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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

(영화와 무관함)

by 몬스테라

어제저녁에 걷기 운동 겸 재래시장에 가고 싶어서 버스에 올랐다.

집 바로 앞에 대형마트가 있기 때문에 꼭 재래시장에서 사야만 하는 것은 없지만,

재래시장에서 채소를 살 때는 소소하고 대체 불가능한 행복이 있어서 가끔 일부러 재래시장에 간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20분쯤 가야 하는데, 예전에 내 사무실이 있었던 건물 근처에서 버스가 정체되었다.

문득 창밖을 내다보았는데, 약국 앞에 어떤 할머니가 앉아 각종 채소를 팔고 있었다.


걸어가는 사람들, 인도 위를 달리는 오토바이들 사이에 앉아 있는 할머니가 너무 작아 보였다.

저녁 무렵이었는데 작은 바가지 위에 담아 놓은 채소들은 팔리지가 않을 것 같았다.


그 할머니가 앉아 있었던 곳 길 건너에 작은 재래시장이 하나 있어서

장을 볼 요량이면 그쪽으로 가서 볼 것이고, 할머니 라인에는 병원과 커피숍, 각종 사무실들이 있어서

그 푸성귀들을 사갈 사람들이 많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경험상 알고 있었다.



나는 다음 정류장에서 내려 그 할머니한테 달려갔다.

할머니 앞에 미나리, 달래, 깐 마늘, 상추, 시금치가 있었다.

있는 것이 그게 전부라 한 바가지씩 샀고 별 이유 없이 미나리는 좀 더 많이 샀다.


마트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이고, 직접 농사지으신 것이라니 사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일단 사기는 했는데, 이걸 어떻게 하지 하다가 저녁에 소불고기에 미나리를 넣어 보았다.


오! 정말 맛있었다.

남은 미나리들은 부침가루를 넣고 바싹하게 부쳐 미나리 전을 했다.

미나리 전을 달래 간장에 찍어 먹으니 봄을 먹는 기분.

그 맛을 말로 다 설명하지 못하겠다.



어떤 사람들은 누군가를 일시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그때 그 순간뿐이니 의미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보면 그렇지가 않다.


나는 어린 시절 연년생으로 동생들이 쭉 있어서,

부모님이 힘드셨는지 나를 잠시 시골 할머니 댁에 맡긴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는데, 드문드문 기억이 난다.


할머니는 도라지 농사를 지으셨다.

도라지를 캐면 껍질을 까서 장에 내다 파셨다.

산골 마을이라서 순례길 같은 길을 걸어 장에 가셨다.


머리에 대야를 이고 산길을 통과하고 흙길을 걷고 다시 국도변을 걷고 그래야 도착할 수 있는 장이었다.

할머니가 나를 여러 번 장에 데리고 가셨는데,

어린 나는 할머니의 그 힘든 길을 함께 걸어가서 할머니 옆에 앉아서 하루를 보냈다.


어릴 때는 가난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심심하다고 생각했다.

산길을 돌아가야 해서 해가 지기 전에 도라지를 다 팔지 않으면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머리에 올리고 돌아가야 했다.

맘 속으로 도라지야 빨리 팔려라.. 빌었다.


어쩌다 다 팔리면 할머니는 나에게 ‘보름달’이라는 빵을 사주셨고

우린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이 서서 다니는 앞에 앉아, 길에서 밥을 먹어 본 사람은

매우 근시안적이고 일시적인 도움도 얼마나 절실한지 안다.

나는 재래시장이나 길 가에서 채소를 파는 할머니들에게는

물건값을 깎으려 들거나 더 달라고 하지 않는다.


사가는 사람은 껍질이 없는 도라지였을 뿐이지만,

나는 할머니가 오랫동안 도라지를 키우고, 힘들게 캐고, 껍질을 까고,

장에 갈 준비를 하고, 무겁게 머리에 이고 내려가서 장에 펼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삶이란 아주 작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는 순간순간을 사는 것이다.


어렵고 힘든 일이 많더라도

한순간의 기쁜 일로

살아 낼 힘을 얻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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