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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스테라 Apr 27. 2023

해서는 안 되는 말

(마지막 말은 참아야 해요.)

초등학교 때의 일이다.

나는 악성곱슬머리인데,

당시에는 지금처럼 곱슬머리를 펴주는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

삼각김밥 머리를 하고 다녔다.


심한 곱슬머리 때문에 어떻게 해도 머리가 예쁘지 않고 없어 보였는데,

우리 반에 한 남자아이가 유독 나의 곱슬머리를 가지고 놀렸다.


싸리 빗자루 같아.
수세미 같아.
거지 같아.


여러 번 이렇게 놀려서 너무 속상했다.


그 친구는 우리 부모님 지인의 아들이었는데

굳이 집안 형편을 비교하자면 그 친구집이 더 잘 살았다.


그런데 그 친구는 어느 순간부터 머리도 잘 감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는지 가까이 가면 냄새가 났다.

당시 남자아이들은 까치머리로 학교에 오거나 축구를 하고 나면 발냄새가 진동하기도 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다시 내 머리를 거지 같다고 놀렸는데 나는 그날따라 지지 않고 말했다.


넌 냄새나거든?


갑자기 그 친구가 팔을 눈에 갖다 대더니

엉엉 울었다.


담임선생님이 보시고는 자초지종을 물었고

나는 그 친구가 나를 거지 같다고 해서

그 친구에게 냄새난다고 했을 뿐이라는 설명을 했다.


선생님의 표정이 굳어지시더니

나만 복도로 불러내셨다.

그리고 손바닥을 내라고 하시더니

자로 세게 내리치셨다.


나도 잘못했지만 그 친구는 더 잘못했다고 생각했는데 황당했다.

화가 난 선생님이 흥분한 목소리로 이어서 말씀하셨다.


냄새나는 애한테 냄새난다고 하면 어떡해.

선생님의 체벌이유가 더 어이가 없었고

선생님이 나만 때린 것이 차별이라고 느꼈다.


'냄새'는 '거지'의 부분집합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더 큰 놀림을 받았다고 생각했었다.


나중에 부모님께서 대화하시는 것을 듣고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그 친구의 어머니가 어떤 이유에선지 집을 나가셨고 그 친구 부모님은 이혼할 것이며 그 친구는 다른 곳으로 이사하고 전학 갈 거라고.

내가 살던 곳은 한두 다리 건너면 집안 사정을 알 정도로 소도시라서 아이들이 상처받을까 봐 염려되었는지 아버지가 아이들을 데리고 다른 지역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때도 나는

그 냄새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시간이 좀 더 많이 지나고 나서야 그날의 선생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선생님은 그 친구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과 부모님의 문제로 인해 상처받은 상태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그 친구를 애처롭게 여기던 차에 내가 냄새난다고 말한 것이었다.


선생님은 더 자세한 말로 나에게 말씀하시고 싶어도 그 친구의 집안 사정을 나에게 구구절절 설명하실 수도 없으니 아무 말 같은 말을 하신 것 같다.


그 친구가 거지라고 놀려도

나는 거지가 아니었지만

그 친구에게는 실제로 냄새가 났다.


내가 그날 말한 냄새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의미의 냄새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 아이에게 수치심을 일으키는 말,

바로 모멸감을 주는 말이었다.


그 친구가 전학 간 이후에는 소식을 알 수 없었다.

나도 다른 도시로 이사하고 전학을 했고 부모님들 간에도 연락이 끊겼기 때문이다.


이 일이 30년 넘게 흐른 일인데도

그 친구가 팔을 눈에 갖다 대던 순간이

생각나면 마음이 저릿하고  잊히지가 않는다.

사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 아프게 느껴진다.




모멸감.


변호사가 되어서 형사재판을 받는 피고인을 위해

피해자에게 연락하여 합의를 중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한 사건이 아닌데도

합의금을 제시하면서 사과를 드려도 피해자가 끝내 합의해 주지 않거나,

과도하다 싶을 정도의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중재가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바로 단순한 범죄피해가 아니라

피고인으로부터 모멸감을 느낀 경우이다.


강력사건을 저지른 피고인들 중에는 초범이 더러 있다.

피고인이 과거 피해자였던 경우이거나

피해자로부터 모멸감을 느껴서

원한이 생긴 경우이다.


어떤 관계에서든

마지막 말만큼은 참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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