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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chrome blues Aug 27. 2016

흑백필름 이야기_#10.

유난히 뜨거웠던 2016년 여름을 보내며 써보는 독백.

  첫 문장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내 취미에 있어 매우 성실하지만 성실하지 않은 편이다. 이전의 취미들은 몰라도 사진만큼은 카메라의 무게가 어깨에 익숙해지고 손 안의 감촉에 느껴지는 쇠붙이의 감성에 곧잘 호흡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꾸준히 찍어왔다. 잘 찍고 못 찍고는 그 이후의 문제. 진짜 문제 아닌 문제는 찍은 이후에 발생한다. 찍고 난 직후부터 불성실함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순간을 담아낸 이후부터는 마음을 내어주는데 인색하기때문. 찍은 사진들은 저장 공간에 묵혀 발효될 지경이다. 더 이상 앉을자리가 없도록 꽉꽉 채운 연후에야 마지못해 정리를 시작한다. 디지털도 이 정도인데 필름은 오죽하랴. 한 번에 몇 롤씩 사두었던 필름에 결국 끝이 보이면 겨우겨우 모아두었던 필름 뭉치를 박스에 담는다.  


몇 달은 묵었다가 겨우 빛을 보는 흑백필름에서 계절을 알아차리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 이유를 묻는다면 대답은 ‘그냥’이다. 이미 순간을 포착했다는 만족감이나 이미 잡은 고기라는 안도감에서 오는 자만은 아니다. 아직은 찍은 사진을 정리하고 보정하거나 인화를 맡기는 일보다 사진을 찍는 그 순간 자체가 더 좋기 때문. 찍고 싶은 순간을 기다리는 쾌감과 사진의 결과와 상관없이 그 순간에 셔터를 눌렀다는데서 오는 청량감이 더 좋다. 


선생님께서 칠판에 써주시는 수업 내용을 공책에 이쁘게 필기하는 일에만 관심 있고, 내용을 외우는 일에 뒷전인 불성실한 학생인 격이라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 


  이처럼 반만 성실한 취미라 찍은 사진들을 올리는 SNS 계정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계절을 담는다. 유난히 불탔던 올여름의 마지막 문턱에 닿고 나서야 벚꽃이 피었다. 그래서인지 내 계정에 올라가는 사진들은 유독 흑백이 많다. 흑백 사진은 뒤늦은 계절을 담아내는 데 단짝이기 때문. 색채에서 먼저 닿는 계절감은 한 발 뒤로 물러나 있다. 그 뒤로 오는 사진 속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풍경에서 계절이나 날씨의 단서를 내놓는다. 흑백 사진의 불친절함이 나의 시간을 친절하게 가려준다. 


흑백의 벚꽃길.


  주말을 하루 앞둔 오늘, 올여름을 유독 고통스럽게 만든 불볕더위가 기승전결 없이 작별을 고했다. 최소 이번 주말까지는 이 날씨란다. 오랜만의 상쾌한 바람에 취해 오늘도 여지없이 어깨에 카메라를 매었다. 유독 파란 하늘을 손가락으로 다독여 몇 장을 찍어냈다. 하지만 오늘의 청량한 하늘을 언제 다시 눈에 머금을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지금의 기분과 피부에 닿는 바람의 살결이 어떠하였는지, 기약할 수 없는 내일에 열어본 사진첩에서도 느낄 수 있도록 최대한 애써 기억하고 기록할 뿐이다.  


돌담 위의 하늘.


몇 달만의 상쾌한 새벽 공기라.
오늘의 사진은 어제보다 강렬히 사진 속에 남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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