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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짱작가 Dec 19. 2019

나는 왜 3만원의 실패를 하게 되었나?

feat. 냉정한 이타주의자



| 처음이자 마지막 기부


3년여 전 약 1년간 자선 단체에 기부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국내 세X브XXX 이라는 곳이었는데, 취약계층 또는 소외된 아이들을 주 대상으로 지원하는 단체였습니다. 해당 단체는 많은 대중매체 또는 아이들이 자주 가는 시설(아쿠아리움, 놀이동산) 등에서 심심치 않게 홍보하는 모습을 보셨을 겁니다. 책 이기적 이타주의자를 읽으면서 '내가 여기에 왜 기부를 했지?' '1년 이상 하던 기부를 왜 그만두었지?'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실제 기부를 한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그냥 내가 부모로서 평소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던 아이들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특히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태어난 이후에는 더욱 여기저기 아이들이 관련된 이야기는 차마 끝까지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아이들의 일이라면 많은 부분이 공감되다 보니 이런 활동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나 봅니다.(결혼 이전에는 전혀 이런 느낌을 알 수 없었으니 최소 저에게는 부모의 심리를 제대로 파고들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래서 아무 이유 없이 다른 단체는 확인하지 않은 채 생각남 김에 바로 홈페이지에 접속해 월 3만 원씩 기부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1년여간 기부를 하는 도중 자선 단체의 비리에 대한 뉴스를 접하고 역시나 어떠한 확인이나 검증 없이 그때의 배신감으로 단칼에 후원 취소를 하였습니다. 이후 해당 단체에서 얼마간 재 가입을 권유하는 연락을 심심치 않게 받았습니다. 하지만 인생에 처음 기부란 곳에서 배신감을 느끼니 이젠 기부단체라는 말만 들어도 색안경을 끼고 부정적인 시선으로만 바라보게 되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남을 돕고 싶다면 행동의 결과를 생각하지 않은 채 단순히 자신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자의적 판단을 통해 배신감이라는 결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나는 왜 3만원의 실패를 하게 되었나?


왜 나는 첫 기부를 실패로 끝맺게 되었을까요? 단순하게 따져봐도 실패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지나가는 누군가가 나의 걸음을 막으며 우리 아이를 위해 돈 좀 빌려주세요?라는 말에 선뜻 돈을 빌려주고 얼마 후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면 돈을 빌리던 사람은 아까 옆에 있던 아이를 내팽개치고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듯이 저 멀리 혼자 도망가는 상황을 보며 어이없이 사람에 대한 배신감을 안고 지내는 것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우리는 왜 유독 기부 또는 봉사라는 말이 들어가면 또는 자신의 과거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된 사람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아무 이유 없이 무장해제된 채 마음이 끌리는 대로 가능한 우리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려고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남을 도우려 할 때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무턱대고 행동으로 옮기곤 한다. 숫자와 이성을 들이대면 선행의 본질이 흐려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탓에 세상에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만다.


인간의 심리를 파고든 마케팅의 일환이 큰 작용을 하겠지만 더 큰 이유는 이런 선행에서도 냉정한 판단과 차가운 가슴을 가지고 임한다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회의 영향도 있을 겁니다. 차가운 가슴을 가진 사람, 냉혈인 등으로 생각하며 일반 사람보다 인간적이지 못한 사람이라 손가락질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야구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롯데 자이언트의 홈경기에서 이따금 파울볼을 잡은 사람 주위로 "아주라! 아주라!"라는 말을 듣거나 비슷한 상황의 경험을 해보셨을 겁니다. 파울볼의 경우 어른이 경기를 관람하는 아이들을 위해 조금 양보하라는 의미로 생긴 이벤트인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배려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처럼 변질되어 무조건 줘야 하며 심지어 아이들이 글러브를 끼고 공을 주운 사람의 주의를 어슬렁거리며 공을 주지 않으면 인상을 쓰는 모습을 종종 보곤 하였습니다. 심지어 공을 아이에게 주지 않고 가방에 넣기라도 하는 날에는 주위 사람들의 야유와 죄인이 된듯한 상황을 경험하기까지 합니다. 꼭 주기 싫으면 계속되는 야유를 피해 잠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라고 하더군요. 내가 주고 싶으면 주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가져도 되는 것인데 죄인이 된 마냥 사람들을 피해 숨어 있다가 다시 몰래 들어와 경기를 관람해야 하다니, 어찌 보면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책 '냉정한 이타주의자'에서 효율적 이타주의(effective altruism)라는 내용을 설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능력으로 세상을 얼마나 바꿀 수 있을까?를 자문하고 증거와 신중한 추론으로 그 해답을 찾아 나가는 것이다. 착한 일을 할 때도 과학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효율적 이타주의는 말 그대로 어떤 방식이 '가장' 좋은지 따져 보고 그것부터 먼저 실천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효과가 큰 선행은 따로 있는 만큼 사전에 실효성을 따져 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말씀드린 '아주라' 이벤트 와 필자가 경험한 기부를 보더라도 처음 시작은 아주 단순하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순수한 마음으로는 절대 상호 모두 만족할 만한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없습니다. 누구 하나 실망하거나 피해를 보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으며 심지어 상호 간 모두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작은 선행이라도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공정한 방법을 사용해 어떤 선행이 가장 유익한지를 따져야 할 것입니다. 만약 '아주라' 이벤트를 진행하면서 아이들에게 과도한 욕심과 공을 주지 않았을 때 주위에서 하는 야유와 폭언을 아이들이 그대로 듣는 상황이 빈번하게 일어난다면 해당 이벤트는 전적으로 중지해야 옳은 상황이겠죠.




