소비(물건을 사는 행위)를 하지 않는 생활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노력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 생각해 본다. 나에게 이 물건이 정말 필요한가? 그래도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구입한다.



두 분의 아티스트가 서는 작은 무대이지만 무대가 작아 보이거나 초라해 보이지 않아야 한다. 플랫(flat) 하지 않으면서 부피감을 줄 수 있어야 하고 무겁지 않아야 한다. 어떠한 재료를 써야 할까?


부피가 크거나 무거우면 다마스(작은 봉고차)를 불러야 하고 설치작업이 복잡하면 보조 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대 이후 철거할 때 쓰레기가 많이 나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쓰레기도 돈이다.

 

네모에서 동드라미로 형태를 바꾸다


종이는 가공하기 좋은 소재다. 가볍고 구하기 쉽다. 종이 중에 재활용 종이는 비싼 편이다. 그래서 재사용 가능한 종이를 생각했다. 그리고 일단 양이 많이야 했다.


그래서 책을 떠올렸다. 다 읽은 책들 중에 버리긴 아깝고 알라딘에서도 사지 않는 책들이 집에 서너 권은 있다. 주변에서 쓰임을 다한 책들을 구했다. 책을 원형으로 잘랐다. 공예강의 할 때 사둔 종이를 원형으로 자를 수 있는 칼을 가지고 있었다. 3, 4일에 걸쳐 7~8권 정도의 책을 잘랐다. 손목이 아팠다. 잘라낸 원형의 종이를 상자에 차곡차곡 모았다.




잘린 원형의 종이들의 글들은 연결된 이야기가 아닌 텍스트 패턴(무늬)으로 남았다. 글자가 무늬로 남은 동그란 종이들을 쌓아두고 한 장 한 장 재봉틀로 박아 나갔다.


일정한 크기의 원형 종이들 사이에서 간지(책의 챕터사이 끼워 넣는 종이)들을 골라냈다. 중간중간 색지가 들어간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검정의 텍스트들이 이 종이가 책에서 왔다는 걸 보여 줄 수 있는 지문 같아서 90% 이상 텍스트가 들어간 종이만 쓰기로 했다.


카페의 천장 높이를 고려해 길이를 정하고 양을 정했다. 무대의 너비만큼 한 줄로 건다면 너무 부피감이 없을까 봐 앞뒤로 지그재그로 걸기로 했다. 종이커튼이 완성되니 작은 박스에 접어 모두 들어갔다. 그 외 자잘한 문구류들을 챙겨 지하철을 타고 현장으로 갔다. 이동이 쉬웠고 설치도 간단했다. 카페 천장의 간살 사이에 테이프로 한 줄 한 줄 간격을 정해 붙이는 것이 설치의 끝이었다. 물론 이런저런 작은 장치(디스플레이용 소품류)들이 주변에 더 설치되긴 했지만.


 


잘라진 책들은 종이류에 분리수거하고 나니 정말 쓰레기가 거의 없었다.

정말 가성비 좋은 무대 디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3일간의 공연이 무사히 끝나고 철거된 종이 커튼들은 다시 잘 접어 박스에 보관 중이다. 기회가 된다면 몇 번은 더 쓸 수 있을 것이다.


책들은 처음의 쓸모를 잃었지만 새로운 쓸모를 찾았다. 책들의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네모에서 동그라미로... 책으로 만들어진 종이가 다시 태어나 종이 커튼이 되어 무대에 섰다. 미세한 바람에 흔들거리는 종이들이 조명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였다. 움직이는 무대 장치가 되었다.



리허설 중 사람들의 움직임에 따라 반응하는 종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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