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랗게 불타야만 하는.
올해를 끝으로 선수 생활을 은퇴한, ‘반 페르시’란 네덜란드 출신 축구 선수가 있다. 해외 유수 클럽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던 그는 본인이 꽤 오랫동안 소속해 있던 팀에서 경쟁팀으로 이적했던 적이 있다. 이때 하필 라이벌팀으로 이적하다 보니 팬들의 많은 질타를 받았고. 심지어 이적을 결정하게 된 계기를 ‘인생을 살면서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할 때는 <내 안의 작은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라고 말해 불에 기름을 끼얹었다. 나 역시 이전 소속팀의 광팬이라 그의 변명 아닌 변명에 울컥했다. 은근히 잔 부상에 시달려 늘 시즌의 반밖에 못 뛰는 <'반' 페르시>이다가 이전 시즌 처음으로 경기 대부분에 뛰었던 <'풀' 페르시>였으면서. 그렇게 일 년 반짝해놓고 (사실 이전부터도 쭉 잘해주기는 했다. 시즌의 반만 출전해서 그렇지.) 하필 경쟁팀으로 이적한다니. 그냥 가고 싶었다면 가고 싶었다고 말하란 말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배신감을 걷어내고 생각한다면. 나만은 그가 말했던 '내 안의 작은 아이'를 이해해야만 한다. 작은 아이인지까지는 모르겠으나 내 안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내 속은 파랗다. 평소에는 붉을 때도 많은데 파랗게 물들었을 경우가 가장 '나' 다운 때다. 가슴속에 불을 품고 살아서. 불은 붉을 때보다 파랄 때 더 뜨겁고 완벽히 연소하기에. 파란색이어야 한다. 말과 행동이 느린 편이라 유유자적하고 느긋하며 이성적인 사람일 것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어느 정도는 맞다. 쉴 때와 달려야 할 때를 철저히 구분하며, 완전히 내려놓고 느긋해져 버리는 순간도 있으니. 하지만 애초에 느긋하거나 이성적이라고 해서 마음속에 열정이 없다는 말은 아니니까. 내 안에는 크고 거대한 불길이 존재한다. 일에도 사람에도 한 번 빠지면 무섭게 파고든다. 가장 최고조로 집중하고 열정이 솟구치는 순간, 내 속은 파랗다.
파랗게 불태우기 위해서는 충분한 연료와 산소가 필요하다. 나에게 연료가 열정이라면, 산소는 '시도'다. 아이러니하게도 무조건 시도만 많이 해서는 불길을 파랗게 잡을 수 없다. 많은 시도 속에 스파크가 튀는 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파랗게 불태울 수 있다. '내 안의 무언가'가 말을 걸어주는 순간 발동이 걸린다. 꾸준한 시간을 들여 자료를 분석하고 고민과 마주해야 한다. 그러면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스파크가 튀어준다. 배신하는 법 없이. 아르키메데스에게 목욕탕이 있다면 나에겐 샤워기가 있다. 자명종 소리에 간신히 떠지지 않는 두 눈을 부여잡고 샤워기 밑으로 가 멍하니 물을 맞고 있는 순간. 바로 그때 스파크가 자주 튄다. 젖은 손을 수건에 닦고 웃으며 휴대폰 메모장을 연다. 파랗게 불타는 순간을 바라보며 희열에 찬다. 이 맛에 언제 튈지 모를 스파크를 기다리며 땔감을 쏟아붓는다.
불길을 애써 조절하기보다는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둘 때 힘이 실린다. 다르게 쓰자면 독립적이고 자유로워야만 한다. 방임과 나태는 본인이 스스로 조절할 줄 알고 일할 때의 선 역시 지킬 줄 알기에. 환경만 주어지면 알아서 자가발전하고 결과를 내놓는다. 수직적인 '워터폴' 방식의 업무 환경보다는 수평적인 '애자일' 같은 방식이 맞지만, 수직적인 체계에 몸서리칠 정도는 아니다. 그 정도 융통성은 가지고 있다. 삶 자체도 기본적으로 독립적인 방향을 추구한다. 혼자서도 너무 잘 놀아 탈이다. 외로움과 주체적인 삶은 분리시켜 볼 줄 알아서. 그럼에도 연애를 할 때만큼은 어느 정도 구속받기를 원하는 편인데 그 이유만큼은 나도 알 수 없다.
MBTI 검사와 같은 자기 측정 평가를 해보면 예전부터 초지일관 양다리였다. [E:외향/I:내향, S:감각/N:직관, T:사고/F:감정, J:판단/P:인식]의 요소 중, 난 언제나 'ENFP' 혹은 'INFP'에 속했다. 그때 속한 상황에 따라 외향적인지 내향적인지가 결정되는 모양인데, 최근에 했을 때는 'ENFP'. 좀 더 외향적으로 나왔다. 비록 거의 한 끗 차이의 외향성이지만. 열정적이되 이성적이고, 깊이 파서 의미를 찾아내야만 한다. 독립적이며 자유로운 삶을 추구한다. 내 안의 작은 무언가는 파랗게 불탈 때 가장 빛난다. 그게 나다.
해당 게시글은 공대생의 심야서재, 일과삶 작가님께서 운영하시는 '나를 찾아가는 글쓰기' 과정을 들으며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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