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도착해서 바로 잠들었다가 일어나 보니까 오전 10시였다. 자정을 좀 넘겨서 집에 도착했던 것 같은데, 시계를 보지 않아서 몇 시에 잤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이폰을 확인하니까 솔에게 전화 한 통, 문자가 세 통 와 있었다. 부재중 전화는 아홉 시에 왔고 문자는 어젯밤에 보낸 것들이었다. 어젯밤 자정에 집에 들어간다는 문자가 왔고 열두시 반에 도착했다는 문자가 왔고 새벽 두 시에 맥주를 마셔서 그런가 잠이 안 온다는 문자가 왔다. 늦었지만 답장을 지금이라도 보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세 문자에 한꺼번에 대답하는 긴 문자를 보냈다. 여자친구로부터 전화는 다시 걸려 오지 않았다. 이케아에서 싸게 구매한 식탁에 놓여 있는 2리터짜리 생수병의 뚜껑을 열고 유리컵에 물을 따라 마시며 기억을 되짚어 올라갔다.
어젯밤에 한 이야기들, 여장 코스프레이어인 K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고, 그 밖에는 오페라를 본 짧은 감상이나 다시 촬영을 시작하는 날짜를 잡거나 아무래도 좋을 근황이라거나…… 솔이 보이는 관심은 이상할 정도라서 평소에 다른 코스프레이어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그녀가 왜 K의 이야기에 그만큼이나 시간을 할애했는지 궁금했다. 어찌 보면 자신보다 더 여자다운 K를 향한 흥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남자친구인 나에게 뭔가를 시사하는 행위일 수도 있는데, 그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기에는 머릿속이 정상이 아니었다. 물을 한 컵 마시고서 다시 생수병에서 물을 따라서 한 컵 더 마셨다. 갈증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아서 이번에는 솔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전화벨이 여러 번 울리고 그녀가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잘 잤어?”
“응. 잘 자기는 했는데 어제 우리가 몇 시에 헤어진 건지 기억이 안 나네. 집에 도착한 시간이 열두시 조금 넘었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어서…… 아니, 그보다 어제 집에는 잘 들어간 거지?”
“Yes. 아무 문제 없이 잘 들어갔답니다. 오늘 아침부터 조별과제가 있어서 여덟시 반에 일어났더니 벌써 졸려. 수면 마법에 걸린 것 같아.”
현실에 수면 마법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나는 그녀의 투정을 5분 정도 들어주다가 전화를 끊고 나서 침대에 들어갔다.
그날 만난 뒤로 7월 말까지 솔과 만나지 않았다. 내 쪽에서 솔을 피하지도 않았고 그녀 쪽에서 나를 피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대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내년 3월에 입학할 예정인 대학원 원서를 쓰느라 바빴고, 솔 역시 앞에서 언급한 이유들로 바빴다. 우리는 종종 문자로 연락을 나누었다. 코스프레 촬영 날짜를 정하고, 어디에서 몇 시간 촬영을 할지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누었다. 7월 28일에 사진을 찍기로 하고, 만약 그 날 비가 오면 29일 또는 30일로 연기하자고 했다. 솔은 내가 바쁜 것보다 훨씬, 훨씬 바빠서 문자에 답장을 하는 것도 느려졌다. 아무리 늦어도 하루 안에 답장을 했는데 이제는 사흘 만에 확인하고 답장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연인 사이에서 주로 다툼의 원인이 되는 문제라고 볼 수도 있지만, 답장이 늦어지는 문제로 화를 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솔에게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괜히 걱정이 되어서 전화를 했더니 “아냐. 정말로 바빠서 그래 아오 죽겠어”라고 평소대로 투정을 부려서 얼마간 투정을 들어주었다. 이제는 투정을 들어주는 일에도 제법 익숙해졌다.
