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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ochrome blues Jul 09. 2019

자기소개서에는 쓰지 못한 편지.

이런 나라도 괜찮나요?

  ‘단점 말하기’에 인색해진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고르라면, 고민하지 않고 ‘자기소개서를 적으면서부터’라고 답하겠다. 몇 번의 취업 시즌을 거치며 최소 몇백 편의 ‘자소설’을 집필했다. 자기소개서에서 쉽게 쓰일 내용이 있겠냐마는, 그중에서도 ‘본인의 장단점을 나열하시오’라던가 ‘본인의 단점을 적고, 이를 극복하려 노력했던 경험을 서술하시오’라는 항목을 앞에 두었을 때 가장 고통스러웠다. 머리를 싸매고 깜빡이는 커서를 멍하니 쳐다보아야만 했다. 가능하다면 빈칸으로 답을 대신하고 싶었다. 자기소개서답게 포장하는 일이 죽기보다 싫어서. 


본인의 단점을 쓰는 항목에서는, 
진짜 단점을 적지 마세요!


  자기소개서와 관련된 글쓰기 팁을 전수받을 때마다 들었던 이야기다. 처음에는 이게 정말 단점인가 싶은 포인트를 과장하여 단점처럼 모호하게 적어놓은 뒤 적절한 노력으로 단점도 장점처럼 승화시킨 사례로 포장하란다. 단점을 쓰는 항목에도 결국 장점을 적을 수 있게.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탈락 문자들을 보며 금세 마음을 고쳐먹었다. 곧잘 써먹던 레퍼토리는 ‘모든 일에 욕심을 부려 아이디어를 너무 발산하고 확장한다’였다. 손발이 오글거리는 ‘자기소개 전용 단점’은 ‘일정 체크하는 버릇을 들여 기한을 맞추는 사람이 되면서부터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XX에서도 기한을 중시하면서도 끊임없이 인사이트를 고민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로 결론 맺곤 했다. 은연중에 자신을 ‘아이디어 뱅크’라 칭하고 기획 직무의 덕목인 기한 준수와 프로젝트 관리가 몸에 밴 사람이라고 표현하며. 하다못해 소개팅 자리에서도 진짜 치명적인 단점은 숨기는 일이 상식이거늘. 대체 당신들은 나에게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었던 걸까. 티 없이 밝은 바보나 출제 의도를 이해 못 한 지원자를 걸러내고 싶었을까? 솔직하지 못한 구애 편지를 읽어야 하는 입장에서도 힘들기는 매한가지였을 텐데.  


  결국 당신들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밝힐 수 없었던 단점들을 꼽아보자면. 답답할 정도로 이해에 집착한다는 점이 먼저 떠오른다. 일의 경중을 떠나 어떤 식으로든 사유가 있어야만 하고, 이를 납득해야만 동기 부여가 생긴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단순 암기는 쥐약에 교과목마다 점수 널뛰기가 심했다. 심지어 선생님에 따라 같은 과목이더라도 성취도나 성적도 달랐고. 그런 걸 보면 사유가 맞냐 틀리냐는 자체는 관심 밖이었던 것 같다. 일단 사유 자체만 있으면 되고, 어떤 방향이든 받아들일 수만 있으면 되었다. 


  반복되는 일상과 업무에 금방 지루해지고 게을러진다. 어떤 일이라도 어느 정도의 정형적인 루틴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도 한두 달이 지나 몸에 익으면 나태해진다. 쉽게 다른 일에 정신이 팔리고 산만하다.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일상에 잠깐씩 힘을 얻곤 하지만 그 순간뿐이다. 같은 시간에 출근하고 퇴근하는 일상마저 나른해지는 순간이 오면. 과녁 없이 쏘아진 화살의 정해진 결말처럼 땅으로 고개를 파묻는다. 자극 없는 일상은 빠져 죽기 적당한 늪이다. 요새는 ‘번아웃’ 같은 트렌드로 스스로를 적당히 포장할 때도 있지만. 원인은 그렇게 타고난 나에게 있다. 


  안 그럴 것 같이 생겨서 은근히 인간관계를 중시한다. 미움받을 용기가 미약하다. 다른 사람에게 미움받고도 아무렇지 않을 사람은 없겠지만. 싫은 소리나 거절하는 일에 약하다. 말다툼이라도 할라치면 심장부터 쪼그라든다. 주변인들의 기분, 혹은 나를 향해 서 있는 칼날을 지나치게 의식한다. 그렇다고 하여 무조건 이타적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본인의 영역’이라는 추상적인 거리에 명확한 선을 그어놓았다. 그 선은 남들보다 매우 본인 쪽에 그어져 있으며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 마지노선이다. 남들이 그 선을 밟기 전까지는 위에 열거한 ‘호인’으로서 산다. 허나 그 선을 밟는다면 180도 돌변한다. 이런 면 때문에 ‘호구’라는 이야기보단 되려 알다가도 모르겠단 소릴 듣는다. 


  나이를 먹을수록 무뎌지거나 순응하는 모습들을 발견한다. 주위에서 ‘그래서 어디 사회생활 제대로 하겠나’란 이야기를 듣곤 했는데, 이제는 점점 자기소개서에 적힌 사람처럼 되어가는 중 같기도 하다. 다만 자기소개서의 결말처럼 굳이 단점을 장점으로 극복하려 노력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취약하다고 해서 나쁜 일은 아니니까. 나름의 돌파구를 찾는다. 호불호가 강해 아니다 싶은 일은 빨리 내려놓는다. 지는 판에 일찌감치 바둑돌을 던지는 일은 의지박약이 아니다. 나름의 대국 방식이자 선택이다. 반복되는 일상이 싫어 개선할 점이라던가 새로운 방식을 늘 고민한다. 미움받을 용기가 미약한 대신 ‘부드러운 소통 방식’에 밝다. 세찬 바람 대신, 은근한 열기로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일에 익숙하다. 단점이라 불리우는 항목들에 대해 나름의 방식을 체득하였으며, 점차 익숙해지고 있는 중이다. 


  피할 수 없다면 받아들이고 일단 즐겨야 하니까. 삶에 유연함을 주기 위해서라도 장점을 돋우고 단점은 받아들이겠다. 내가 나에게까지 잘 보일 필요는 없으니까. 솔직히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겠다. 




해당 게시글은 공대생의 심야서재, 일과삶 작가님께서 운영하시는 '나를 찾아가는 글쓰기' 과정을 들으며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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