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이 도착했다. 생일축하를 받거나 응원이 필요한 날도 아닌데 그미로부터 톡이 왔다. 클릭해 보니 이해인 작가의 <다정한 사람이 이긴다>라는 책이 담겨있었다.
“에세이를 읽다가 다정한 언니 생각이 났어요. 오늘은 내가 언니에게 다정한 사람 한번 해보려고요”
그미는 친한 대학 선배의 아내이다. 두 사람이 연애를 시작할 때부터, 17년 동안이나 모임을 이어가고 있으니 우린 제법 죽이 잘 맞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을 다정하게 대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오랜 지기에게 변함없이 다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그미에게서 듣는 ‘다정하다’라는 말은 어리둥절하면서도 꽤나 뭉클하게 다가왔다. 책이 배송될 주소를 적으며, 그녀에게 다정했던 순간들을 되짚어보았다. 그런데 도무지 생각나지 않고, 그미의 다정함만 떠올랐다. 실없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웃어넘길 줄 아는 능력이 탁월한 그녀. 딱히 언니다웠던 적도 없는데, 늘 내가 하고픈 대로 하도록 따라준 것도 안다. 그러고 보니 그미가 화내는 모습을 본 기억도 없다.
얼마 전 티브이에 명상체험 프로그램이 나왔다. 진행자는 낯선 두 사람을 마주 앉도록 해서, 눈빛으로 서로를 응원해 보라는 주문을 했다. ‘나도 힘든 날, 슬픈 날을 지나왔는데 당신도 그렇겠지요. 지금까지 수고 많았습니다. 정말 잘했어요. 내일도 잘 해낼 거예요...’ 두 사람은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진행자는 내게 잘해주어서 친절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아무런 계산 없이 잘 되길 바라는 것, 그것이 진짜 사랑이라고 말했다. 마주 보던 참가자들은 상대의 눈을 통해, 마치 거울을 보듯 건넨 응원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그미도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다정한 사람이라서 나를 거울처럼 바라봐 주는 거라고. 사랑이 그렇듯 다정도 해본 사람만이 다정을 알아차릴 수 있다.
시간은 매 순간 한정되어 있는데 그 사실을 나이를 먹고서야 자각했다. 요즘은 어색한 자리에 앉아 겉도는 대화를 나누고, 맞춰가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진다. 그럴 때면 자연스럽게 편안한 사람들이 떠올랐다. 장황한 설명이 필요 없는, 대화를 되짚어 보고 후회하지 않아도 되는, 오해라는 말이 끼어들지 못하는 관계들 말이다. 그미가 내게서 다정함을 느꼈다면, 좋아하는 마음에 충실하게 행동했던 어느 한 부분이 닿은 거라 생각한다. 짐을 더 들고, 먼저 움직이고, 쥐고 있던 것들을 나누어도 옹졸함이 계산기를 들이밀지 않는다. ‘기꺼이’는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작은 애정의 표현이다.
감사하게도 울고 웃었던 순간들마다 나를 사랑해 주고, 헤아려주고, 기다려주는 다정한 사람들이 있다.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열심히 살고 싶어진다.
선물 받은 책의 제목처럼 정말로 다정한 사람이 이기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다정한 사람들은 추운 겨울 후-하고 불어먹는 어묵국물처럼 사람을 녹인다. 아침부터 다정한 사람에게 다정하다는 말을 들어서 코가 시큰하다. 그미가 고요하게 내민 다정을 마음에 담아본다. 한동안은, 계절이 바뀌느라 아침저녁으로 서느렇게 불어오는 가을바람도 나를 어쩌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