| 효율적 이타주의자


여기 두개의 영상이 있습니다. 한 영상은 자신도 넉넉지 않은 형편의 남자가 하루를 살아가면서 작은 화분부터 동물, 길거리 판매상, 노숙자 모녀 등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모두를 도와주며 살아가며 아무런 대가 없이 매일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주변의 시선은 아량곳 하지 않으며 자신의 행복과 사람에 대한 깊은 믿음으로 매일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며 선행을 하여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조금씩 사랑과 믿음을 가지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게 됩니다.

다른 영상은 길거리에서 구걸을 하며 그의 앞을 지나가는 몇몇 사람이 가끔씩 돈을 주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한 노숙자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젊은 여인이 그의 앞을 지나가다 그를 발견하게 되고 수중에 가지고 있는 돈의 일부를 주려던 찰나 무슨 생각인지 돈을 다시 지갑에 넣어두고 가던 길을 재촉합니다. 이후 그 여인은 생수를 한 박스 짊어지고 나타나 노숙자 앞에 내려놓고 그중 한 개를 집에 돈을 주고 구입한 후 떠나게 되고. 이후 지나가던 사람들이 노숙자 옆에 있던 생수를 보며 하나씩 구입하는 것을 지켜보던 노숙자는 이전과 다르게 생기 없는 얼굴로 남들이 던져주는 돈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대가로 물건을 판매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는 두 영상의 남자와 여자 중 누가 더 잘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이타적인 행동을 했을까요? 단순한 이해로는 두 영상 모두 좋은 선행을 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냉정한 판단과 과학적인 근거를 따져서 이야기해본다면 분명 두 영상 중 더 나은 선행을 이야기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과를 가늠할 때 다른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했다면 어떤 결과를 낳았을지 별로 생각해 보지 않은 경향이 있는데, 그래선 안된다. 중요한 건 '누가' 그 일을 해냈느냐가 아니라 그 일이 '효과'가 있었는지다.


남자는 길에 있는 화분에 물을 주기 위해 2층에서 떨어지는 물을 화분에 쏟아지도록 화분을 움직이고, 지나가는 길거리 판매상의 수레를 끌어주며, 주인 없는 개에게 먹이를 주고, 노숙자 모녀에게 일정 금액의 기부하는 등 하루에 다양한 부분에 선행을 베풀면서 다방면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여자는 단지 한 사람의 구걸하는 노숙자에게 돈 대신 물건을 전해주면 구걸이 아닌 판매를 하는 사업가가 되는 기틀을 마련해 줍니다. 남을 베푸는 선한 행위에도 성과와 결과를 생각해 본다면 필자는 여자의 선행이 효율적인 이타주의적 성향을 가지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물론 남자의 경우와 같이 사람의 믿음과 사랑에 대한 선행이 잘못된 기부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나은 세상,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하며 즉각 해결해야 할 문제는 무엇이고 나중으로 미뤄도 되는 문제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필자 또는 우리의 행동으로 어떤 결과가 발생할 수 있는지, 또 그 결과는 언제 나타날 수 있는지를 따져 본다면 좀 더 효율적인 이타주의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과학적 사고

우리는 살면서 항상 과학적 사고를 길러야 한다고 종종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과학적 사고는 사실 사전적 또는 학술 적으로 정의된 용어가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러 대중 매체를 통해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용어 중 하나입니다. 그럼 과학적 사고란 무엇을 뜻할까요? 개개인의 위치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필자는 기존 지식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반성'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과거 필자의 기부 경험을 통해서 기부란 단순히 인간의 따뜻한 마음만 가지고 선행되는 것이 아니라 효율적인 방법을 통해서 기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의 변화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보편 지식의 경우 의식적으로 반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편 지식은 사회에 널리 받아들여져 있고 사물의 보편적 양상으로 우리 사고의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에 대체로 수정하려고 노력을 하지 않으면 사회 문화 속에 깊이 잠재해 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우선 나부터 반성하고 노력하는 자세로 가까운 주위 사람부터 변화하려는 노력을 시도한다면 조금씩 조금씩 사회의 변화를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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