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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군대 이야기를 들어 드리다.

by 몬스테라

법원 앞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다른 테이블에서 대화하는 목소리가 커서 나는 거리가 좀 있었는데도 대화 내용을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어떤 검사가 자신의 군법무관 시절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나름 재미가 있어서 빠져 들었다.


군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검사의 앞에 있는 사람이 물었다.

“검사님, 그런데 군사법원은 일반법원에 비해서 형이 낮은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그건, 입대 자체를 처벌로 보기 때문 아닐까.”

"ㅋㅋㅋㅋ"


계속 듣고 있던 나는 문득, 내가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군대 이야기를 들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기, 선배, 상사, 지인.. 이제는 70대 이상 필요적 국선 노인 피고인 분들의 군대 이야기까지..


그런데 나는 정작 친정아버지의 군대 이야기는 제대로 듣지를 못했다. 친정아버지는 베트남전에 참전하셨고, 우리 집에는 친정아버지가 병원에서 들고 왔다는 미제 바셀린과 약이 유물처럼 있었다.


그냥 ‘먹고 살기 어려워서 월남전에 자원해서 참전했었다’는 정도만 들었고, 친정아버지가 베트남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아버지와 나는 조금 어색했기 때문에 둘이 앉아서 군대 썰을 풀 기회가 잘 없었고, 나도 별로 궁금하지 않아서 물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폐암 3기이고 항암치료를 위해 입원을 앞두고 계신다. 입원하시기 전 아버지와 도란도란 같이 있고 싶어서 남편과 아이를 두고 친정에 갔다.


아버지가 오래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나는 비로소 아버지의 인생이 궁금했다.

그리고 평생을 해외여행 한번 다녀오지 못하신 분이 유일하게 해외에 나간 경험이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새삼 기구하게 느껴져 군대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방에 들어 앉아서 내가 먼저 물었다.

“몇 살 때 베트남 가셨어요.”
“24살 때.”
“왜 가기로 하셨어요.”
“집은 너무 가난했고 그 시골에서도 나는 못 배우고 돈도 없고 일자리도 잘 없으니까 앞길이 깜깜했지. 거기 갔다가 오면 돈을 좀 모을 수 있을 거 같더라고.”

산골에서 7남매 중 넷째이자 둘째 아들로 태어난 아버지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중학교밖에 못 나오셨다.


영화 ‘집으로’에 나오는 집과 똑같이 생긴 아버지의 집에는 나의 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와 고모할머니들과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들, 큰아버지, 삼촌이 살았다. 부엌에 외양간이 들어와 있어서 집 안에 소가 있는 구조의 집이었다. 그 열악한 곳에서 엄청난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 농사를 지었지만 돈을 벌기보다는 자급자족하여 밥을 먹기도 힘들었다.


그곳은 면소재지 재래시장에 가려고 해도 산티아고 순례길 같은 길을 걸어야 했던 산골이고 지금 가보아도 이런 데에서도 사람이 살 수 있구나 싶은 곳이다.


아버지는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가려고 나무를 해서 파는 일을 해보고 애를 써 보았지만 책 한 권 값도 마련을 못 하는데 어떻게 학교를 더 다닐 수 있겠냐고 하셨다.

아버지는 1972년 군 복무 중 참전했고, 당시 월남전은 수년간 이어져 수차례 파병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맹호부대’ 소속으로 파병되었다고 한다.

“뭐 타고 가셨어요?”
“배.”
“배는 어디서 탔어요?”
“부산에서.”
“그 먼 곳에 가는데.. 할머니 할아버지가 배 떠날 때 나와서 손도 흔들고 그랬어요?”
“아니..”


앞이 너무 깜깜해서 더 깜깜한 곳으로 떠난 24살의 아버지.

