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를 마주했던 건 유년의 어느 새벽이었다.
아침의 집은 항상 적막했다. 안 그래도 조용한 집인데 평일 아침은 그 고요함의 무게에 더 짓눌렸다. 서울로 떠난 누나의 방은 텅 빈 침대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아침 일찍 출근한 엄마가 남겨둔 밑반찬 몇 개만이 나를 반겨줬다. 어린 나의 아침을 함께 해주는 이는 공영 방송의 아침 프로그램이었다. 푸근한 진행자들이 나와 전국의 맛과 멋을 소개해주는 방송. 조그만 앉은 다리 상을 거실에 내어놓고 밥과 반찬 몇 개를 두고 앉기만 하면 되었다. 이름하여 세상의 아침은, 내게 아침을 시작하는 창이었다. 어느 시골 농촌의 노부부와 시시껄렁한 농담을 나누는 진행자를 보며 나는 그렇게 혼자 밥 먹는 방법을 배웠다.
고래를 마주했던 건 유년의 어느 새벽이었다. 다른 날과 다름없이 홀로 등교 준비를 하던 어느 날, 나는 십오 층 창문 너머로 나를 바라보는 커다란 고래를 발견했다. 고래는 창가에 살짝 기대어 거대한 눈으로 나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검푸른 등과 회색빛 질감의 배, 끔뻑이는 한쪽 눈은 창밖의 아파트 숲과 부조화를 일으켰다. 고래는 눈을 두어 번 감았다가 뜨더니 소리 없이 사라졌다. 고래가 사라진 풍경엔 빽빽이 들어찬 아파트만이 가득했고, 그 사이로 추운 냉기가 창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아침 식사는 대게 단출했다. 밥과 국, 반찬 두어 개. 구십 년 대에나 유행했을 후줄근한 식탁보를 들어내고, 개수대 한 편에 쌓여 있는 크린랩으로 반찬을 감쌌다. 밥은 일 분 삼십 초, 반찬은 다 같이 이 분. 전자레인지에 그릇을 들여놓고 화장실로 향했다. 유년의 나는 겨울의 화장실이 그리도 싫었다. 낡은 아파트의 화장실은 항상 냉기가 감돌았고, 그 냉기를 뚫고 샤워를 하는 건 언제나 겁이 났다. 샤워기에서 따뜻한 물이 나오는 데엔 시간이 좀 걸렸다. 나는 항상 오들오들 떨며 샤워기를 뜨거운 물에 맞춰놓고, 물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렸다. 사실 더 큰 걱정은 오 분의 샤워를 마친 후였다. 화장실 문을 열면 방바닥에 가득 쌓인 추운 기운이 몸을 감싸곤 했다. 추위가 나를 집어삼키기 전에 옷을 냉큼 입어야만 했다.
고래를 만난 건 그 순간이었다. 겨우 온기로 덥힌 나신의 몸을 화장실 밖으로 빼내려는 찰나, 적막한 집에서 홀로 울리는 전자레인지의 종료음이 멈출 즈음, 수건과 내복을 순식간에 갈아입으려는 순간, 고래는 창문 밖에서 커다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추위, 외로움, 유년의 고독, 불가해한 삶에 대한 불이해, 혹은 몽정의 징후, 뭐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나는 그 하얀색 형광등 아래서 고래를 마주했다. 추운 겨울이었고, 도시는 회색빛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고래를 마주했던 건 유년의 어느 새벽이었다. 그리고 고래는 그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서울에 있는 누나는 집에 발걸음을 끊었고, 엄마가 여전히 두 시간의 출퇴근을 했지만, 고래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추위를 피하는 방법, 외로움을 물리치는 방법을 배웠고, 고독을 읽으며 이해하지 못할 삶을 삼켜버렸다. 일찍이 삶에 순응한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유년의 삶 또한 견뎌내는 것, 사실 모든 삶의 순간순간에서 우리는 각자의 무게를 견뎌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고래를 마주한 건, 오늘 아침이었다. 오랜만에 들린 본가를 새벽같이 나서며 화장실 문을 열었을 때 나는 고래를 느꼈다. 방은 따뜻했고, 창밖 풍경 또한 초가을의 녹음으로 바뀌었지만 나는 고래의 존재를 느꼈다. 그 거대함, 그 외로움, 그 고독, 그곳에는 분명 고래가 있었다. 늦은 대화로 여전히 잠이 든 부모님을 깨우랴 조용히 짐을 쌌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과 못다 한 업무가 담긴 맥을 가방에 쑤셔 넣으며 고래를 노려봤다. 나는 더는 외롭지 않아. 고독은 내게 자양분이 되었고, 나는 그 고독을 사랑하게 되었어. 그러니, 나는 네가 두렵지 않아. 하고 고래에게 말을 건넸다.
여전히 삶은 불가해하지만, 그 끄트머리를 잡은 심정이다. 고래를 마주했던 건 오늘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