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잠실역 지하에 있는 롯데월드타워 출입구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잠실역과 롯데백화점 사이에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광장은 사방에서 밀려 들어오는 인원을 처리할 수 있을 만큼 여유로웠지만, 약속 장소로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잠실역 지하에 있는 광장을 약속 장소로 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롯데월드 타워의 지하 1층에서 롯데콘서트홀로 직행하는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기 위함이었는데, 직행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으면 콘서트홀로 가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길이 어려웠다. 나는 여자친구인 솔에게 전화를 걸어서 광장 주변부에 있는 분식집 앞에 서 있다고 이야기했다. 분식집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라서 나는 내 옆에 있는 분식집의 이름을 추가로 덧붙여서 알려주었다. 그녀가 바보는 아니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잠실역 지하광장에서 금방 나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삼 년 전부터 만나기 시작해서 1년 반 동안 사진사와 코스프레이어라는 애매한 관계로 지내다가, 솔이 먼저 고백하고 내가 고백을 받아주어서 연인 관계가 되었다. 그러나 연인이 되었다고 해서 둘 사이의 생활이나 만나서 하는 일들이 크게 변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예전처럼 일주일에 한 번 만났고 식사를 같이 하고 나면 실내 스튜디오나 야외 공터에서 2~3시간 가량 사진을 촬영했다. 촬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내가 차로 역까지 바래다 주는 경우도 있었고, 촬영하는 장소가 역과 가까우면 촬영을 마치고 작별인사를 한 뒤에 그 자리에서 곧바로 헤어졌다. 촬영을 마치고 나서 옷을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다음에 추가적인 액션이 벌어진 적은 한 번밖에 없었다. 이것도 로맨틱한 일이 벌어졌다거나 술을 마시러 바에 갔다거나 하는 일이 아니라, 솔이 갑자기 아픔을 호소해서 촬영을 그만두고 근처에 있는 가톨릭대학교 병원으로 그녀를 데리고 간 적이 있었다. 다행히 큰 병이 아니라 급성 소화불량이라서 당일에 퇴원을 하고, 가족이 데려오겠다고 해서 나는 밤중에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무척이나 걱정을 했지만 그녀의 몸은 건강했다. 다음 날 저녁에 쌩쌩한 얼굴과 목소리로 영상통화를 한 기억이 난다.
솔이 연애 관계에서 특별한 뭔가를 요구하려는 욕망과 의지가 없는 건지, 아니면 내가 뭔가를 요구하려는 욕망과 의지가 없는 건지는 불분명했고, 우리는 거기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를테면 서코에서 다른 코스플레이어를 만나서 둘이 사귀고 있는데 요즘은 어떻게 지내냐, 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그 질문이 암시하고 있는
“진도를 어디까지 나갔어요?”
라는 질문을 간파하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변함없이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러면 먼저 이야기를 꺼낸 상대방은 멋쩍은 웃음을 짓거나 혹은 감동을 받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행운을 빌어준 뒤에 멀어져 갔다. 매번 같은 질문을 듣는 것도 지겹다고 생각해서 건성으로 대답하는 나와는 다르게, 솔은 언제나 웃음 띤 얼굴로 대답했고 그래서 우리는 정말로 행복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구나 하는 마음이 진심처럼 느껴졌다.
사귄 지 1년 반이 지났을 때 내가 오페라 티켓을 주면서 그녀를 초대한 것도, 단순히 행복한 사이를 연기하거나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를 위해 언제나 애써주는 솔을 위한 보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코스프레 촬영을 제외하면 솔과 사적으로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므로, 내심 나는 그녀가 어떤 복장으로 콘서트홀에 들어갈지 기대가 되었다.
촬영을 할 때 솔은 주로 라운드 티셔츠를 입고 아래는 청바지를 입거나, 또는 라인이 드러나는 면바지를 입고 약속 장소를 찾아왔다. 그리고 남들의 눈을 피해서 모자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단촐하게 입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코스프레를 하고 야외에서 촬영을 하려면 빠른 시간에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한껏 기합을 주고 데이트 복잡을 갖춰 입으면 옷을 갈아입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시간이 오래 걸릴 뿐만 아니라 벗은 옷을 가방에 집어넣고 정리하는 것도 무척이나 번거로웠다. 그렇기에 아무렇게나 접어서 백팩에 집어넣을 수 있는 티셔츠와, 세 번 접으면 깔끔하게 가방에 들어가는 청바지는 코스프레를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최고의 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두서 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솔에게서 연락이 왔다. 전화가 왔지만 진동 모드로 설정해 놓아서 전화를 받지 못한 듯했다. 메시지를 읽었다.
