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라면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할 때가 있는 거겠죠.
고등학교 이학년, 담임선생님께선 조류 공포증이 있으셨습니다. 수학여행 때 처음 알게 되었죠. 한라산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갑자기 날아오른 비둘기에 소스라치게 놀라셨거든요. 느닷없이 비명을 지르시길래 제가 더 놀랬습니다. 매우 민망해하며 본인 공포증을 얘기해주시는데, 동그란 눈과 부리가 너무 징그러우셨답니다. 정확하진 않은데, 치킨도 안 좋아하실 정도랬습니다. 그땐 잘 이해되진 않지만 그런가 했습니다. 본능적으로 무얼 싫어할 수도 있으니깐요. 지금 생각해보니 공감됩니다. 저는 언젠가부터 전화가 그렇게 무섭거든요.
언젠가부터 ‘전화 공포증’이란 신조어가 생겼습니다. 현대인, 특히 젊은 층에서 발생하곤 한답니다. 전화 걸기도 받기도 싫어하고 불편해한답니다. 웬만한 건 비대면이나 채팅으로 대신하는 걸 선호하고요. 젊다는 전제 빼곤 제 증상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전화는 무섭습니다. 언젠가부터 싫어졌습니다. 뭔가 꺼려지고 하고 싶지 않네요. 똑같은 사람이래도 얼굴을 마주 보고 하는 이야기는 아무렇지 않거든요. 이게 전화가 되면 이상하리만치 어색하고 싫습니다.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모르는 사람은 둘째치고 친구들과도 채팅 그 이상은 잘하지 않습니다. 정말 어쩌다 하는 전화는 용건만 간단히.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어요. 서서히 잠식되어 갔습니다. 나중에 이르러선 당시 사귀던 친구들과의 전화도 싫어지기에 이르렀죠. 여자 친구 목소리가 싫을 리 없잖아요. 좋죠. 언제든 듣고 싶은 음률이죠. 근데 전화만큼은 유독 싫어해서 많이 혼났습니다. 데이트라던가 문자, 카톡. 전혀 상관없어요. 오로지 딱 전화 하나만 문젭니다. 전화가 울리면 몸부터 굳습니다. 목과 어깨가 움추러 들어요. 마음과 혀가 딱딱해집니다. 길게 몇 번 심호흡하고 난 뒤에야 통화 버튼을 누릅니다. 얼어붙은 채 최소한의 단어들로 대화를 이어가는 스스로를 발견합니다.
그래도 저 같은 사람에게 요샌 참 좋은 시절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전화 통화 정돈 생략하고 살 수 있습니다. 혀 대신 손가락이 열심히 일하면 되거든요. 배달 주문도 손가락 하나로 충분합니다. 대면 없이 화면 몇 번 두드리면 온갖 음식이 코앞까지 식탁 위에 올라섭니다. 물건도 인터넷으로 사는데 택배가 도착되었단 연락도 메시지나 앱으로 옵니다. 특히나 코로나 때문에 중요한 물건이 아닌 이상 직접 전달치 않고 문 앞에 두고 가시기에 더더욱 그렇죠. 미용실이나 식당 예약도 인터넷으로 가능한 세상입니다. 과학 기술 발전 만세!
근데 어느 수준 이상으로 고립되고 혼자되다 보니. 코로나 이후로는 생각보다 많이 전화를 하게 됩니다. 여전히 어색하고 불편하지만. 되려 전화를 해야 마음이 편해지는 시절이 도래한 거죠. 신기합니다. 더더욱 거리를 두어야 할 때 사람 온기를 찾게 되니깐요.
부모님께선 평소 전화 한 통 없는 자식에 자주 서운해하셨습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신경 쓰는 쪽이 맞는데. 다 이해해주실 거란 핑계에 더더욱 전화 대신 메시지로 안부를 묻곤 했습니다. 무뚝뚝하다는 변명도 낯부끄러운 아들입니다. 근데 코로나 때문에 전화 빈도가 매우 늘었습니다. 처음엔 강제로라도 업무 전화하듯 이상 유무 보고하라고 하셨습니다. 건강에 이상은 없는지 회사는 괜찮은지 등등요. 걱정하실만하니 그러기로 했습니다. 지방에 계시다만, 되려 제가 걱정되기도 하고요. 못해도 이틀에 한 번은 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래도 하다 보니 하게 되더이다. 그래도 집에 내려가기도 애매하던 한창땐 전화라도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업무 상에서도 어쩔 수 없이 전화가 늘었습니다. 사실 업무 때는 채팅보단 직접 얼굴 보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합니다. 채팅은 답답하고 잘못 전달될 때가 있어서요. 근데 코로나로 인해 이번 생에는 없을 줄 알았던 재택근무가 시행되었습니다. 유비쿼터스 어쩌고 하던, 학교에서 책으로만 배웠지 이 땅에선 경험해볼 일 없는 제도인 줄 알았던 신문물이 반강제로 펼쳐졌죠. 사실 혼자 일하기는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침대에서 일어나 출근하고, 퇴근하며 침대에 눕는 경험이 신세계더군요. 하지만 업무 대화는 꽤 불편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전화라던가 화상회의가 필요해졌죠. 물론 얼굴 보고하는 얘기보단 아쉽고 어색하더이다. 하지만 답답해서라도 전화기로 손이 갑니다. 일할 땐 손보단 말이 낫더군요.
가까운 거리. 자유로운 공기. 구태여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 때의 전화는 공포였습니다. 스스로 선택하고 싶지 않던 최후의 보루였죠. 근데 그 최후의 보루가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가 된 요새에선. 서로 간에 거리를 요구하는 지금 사회에선 그리움을 해소하기 위한 단비입니다. 데이터만 무제한이면 족하던 제 핸드폰에 통화 시간이란 선택지가 매우 오랜만에 생겨버린 거죠.
부모님께 자주 전화드리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의식하지 않으려 했던 부분입니다. 부모님께선 제 전화를 참 좋아하시고 기다리십니다. 처음엔 강제로 시키셨던 일인데. 어쨌든 매번 전화드리면 그렇게 좋아하시더라고요. 내심 기다리시고요. 어쩌다 바빠 며칠 미루다 전화드리면 몇 분 통화할 시간도 없었냐 삐지시더군요. 그래서 요즘 들어 생각합니다. 코로나에 마침표를 찍더라도 부모님 안부 전화만큼은 공포증을 핑계로 털어내지 않으려 합니다. 싫지만 싫지 않아 질 그 느낌을 믿어보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