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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chrome blues Nov 04. 2016

컬러필름 이야기_#3.

할아버지의 카메라를 고치다.

  카메라를 고쳤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할아버지께서 쓰셨던 카메라였다. 벽에 걸린 곳곳의 풍경마다 당신께서 목에 걸고 계시던 카메라였다. 어린 나를 찍어주셨고, 한 번은 네댓 살에 불과한 손에 쥐어져 영종도나 용유도 즈음의 폐목선을 찍은 추억도 가진 카메라였다. 당신과 단둘이 떠났던 여행들에서도 우리와 함께 했던. 여행의 횟수가 더해가면서 카메라는 점점 간소해졌고, 나중엔 카메라 없이 여행을 다녔지만. 당신의 손때가 묻은 친구였고, 내 시간 속에도 스며들어있던 카메라였다.  

어린 내가 찍었던 폐목선은 나에게 없고, 바다보다 갯벌에 가까웠다.

  당신께서 돌아가신 지 일 년이 넘었고. 카메라를 물려받게 되었다. 원래 사진을 찍는 데다 필름 사진도 찍는 연유에 자연스레 받게 되었지만, 그전에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갖고 싶다고 말했었다. 감사하게도 허락해주셨고 당신의 물건을 이어받았다. 당신의 손을 붙잡고 여행을 다닐 때만 해도 카메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지라 기종은 커녕 브랜드도 몰랐었다. 추억으로 가늠하듯 장롱에서 꺼낸 카메라 가방이 니콘인데 내용물을 캐논이라 한 번 당황했고, 기억보다 작은 크기에 두 번 당황했다. 연예인이나 새를 찍는 용도의 이른바 ‘대포만한 렌즈’ 크기는 아니지만 상당한 크기의 줌렌즈가 달려있었음에도. 상상보다 작았다. 딱 들고 다닐만한 정도의 크기.  

딱 들고다닐만한 정도의 크기.


  캐논 ‘ae-1’. 내가 물려받은 카메라. 단단하고 무던한 필름 카메라. 내 손을 잡던 당신께서 내 손 이전에 먼저 잡았을 카메라. 오랜 세월 당신의 체온을 물려받은 채 장롱에서 잠을 청했을 카메라. 다 삭은 필름이더라도 타임캡슐마냥 카메라 속에 있었으면 했지만 그렇지 않아 아쉬웠다. 셔터를 몇 번 감아보고 파인더와 렌즈도 확인해 보았다. 세월에 쌓인 눈처럼 뿌연 시선. 이래저래 수리점에 갔다 와야 할 느낌이었다. 어차피 쓸만하더라도 오버홀은 무조건 받아야겠다 생각했던 차. 


  필름 카메라 오버홀로 유명한 곳에 들렀다. 저마다 다른 시간을 쌓아온 카메라 더미. 죽음 속에서 생명이 돋아나는 느낌의 수리점이었다. 주인께선 눈가에 서린 주름이 무색하리만큼 단번에 오래 묵은 물건임을 알아보셨다. 고쳐야 할 곳들을 말해주시고 고칠 수 없는 부분도 미리 말씀해주셨다. 특히 카메라에 붙이는 형태의 외장 플래시는 건전지가 들어있는 채로 장롱에 있었던지라 부식이 심하다고 하시며. 유품처럼 받아 의미 있는 물건이라 최대한 고칠 수 있는 한 고쳐주십사 부탁드렸다. 상태 좋은 동일 기종을 살 수 있을 만큼의 가격이 나왔지만. 상관없었다.  

카메라들의 무덤, 혹은 천국.


  일주일이 지난 뒤, 수리점에서 연락이 왔다. 한결 선명해진 시야와 깨끗해진 렌즈. 플래시는 최대한 깨끗이 닦고 고쳐보았지만 이미 너무 멀리 가버렸단다. 가는 길에 버리라는 말에 알겠다고는 했지만 버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세월을 털어낸 카메라를 목에 걸고 챙겨간 필름을 걸었다. 첫 셔터를 당기고 파인더에 눈을 가져다대니 아연한 풍경이 펼쳐졌다. 


  당신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기어코 이어져 버렸다. 그 사이에 낀 어린 내 시선은 둘 곳이 없다. 당신 손에 들려 세계 곳곳을 누비었을 카메라의 무게는 내 손에 들릴 정도로 당당해졌다. 조리개를 맞출 여력 없이 파인더에 보인 순간을 담던 어린아이는 가고 필름 카메라에 익숙해져 다 커버린 손자만 남았다. 할아버지와 어린 손자는 늘 그랬듯 손을 잡았다.  

당신과 함께 걷던 길.


첫 롤이 끝나기 전에. 
길가 어디선가 손자의 손을 꼭 쥔 당신을 마주치길 바랬지만. 
만나지 못했다. 


  말로는 표현 못할 순간을 목도하며. 내 손에 당신의 물건이 담길 줄 몰랐을 당신과 그저 당신이 좋았던 어린 손자는 없다. 추억만 남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다시 한번 세월이 쌓이듯 파인더가 뿌옇게 흐려지려다 말았다. 당신이 보고 싶어 졌다.  

불타오르듯 이어진 시간. 몇십 년만의 작동.


  작년 추석 때. 당신의 짐을 정리하다 어린 손에 들려 찍혔던 폐목선 사진을 보았다. 반가운 마음보다 가라앉은 시선에 아무 말없이 다른 사진들과 함께 정리했다.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나고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스치듯 폐목선 이야기를 꺼냈다. 온 가족이 동원되어 사진을 찾았는데 결국 찾지 못했다. 분명히 버리지 않았는데. 나오고 싶어 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결국 폐목선을 찾는 일은 포기했지만 다 커버린 손자가 찍은 필름이 남았다.  

당신의 카메라로 본 우리의 시선.


  그제야 당신이 뿌린 세월에 내 시선이 뿌리 박혔다. 한 장의 사진을 묻고 서른 장이 넘는 사진들을 꺼냈으며, 앞으로 더 늘어갈 예정이다. 단순히 내 소유인 카메라들과는 다르게 당신의 시선을 느끼며 쓰게 될 것이다. 당신과 나의 카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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