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Abgrund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nochrome blues Jul 30. 2019

Abgrund, 너의 모든 순간.

오라, 달콤한 죽음이여.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우리가 심연(深淵, abgrund)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본다. - 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은 무엇도 아닌 상태로 나와 무엇이든 될 수 있게 만들어졌다. 인간의 성장기가 유달리 긴 데에는 바로 이러한 연유가 있어서다. 사용자 입맛대로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컴퓨터를 사용하듯 인간의 뇌도 쓰는 대로 빈칸이 채워지고 하나의 존재가 되어가는데, 이를 ‘생후 배선(live-wired)’적 특성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사회적인 학습과 상호작용을 통해 어른이 될 때까지 성장한다. 어른이 된 뒤에도 ‘나’다워지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의 뇌는 무수한 ‘연결고리’를 통해 자아를 강화하고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뇌세포 사이의 연결점이 이어지고 끊어지기를 반복하며, 특정 연결을 많이 쓸수록 그 강도 역시 강해진다. 한 번 정해진 방향성에 고착화되지 않는 점도 특징이다. 굳건한 연결도 쓰지 않다 보면 결국 끊어질 수 있다. 한 번 가속도가 붙은 관성에서 쉽게 벗어나기는 힘들지만.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뇌과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정의하는 인간은 그렇게 설계되었다. 


  나에게는 나쁜 관성들이 있다. 게으르고 나태하며 오만하고 비관적이다. ‘오늘 하루는 괜찮겠지’, ‘아무도 모를 거야’, ‘어차피 안돼’ 란 생각들이 쌓여 만들어낸 괴물이다. 지금은 괴물을 똑바로 바라보며 목줄을 쥐고 있지만, 그들은 서슬 퍼런 송곳니를 드러내며 호시탐탐 주도권을 노린다. 한때는 먹힐 뻔했던 적도 있었고. 괴물들이 뿜어내는 숨과 혓바닥은 치명적이게 달콤하다. 내가 그들을 알 듯 그들도 나를 알기에.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일 때 그들의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발 밑에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순간들을 어찌나 잘 만들어 내는지 모른다. 가끔은 그들이 목줄을 쥐고 흔드는 조련사 같을 때도 있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알아가고 관성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절대 멈추어서는 안 된다. 특히나 나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면 더더욱. 


  나란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괴물에 사냥당할 운명일까, 혹은 그에 휘둘리지 않는 힘을 얻고 통제하는 사람일까? 지난 일곱 번의 ‘나를 찾아가는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의 윤곽을 더듬어보는 경험을 했다. 추상적으로 가늠해오던 본인을 스스로 정의해보고 묘사해보니 그 존재가 보다 명확해졌다. 나는 한 자루의 연필이자 한 폭의 유화요, 낯부끄러운 유서를 찢고 나온 시퍼런 불꽃이다. 누군가의 아들이자 손자이고, 친구이자 동료다. 나를 들여다보는 탐험가이자 서술자다. 뒤늦게 기획자가 되려 노력해왔던 시간이며, 사진과 글로 빛나길 갈망하는 예술가의 배고픈 욕망이다. 그 이면에 숨겨진 괴물들 역시 본인의 일부다. 볕이 닿지 않는 그림자 속에 사는 차가운 가시덩굴과 노력하지 않으면서도 성공을 바라고 재능만 탓하던 게으른 불모지, 스스로를 관성에 빠트린 합리화까지도. 모두 나다. 1987년 3월 30일에 태어나 2019년 7월의 열대야를 관통하고 있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순간이 나의 이름이다. 


  바둑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흔히 바둑을 인생에 비유한다. 바둑판에 놓이는 바둑돌 하나는 의미 없어 보일 수 있지만, 이전에 놓였던 자리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이끌고 대국을 만든다. 무수한 바둑돌이 매 순간의 삶이되, 그중 단 하나가 전체 흐름과 기세를 뒤엎기도 한다. 몇 년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기사(棋士) 이세돌 구단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대결, 인류의 희망과 위대함을 보여주었던 네 번째 대국 중 이세돌 구단이 승기를 거머쥐었던 78수가 그랬다. 알파고는 이세돌 구단이 그 자리에 돌을 끼워 넣을 확률을 0.0002%로 계산했으니까. 만 분의 일에 해당하는 신의 한 수가 절대적인 승리 요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 돌 하나만이 대국의 전부는 아니었다. 78번째 수만으로는 이야기를 이끌 수 없다. 78번째 돌을 위한 77개의 바둑돌, 78수 이후의 무수한 고민이 있고 난 뒤에야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었으니까. 바둑에도 삶에도 허투루 쓰이는 돌은 없다. 지금 당장은 악수나 묘수처럼 보이는 돌들도, 전체 판도에서는 하나의 단면에 불과하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며 끝나 보아야 결과를 가늠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인생을 건 대국은 재미있다. 


  ‘나이가 마흔 즈음을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오늘도 책임져야 할 때를 향해 걷고 있다. 기쁜 마음으로 후회 없이 책임질 수 있도록. 심연에 비친 나와 너를 쳐다본다. 손에 쥔 목줄의 매듭을 확인해본 뒤, 바둑돌 하나를 꺼내 생각했던 자리에 얹어본다. 



해당 게시글은 공대생의 심야서재, 일과삶 작가님께서 운영하시는 '나를 찾아가는 글쓰기' 과정을 들으며 작성한 글입니다. 


https://brunch.co.kr/@worknlife/230


매거진의 이전글 너 자신을 알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