일주일간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디에서 계셨어요?”
“퀴논. 퀴논에서 있었어. 거기서 안케패스 전투가 일어났는데 엄청나게 사람들이 많이 죽었어.”
“계속 퀴논에 있었어요?”
“귀국은 나트랑에서 했어. 나트랑 후송병원에 있다가.”


요즘 멍 하게 계시는 아버지가 외국에서의 그 시간들과 지명, 전투명을 자세히 기억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었어요?”
“아니. 내가 간지 7개월 정도 되었나. 그때 전쟁이 끝나버렸어. 돈도 못 벌고 나는 무서운 것만 보고 식겁만 했지.”
“그럼 몇 달간 번 돈으로는 뭘 했어요?”


“집이 너무 어려우니까, 소를 한 마리 사드렸지.”
“그래서 그 소로 보탬이 좀 되었어요?”
“아니, 사고 일주일 정도 지났는데 소가 갑자기 죽었지.”


나는 탄식하며 들었다. “아.. 밭을 샀어야지 밭을..”

밤에 나는 가족들이 잠든 후 혼자서 휴대폰으로 월남전, 맹호부대, 퀴논, 안케패스..이런 것을 검색하다가 울었다.


아버지는 평생을 자잘한 질병에 시달렸다. 폐섬유화와 전립선 질환으로 계속 약도 드시다가 폐암에 걸리셨다. 암 발병 이전에 아버지가 고엽제 때문인 것 같다고 했을 때도 나는 새겨듣지 않았다. 대체 왜 그랬을까..

베트남전 당시 미군과 한국군은 베트남에 밀림이 많아서 게릴라전에서 불리했고, 풀이 여기저기서 빨리 자라 군대가 주둔해 있는 곳 철조망도 금방 우거져 적의 침투를 알기 어려웠다는 점을 힘들어 했다고 한다.


그래서 미군은 제초제인 고엽제를 개발해서 비행기로 밀림과 그 외 산과 풀이 있는 곳에 뿌렸고, 한국군은 제초제를 뿌릴 도구가 마땅찮아서, 드럼통에 백색가루로 담긴 고엽제를 철모로 퍼서 뿌리고 손으로도 퍼서 뿌렸다고 한다. 그때는 그게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풀이 더 무서웠나 보다.


고엽제는 바람을 타고 날아들고, 고엽제가 뿌려졌던 강에서 군인들은 물도 마시고 목욕도 했다고 한다.

당신은 많이 배우지 못하셨지만 아버지는 자식 여럿을 대학까지 시키시고 뒷바라지하셨다. 평생 일하시고 고생만 하셨다. 내가 태어나서 본 아버지는 마이너스의 손에다가 불운의 연속이라서, 그 전에는 혹시라도 좋은 일이 있지도 않았을까 했는데 아버지는 일생을 통해 그 20대가 가장 힘들었다고 하셨다.


얼마 전 남편이 어디서 상을 받았는데 동남아 여행권 상품권도 함께 받아서 왔다. 그러고는 코로나만 끝나면 장모님과 장인어른을 보내드리고 싶다고 했었다.

그때는 암 소식을 듣기 전이라서 대수롭지 않게 “우리가 가자. 난 베트남 다낭에 가고 싶어. 거기 엄청 좋다네?”라고 했었다.


아버지와 함께 여행지로 변하고 아름다운 도시가 된 나트랑과 퀴논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이제 와서 하게 된다.


나는 이제 시간도 낼 수 있고 퀴논에 가족들을 데려가서 좋은 곳에서 자고 먹으며 여행할 수 있다. 전쟁이 아니라 여행을 하기 위해 그곳에 머물며 아버지의 기억 속 '아프고 무서웠던 퀴논과 나트랑'을 지우고, 힘들었던 청춘에게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은데..


아버지 말씀대로 ‘식겁한’ 기억만을 남긴 채 어쩌면 함께 가지 못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살면서 나는 힘들다는 핑계로 많이 지체했지만, 시간은 지체하지 않고 흘렀다.

앞으로도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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