[분식집이 두 개나 있어서 찾기 힘들어! (이모티콘) OO분식 맞아?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 말해줄래?]
나는 솔의 번호로 전화를 걸어서, 오늘은 하얀색 와이셔츠를 입고 진녹색 바지를 입고 있다고 말했다. 솔은 분식집의 이름을 기억했지만 문제는 그 쪽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3분의 전화를 끝내고서야 드디어 광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새삼스럽기는 하지만 클래식 공연을 보러 가는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따르는 복장 예절이 존재한다. 남성은 구멍이 뚫린 청바지나 티셔츠, 반바지를 입지 않고 샌들을 신고 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여성은 간편한 일상복 차림으로 입지 않고 치마와 함께 정장을 입거나, 깔끔하고 우아하게 보이는 옷을 입는다. 명확하게 정해진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솔이 입고 있는 옷은 여성용 정장도 아니고 오피스룩도 아니고 레스토랑에 갈 때 입는 옷도 아니었다. 아마 그녀의 집에는 그런 옷들이 몇 벌씩 옷장에 걸려 있기는 하겠지만, 그녀의 선택은 제삼의 길이었다.
솔은 위아래 전부 고딕 풍의 로리타 복장을 입고, 그 위에 캐시미어 가디건을 걸치고 나의 눈 앞에 나타났다. 처음 든 생각은 이랬다. 귀부인? 하지만 21세기에 로리타를 입는 귀부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솔이 입고 있는 옷은 코스프레용 복장도 아니었다. 만약 코스프레용으로 사 둔 옷이라면 내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코스프레를 하기 위해서 의고적인 로리타 복장을 따로 챙겨 온 적은 내 기억에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건 로리타의 유행이 이미 지나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코스프레를 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 중에 로리타를 입는 캐릭터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것도 있어서 나는 당황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까 꽤나 신경써서 옷을 입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하늘하늘한 프릴이 달려 있는 스커트부터 시작해서 단추 혹은 지퍼가 끝까지 잠겨 있는 상의, 마룻바닥을 쓸어도 될 정도의 넓은 소매와 반투명한 하얀색 스타킹까지. 그녀는 완벽하게 로리타 복장을 소화해 내고 있었다. 단 하나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신발은 왜 구두가 아니라 운동화를 신은 거야?”
그녀는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하얀색 스타킹을 입고 있었지만, 동시에 뉴발란스의 여성용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고딕풍 로리타 드레스에는 로퍼나 하이힐이 어울리지, 운동화가 어울리지는 않는다. 아마도 의상에 무지한 나보다는 그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나의 시선이 뉴발란스로 향하는 것을 의식하면서 솔은 빠르게 이야기했다. 다리가 움직이면서 스커트에 붙어 있는 프릴이 흔들렸다.
“오늘은 오래 걸어야 되니까 발이 피곤할 것 같아서 운동화를 신었어. 차려입고 온 옷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뒤에 나올 말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옷에 어울리는 신발은 아니지만 어차피 주의깊게 볼 사람이 없다는 거겠지. 진실을 말하자면 그게 정답이었다. 각자의 목적과 행선지를 가지고 잠실역을 찾아온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타인의 복장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드레스 밑에 신고 있는 신발이 갈색 로퍼인지 아니면 회색 운동화인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흥미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솔이 콘서트홀에 들어갈 때는 몇몇 사람들이 그녀의 복장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 이때는 구두가 아니라 운동화를 신었다는 것이 사소한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신경이 쓰일 수도 있겠지만…… 뭐, 아무려면 좋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현대는 무슨 옷을 입고 다니는지를 두고 사람의 모든 것을 평가하는 시대가 아니다. 이세이 미야케를 입고 메종 키츠네를 입든, 발렌시아가(BALENCIAGA) 로고가 대문짝 만큼이나 크게 찍혀 있는 중국산 짝퉁 티셔츠를 입든, 무인양품에서 파는 인도네시아산 와이셔츠를 입든 아무도 그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평가를 하는 사람이 오히려 현대적이지 않은,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나는 딴 곳을 바라보고 있는 솔에게 말했다.
