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 문을 닫다.
‘XX월 XX일 부로 문을 닫습니다. 선입금 찾아가세요.’
동네 만화 대여점이 문을 닫는다. 이면지에 붉은매직으로 휘갈긴 글씨가 아연하다. 이 동네로 이사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던 이유 중 하나가 문을 닫는다니. 옛날처럼 자주 빌려보지는 않더라도 ‘안 빌려보는 것’과 ‘못 빌려보는 것’은 천지차이라 너무 서운하다. 아파트 단지 혹은 상가마다 자리 잡고 있던 만화 대여점은 어느새 천연기념물이다. 만화대여점의 조상이었던 비디오 대여점이라던가 친척뻘인 오락실처럼 유행과 문화의 끝에서 작별을 고한다.
나에게 만화 대여점은 하루의 끝을 고하는 의식이나 습관 같은 것이었다. 하루를 어떻게든 끝낸 뒤, 검은 봉지에 빌린 만화책을 골라 담았다. 역전 포장마차에서 깻잎이 송송 썰린 떡볶이 일 인분에 순대 일 인분도 챙기고. 등허리에 알맞게 퍼질러진 소파에 누워 캔맥주와 함께 마무리하던 나날들. 밀린 예능이나 드라마를 켜놓고 잠이 오길 기다리던 기약 없는 조촐한 자축. 소소한 일상은 이제 추억이다. 나만의 영역에는 소파만 남았다. 만화 대여점에는 치킨집이 들어섰고, 포장마차는 단골에게 인사 없이 떠났다. 뱃살 때문에 야식은 고사하고 캔맥주 하나에도 다음날의 나에게 사정해가며 마셔야 한다. 재밌는 드라마는 드물다. 출근하기 위한 아침이 무서워 등 떠밀리듯 잠을 청한다.
이제는 이 동네 만화 대여점도 문을 닫는다.
그렇게 또 추억에 안녕을 고한다.
만화 대여점이 영영 문을 닫기 전, 선입금도 찾고 마지막 만화책도 빌릴 요량으로 들어섰다. 책장을 기웃거리며 몇 권을 뽑아 들다 더 이상 빌려주지 않는단 말에 내려놓았다. 대신 만화책들을 헐값에 내놓으니 가져가란다. 책장에 꽂은 녀석들을 다시 챙기려다 말았다. 얌전히 선입금만 받아 나왔다.
오늘은 추억을 팔아 남은 공돈으로 치킨에 맥주를 사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