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을 갈무리하며.
근육을 키우려면 꾸준해야 하며, 조금 아파야 한다. ‘아파야 청춘이다’란 문장이 참 싫은데, 아파야 근육이 붙는단 말은 거부할 수 없다. 운동에 취미 붙인 뒤 체득한 진리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올해 참 잘한 일 중 하나가 바로 운동과 절친 먹은 거다. 작년보다 체력도 붙고 건강해졌으니까. 크로스핏을 시작한 지 갓 일 년, 지금처럼 한 가지 운동을 꾸준히 했던 건 처음이다. 일주일에 한 번 나갈 때도 있어 ‘꾸준히’란 단어 선택이 민망하지만 노력하고 있다. 운동이 재밌는 이유도 있지만 매일 힘든 쪽이 간헐적으로 힘든 경우보다 훨씬 낫기 때문이다. 크로스핏은 짧은 시간 내 모든 힘을 쥐어짜는 방식이다. 그러다 보니 며칠 쉬는 바람에 체력 분배 리듬이라도 잃는다면, 그 날은 운동 중간쯤부터 바닥을 뒹구는 거다. (몸치라 리듬을 쉽게 까먹어 그럴 수도 있다) 반면 매일같이 나갈 땐 고통스럽더라도 버틸만하다.
혹자는 애초에 크로스핏을 관두면 더 아플 일도 없지 않겠냐 물을 수도 있다. 근데 그건 싫다. 이제라도 적성에 맞는 운동을 찾은 데다, 이거라도 해야 현상 유지가 될 테니깐. 조금씩 늘어가는 체력이 재밌기도 하고 말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들인 노력과 성과는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우고 있는데, 적금과 체력만은 거기서 열외라 애정 할 수밖에 없다. 저들은 만기 전까진 기간과 비례해 반드시 늘어나 준다. 근래 보기 드문 은혜로움이지. 단, 한 가지 아쉽다면 둘 다 뭔가 시원시원한 맛은 없다는 거다. 비례해서 ‘늘어난다’고 했지, 많이 늘어난다곤 안 했다. 체력이 적금 통장이라면 근육은 이자라 별 티도 안 난다. 많이 짜다. 운동하면서 배운 점 중 하나는 식스팩은 진짜 열심히 쇠질 하는 자만의 권리이자 피, 땀, 눈물이란 사실이다.
그래도 운동의 아픈 짠맛이 익숙해진 요즘, 이제는 걱정 없이 달달하게만 살면 되나 했는데. 새로운 ‘고통 거리’가 한 가지 생겨버렸다. 바로 글쓰기다. 한 번도 이랬던 적이 없었는데 제대로 배신당했다. 쳐다보기도 싫다. 달력을 보니 글쓰기에 소홀한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하얗게 불태운 이후 글쓰기 리듬이 완전히 꼬였다. 급하게 브런치 공모전을 준비했던 탓이다. 원래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부족해 좀 더 내공을 쌓은 뒤, 내년부터 도전하려 했다. 공고가 나왔을 때도 강 건너 불구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멘토처럼 생각하는 분과 점심을 먹다 우연히 공모전 얘기가 나왔다.
“뭘 내년까지 기다려? 그냥 올해부터 해봐! 준비되고 안 되고 어딨어. 생각한 순간부터 하는 거야 원래.”
“그러.. 게요? 그냥 해보면 되겠어요..?”
내년으로 미루던 핑계를 멘토께 얻어맞고, 전의에 불탔다. 그래, 굳이 내년부터 미룰 이유가 없지 않은가? 언제부터 준비와 확신이 철저한 상태에서만 일에 뛰어들었다고 말이다. 그날부터 마감까지 삼 주 정도 미친 듯이 달렸다. 전체 방향성을 잡고 보니 열다섯 편 정도의 글이 필요했는데, 최소 열 편은 새로 써야겠더라. 마감에 쫓기는 생애 첫 마라톤이 시작되었다. 지금까진 딱 취미처럼만 해왔다. 기약 없이 일주일에 한 편 정도, 써지면 써지는 대로 안 써지면 미련 없이 노트북을 덮었다. 근데 이번엔 그럴 수 없으니 깜빡이는 커서를 고통스럽게 노려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자소설에 지겨워했던 적은 있어도 글쓰기 자체에 고통받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결국, 마감 당일 어찌어찌 제출했다. 당선은 언감생심, 기한 내 열다섯 편 털어낸 일만으로 만족했다. 대신 이 기세를 몰아 앞으로 더욱 열심히 쓰리라 마음먹었다. 근데 그렇게 속절없이 한 달이 흘렀다. 노트북 앞에 앉기가 죽기보다 싫은 상태다. 의무감에 몇 줄씩 쓰다 제풀에 지친다. 부서 이동 등으로 한창 회사 업무가 심란했던 탓도 있으나 이유 없는 방황이 당황스럽다. 번아웃과는 뭔가 다른 상태. 한 번 가출한 글쓰기 리듬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아, 글쓰기도 운동과 같겠구나.
‘글은 엉덩이로 쓴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취미처럼 쓸 당시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글쓰기로 궁지에 몰리고 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글쓰기에도 근육이 있는데, 버틸 수 있는 한계를 한참 넘어 제대로 다친 거다. 평소 키우지 않은 탓이다. 덕분에 안 그래도 가벼운 엉덩이가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다닌다. 나름 글쓰기 근육이 있다 자부했었는데. 막상 웃통을 까 보니 부끄럽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글쓰기 약골이다. 체력도 근육도 저질이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진 운동선수라도 기초 체력이 부족하면 역량을 만개하기 어렵거늘, 범재(凡才)의 글쓰기에선 오죽할까? 지금은 후회해봤자 소용없으니, 이 악물고 재활 운동에 돌입했다. 지금 쓰고 있는 글이 첫 번째 재활 코스다. 스스로 살살 달래 가며 쓰고 있으나, 여전히 고통스럽고 좀이 쑤신다.
문득 크로스핏 1일 차가 생각났다. ‘조각 같지 않아 그렇지,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던 근거 없는 자신감이 처참하게 박살 나던 날이었다. 그래도 삼십 년 이상 불량스럽기만 하던 몸은 그 날을 시작으로 결국 달라지고 있다. 정자세로 턱걸이 한 개도 벅차던 몸뚱이가 대여섯 개까진 어찌어찌 버틴다. 운동 십 분 만에 땅바닥을 기던 몸이 지금은 마지막까지 따라붙을 정도로 바뀌었다. 스스로 상태를 깨달은 뒤, 일 년 동안 꾸준하고 아파했던 결과다. 글쓰기도 그럴 거다. 이번처럼 숨이 턱끝까지 차봐야 숨겨진 진짜 체력을 볼 수 있다. 아마 올해 해보지 않았다면 내년 이맘때쯤에야 지금의 깨달음을 얻었겠지. 혹은 영영 몰랐을 수도 있고 말이다. 그래서 조금 기쁘다. 최소한 올해에는 본의 아니게 ‘글쓰기 근육량 검사’를 받아본 거니까. 스스로 서있는 위치를 파악했으니 내년에는 더 나은 글쓰기 근육을 가질 수 있도록 꾸준히, 조금은 아파보련다. 이것이 올해 끄트머리에 서 있는 글쓰기 약골의 회고이자 반성이며, 며칠 뒤 찾아올 내년을 위한 굳은 다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