“가자. 이제 공연 시작까지 30분밖에 안 남았어.”
우리는 관객들의 틈바구니에 껴서 콘서트홀로 직행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이번 공연을 보러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 중에서 남성은, 잘 아는 사람이 티켓을 줘서 반드시 보러 와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남자일 것이라고 명확하게 집어낼 수 있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다음, 연결 통로를 걸어가면 드디어 콘서트홀의 입구가 나온다. 만약 예술의 전당 같으면 IBK 챔버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대략 10분 정도 쉼없이 걸어야 하지만, 롯데콘서트홀의 경우에는 직행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만 하면 바로 입구를 볼 수 있다. 인파의 암묵적인 흐름에 순응하면서 우리는 티켓을 예매한 사람들이 서 있는 줄에 가서 섰다. 나는 올해로 만 24세가 되었고 아직 스물 다섯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가에서 30% 할인을 받을 수 있었다. 어린 나이 덕분에 6만원 하는 티켓 두 장을 96000원에 예매할 수 있었고 나머지는 다른 곳에 쓸 수 있었다. 아직 어디에 쓰겠다는 계획은 없지만, 아마 다음번 식사를 내가 내지 않을까 싶다. 오늘 저녁은 솔이 부담하기로 했다. 우리는 만나기 전에 이야기를 미리 나누었다. 어떤 사람이 보기에는 커플 사이에 그렇게 지불을 철저하게 나누는 것도 애정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솔과 나의 공통점은 둘 다 주변 사람의 눈에 냉정하게 보일 만큼 쿨하다는 것이었다. 만약 우리의 입장에서 말할 수 있다면, 누가 언제 지갑을 열지를 결정하지 않고 다만 상황과 흐름에 맡기는 것이야말로 무책임한 행동이자 불화의 원천이었다.
솔의 로리타에 대해서는 내 걱정이 기우였다는 듯 정말이지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잠깐 동안 콘서트홀에 어울리는 복장이 빅토리아 시대의 로리타 복장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당연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실제로 솔과 비슷하게 가슴이 패인 진주색 드레스를 입고 온 여성이 한 명 있었다. 주위에 남자가 셋 있었는데 그들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수상한 4인조를 손으로 가라키면서 “너보다 더 과감하게 입고 온 사람이 있네?” 하면서 주위를 환기시켰다. 앞줄이 줄어드는 것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솔은 내가 가리키는 방향을 흘깃 보고 나서 다시 앞을 돌아보며 짧게 응답했다.
“저건 과감한 게 아니라 너무 속이 보여.”
어떤 속? 이라고 물어보려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남자 세 명을 보고 나서 솔이 떠올린 이미지가 무엇이었는지 으레 짐작이 되었다. 남자들을 데리고 여기까지 오는 정성이라면……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강남의 사모님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다만 귀부인의 얼굴이 오랜 시간 부를 축적한 ‘사모님’ 치고는 너무 젊어 보인다는 게 나의 쓸데없는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지만 더 추측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서, 나는 솔 옆으로 밀착해서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줄이 길어서 티켓을 받는 데 십 분이나 걸렸다. 이 때는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마스크를 쓰기 전이었으니까 발열체크, 문진표 작성, 손소독제를 뿌리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가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해서 달리 해야 될 일도 없었으므로 여자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트위터에 올라온 트윗을 잠깐 체크했다. 여전히 의미 없는 트윗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손가락으로 밀어서 앱을 종료하고 전원을 끈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우리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서 옆으로 뚫려 있는 게이트로 들어갔다. 숫자로 표기된 게이트 앞에서 키가 작은 직원이 티켓 확인을 하고 있었다. 단정한 제복을 입고 화장을 한 직원은 솔의 로리타를 보더니 놀란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종이티켓을 받아서 자른 다음에 커다란 부분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누가 봐도 남자친구처럼 보이는 나를 보고 나서 짧게 미소를 지었다. 마치 저런 여자친구를 두어서 부럽다는 듯이.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에 불과하니까 실제로는 부정적인 의미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 편이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먼저 들어간 솔은 다행스럽게도 직원의 미소를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