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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몬스테라 Nov 08. 2021

세상은 누구에게나 비슷한 질량을 부여한다.

나를 사랑할 시간 - 나에 대한 정의

‘행복은 쌍으로 오지 않고(福無雙至),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禍不單行)’고 했던가.

인생을 살다 보면 쏟아지는 폭우 속에 혼자 떨고 있을 때가 있다.

불행을 맞이할 때도 마찬가지. 한 가지의 불행이 와서 허덕이고 있을 때 다른 불행이, 또 다른 불행이 자꾸자꾸 찾아와 더 이상 뒤로 물러설 곳이 없을 때가 있다.

나에게도 그런 경험들이 있다.

직장에서의 업무 스트레스로 괴롭던 시절이었다. 같은 사무실에서 동료들의 불화, 의견이 자꾸 어긋나고 내가 가진 가치관과 맞지 않는 사람들과의 갈등, 오래 계획하고 구상하여 보고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뒤바뀌거나 엎어지는 좌절. 

즉흥적이지 않고 신중한 성격의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상황이다. 몇 가지의 어려움에 스트레스가 쌓여 있을 무렵, 마음을 나누던 사람과 갑작스레 관계가 단절되었다. 있던 괴로움에 상실감이 덧입혀졌다.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의지했던 사이가 하루아침에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되어버리고 나니 맘 둘 곳이 없어 괴로웠다.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해 방황했다. 또 아이는 학교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고, 나를 불안하게 하는 전화벨이 자꾸 울렸다. 이런 고민을 안고 남편과 대화를 하면 성향이 다른 남편과는 자꾸 갈등이 생겼고, 점점 대화를 피하게 되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같은 집에 살면서도 이야기조차 건넬 수 없는 차가운 사이가 되어버렸다. 게다 아버지의 병환. 소소한 치료니 걱정할 필요 없다며 아무렇지 않은 듯 병원에 가셨는데 오늘 내일 사이 돌아가실 수 있는 위급한 상황이 되었다.

여러 가지 일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던 그때 나에게 들었던 생각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였다. 죽고 싶다 와는 결이 다르다. 그냥 어디론가 증발되어 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원래 없던 존재였던 것처럼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지독한 회피의 작용이 시작되었다. 

분명 ‘신께서는 사람이 견딜 수 있을 만한 시험만 허락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신다.’고 하였는데 도대체 이게 내가 견딜 수 있는 시험이라는 것인가? 또 피할 길은 어디에 냈다는 것인가? 모든 것이 막막했다. 좌절했다. 나에게 한꺼번에 이 많은 것을 주면 어쩌라는 거냐는 생각에 분노했고, 신을 원망했다. 하나씩 하나씩 해결하기도 버거운 문제들을 한꺼번에 던져주어 폭삭 가라앉게 만들고 이겨내라고? 

에라 모르겠다. 그냥 주저 앉았다. 오랜 시간 주저 앉아있었다. 

그리고 머릿속은 점점 텅 비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어느 것도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면 아등바등할 필요도 없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내가 노력하고 걱정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무거워서 눌린 짐들을 하나하나 털어내고 일어나자는 마음이 생겼다.

그 첫걸음이 혼자 하는 산책이었다.     

혼자 걷고, 걷고 또 걸으면서 생각을 비워냈다. 

주머니에 잔뜩 들어 있는 돌맹이들을 하나씩 꺼내어 버리는 심정으로, 걸으면서 조금씩 마음을 비워냈다. 

아직도 버려야 할 것들이 많지만 아주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이제 버리는 법도 조금은 깨달았다. 

인생을 살다 보면 내가 감히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때가 온다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이런 고통의 무게는 나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모양과 색깔은 다르겠지만, 누군가도 나처럼 이렇게 괴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이 가장 크다고 느끼며 살지만, 이 시간 누군가도 자신에게 주어진 짐에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 세상 모든 사람에게 비슷한 질량의 고통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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