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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chrome blues Jun 26. 2019

원하는 삶을 꾸릴 수 있다면.

돈으로 시간을 사겠습니다.

   우리의 삶은 돈으로 어디까지 살 수 있을까? 만약 삶의 목적이 돈이라면, 무엇도 살 수 없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돈의 한계치는 정해져 있지 않아 끝없이 타는 목마름을 겪을 수밖에 없다. 젊음은 삶에서 단 한 번만 주어지며, 영생은 애초에 가질 수 없다. 시간은 오로지 같은 속도로 너나 할 것 없이 흘러가니까. 다만 돈으로 시간은 살 수 있다. 지불하는 돈에 따라 그 순간만큼은 달라질 여지가 있다. 보다 아끼거나 즐길 수 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비행기를 타면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지만, KTX로는 세 시간 남짓이며 버스를 타면 너덧 시간이 기본이듯이. 자본 시장의 논리에서는 당연한 권력이다. 하지만 돈으로 살 수 있는 삶의 범위는 딱 거기까지다.  


   돈은 연필이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수 있지만 연필로 무엇을 할지는 가진 자의 몫이다. 나 대신 써주거나 생각한 대로 움직여주는 요술 연필은 아니라서. 연필을 사용하려는 마음에서부터 적어가는 과정, 결과물까지 오롯이 본인에게 달려있다. 연필이 많아 나쁠 일은 없지만 개수가 결과물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단 한 자루의 몽당연필이더라도 대작은 탄생할 수 있다. 헤밍웨이는 단 여섯 개의 단어로도 충분히 슬픈 소설을 써냈으니까.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만약 돈에 제약이 없어 무수한 연필을 손에 쥔 생활을 할 수 있다면. 나는 한없이 무용한 삶을 영위하겠다. 무용한 데서 그치지 않고 돈으로 살 수 있는 만큼의 시간을 사겠다. 그리고선 남김없이 불태워 삶의 목표를 꽃피우겠다. 이러한 방향으로 살다 간 롤모델은 화가인 클로드 모네다. ‘인상파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클로드 모네. 한때는 가난한 적도 있었으나 화풍을 인정받고 부유해지자 정원이 딸린 저택을 샀다. 그 후,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렸다. 그가 목표로 하던 빛과 색채를 담아내기 위해 삼십 년 이상. 모네의 대표작, 수련 연작도 이때 나왔다. 계절과 날씨,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수련의 색채를 300점 넘게 그렸다. 인터넷이나 책으로 그의 그림들을 마주했던 때에는 단순히 ‘수련에 미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직접 그의 그림을 본 순간 그는 나의 롤모델이 되었다. 단순히 부유했던 사람의 취미 생활이나 유유자적한 삶에서 나온 결과가 아니었다. 돈으로 시간을 샀고 시간을 쏟아부었으며, 결국 그의 염원대로 빛의 순간적이고 변화적인 색채를 그려내고야 말았다. 그가 이뤄낸 삶의 결과물 앞에서 난 한 시간 이상 떠나질 못했다. 


   내가 꿈꾸는 삶의 방향은 ‘유목민’이다. 지금은 여행을 다니며 마음에 들어차는 곳을 만나게 되더라도 떠나기 아쉬워하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지만. 그곳의 풍경을 바라보며 사진 한 장, 글 한 줄 남기고 돌아오는 것이 최선이지만. 돈으로 산 시간으로 정처 없이 떠돌며 글을 쓰고 사진을 찍을 것이다. 유목민의 삶은 그동안 다니며 좋았던 곳들에서부터 시작하겠다.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 겨울 홋카이도 ‘비에이’에서 한 꾸러미의 책을 짊어지고 격리된 삶을 살 것이다. 사진을 찍고 싶다면 하염없이 설경을 헤매다 정말 담아내고 싶은 순간들을 고르고 골라 찍겠다. 아이슬란드라면 일 년 넘게 있어줄 수도 있다. 짧은 여름에는 보랏빛 루피너스가 온 들판에 물들 것이고 긴 겨울에는 고독에 휩싸인 대지와 하나가 되면 된다. 렌터카 하나에 의지하다 마음에 꽂히는 순간을 마주하면,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그곳에 머물겠다. 투박한 SUV의 거친 스피커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아이슬란드 음악을 들으며 글을 끄적이고 카메라 셔터를 누를 것이다. ‘시규어 로스’나 ‘뷔욕’, ‘오브 더 몬스터 앤 맨’ 같은. 아이슬란드의 우울한 언덕들과 몽환적인 해변이 가지는 색채는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지은 노래와 가장 어울리니까. 그다음은 클로드 모네의 수련을 처음으로 보았던 미술관으로 갈 것이다. 지하로 전시 공간을 지은 대신 모든 조명을 반사된 자연광으로 사용하는 곳이기에. 시시각각 변화하는 조명과 함께 수련이 피어난 연못을 하염없이 바라볼 것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맑은 날에도 비가 내리는 날에도.  


   유목민으로서의 첫발을 디딘 후에는 새로운 곳들로 나아갈 것이다. 그러다 반하는 풍경에 며칠이고 몇 달이고 발이 묶였다가 또 다른 곳으로 떠나갈 것이다. 유목 생활을 하며 나올 글과 사진은 나의 명함이요, 뮤즈이자 이름이 될 것이다. 무용한 발걸음과 시간의 할애는 모두 이를 위함이다. 돈과 시간을 쪼개 틈틈이 바라보는 단면이 아니라 삶의 전부로써 살아갈 것이다. 내 삶에 돈의 제약이 없다면. 돈으로 시간을 사 역마살이 낀 클로드 모네로 살겠다. 

유목민이 된다면, 다시 찾고 싶은 순간들.


해당 게시글은 공대생의 심야서재, 일과삶 작가님께서 운영하시는 '나를 찾아가는 글쓰기' 과정을 들으며 작성한 글입니다. 


https://brunch.co.kr/@worknlife/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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