지금 이 시기는 솔에게 있어서도, 나에게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서로를 배려하지 않으면 최악의 결과를 맞을 수 있다.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안부를 가끔 묻는 것 외에는 연락을 하지 않았고, 7월 28일에 우리는 약속한 장소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고양이 캐릭터가 프린트된 라운드 티셔츠에 짧은 반바지를 입고 MLB 야구모자를 쓴 간편한 차림으로 솔은 내 앞에 나타났다. 그렇게 대충 입어도 어울렸다. 그녀가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 입는 동안 카메라의 설정과 조명을 체크했고, 하늘이 곧 비가 내릴 것처럼 흐렸기 때문에 가방에 넣어 온 접이식 반사판도 설치했다. 우중충한 흐린 하늘이었지만 아침의 일기예보에 따르면 비가 오지는 않을 것이다. 솔이 <진격의 거인>에 나오는 미카사 차림을 하고 나왔고 나는 익숙한 느낌으로 두 시간에 걸친 촬영을 아이스크림을 먹듯이 가볍게 해치워 나갔다. 광량이 심각하게 부족했으므로 혹시나 해서 가져온 접이식 반사판이 큰 도움이 되었다. 캐논의 DSLR을 노트북에 연결하고 촬영 데이터를 점검하는 동안, 솔은 코스프레의 옷을 갈아입지 않고 내 뒤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사진을 체크하면서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졸업 축하해. 후련하지?”
“아, 고마워. 요즘은 갑자기 할 일이 없어져서 기분이 후련하기도 하고,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있고, 여러 가지가 복합적이라서 하나의 느낌으로 정리하기 힘들어. 코스를 계속 할 수 있다는 건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렇구나. 취업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코스프레를 못 할 테니까 이해할 수 있다. 이번에는 생각보다 좋은 사진을 많이 건졌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나는 그나저나, 하며 운을 떼면서 말을 시작했다.
“네가 저번에 말한 코스어 K에게서 메시지가 왔어.”
“K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응. K가 메시지를 보내서 자기하고 촬영을 하면 소정의 보수를 할 테니까 꼭 한번 촬영을 해 보고 싶다고 그러던데. 사흘 전이었나, 보낸 게.”
약간 높아진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
“K하고 할 거야? 요즘은 딴 사람 촬영은 안 하잖아.”
그건 사실이다. 솔과 연애를 시작하면서 나는 다른 여자 코스프레이어들과 사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횟수를 줄였다. 표면적인 이유는 내가 바빠서 한 번에 여러 촬영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그 아래를 흐르는 표면적이지 않은 이유는 여자친구와 있으니까 다른 코스프레이어를 찍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솔과 내가 연애를 한다는 것은, 이미 업계에서는 널리 퍼진 소문이었기 때문에 내가 표면적인 이유를 말하면 다른 코스프레이어들도 사정을 이해하고 연락을 줄였다. 이제는 더이상 연락이 되지 않는 사람도 몇 명 있었다. 하지만 카메라를 가지고 있는 유능한 사람은 이 세계에 넘치기 때문에 반드시 나를 선택할 필요도 없고, 실력의 측면에서도 그것은 당연했다.
솔은 미카사인 채로 나를 바라보면서 다시 물었다.
“K가 왜 너에게 직접 다이렉트 메시지를 보냈을까?”
어깨를 으쓱했다. 그야, 나도 잘 모르는 일이다.
“K는 촬영할 사람을 꼼꼼하게 고르는 것으로도 유명해. 들은 소문이지만, 한번 사진사가 정해지면 그 사람과 헤어지기 전까지는 영원히 쭉 간다고 하더라.”
“그 말인 즉슨, 이전 사진사하고 관계를 청산했다는 말인가. 어떤 이유가 있어서 그랬는지 혹시 알고 있어?”
“나도 몰라. 보통 일은 아닐걸.”
솔의 말이 맞다면 K가 내게 메시지를 보낸 이유는 제법 분명해서 정보를 가지고 추리할 필요도 없었다. 시간대별로 나열하면 이럴 것이다.
K와 사진사가 결별함 - K가 새 코스를 하려고 사진사를 모집 - 우연히 나에게 인스타그램 다이렉트 메시지를 보냄
그렇다면 질문 1. 왜 하필이면 나에게?
“아마 K는 너에 대한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을 거야. 다른 코스프레이어와 사진을 찍지 않고 오직 나하고만 촬영한다는 소문. 그러니까 K의 입장에서도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은 네게 부탁하는 게 수월하겠지.”
그런가?
어쩌면 K는 내가 찍은 사진이 마음에 들어서 부탁을 해 왔을 수도 있다. 아무리 업계에 사진사가 널려 있다고 해도 실력이 좋은 사람에게 부탁하는 게 맞을 테니까. 그런데 또 하나 의문이 생겼다.
“왜 ‘보수를 준다’는 표현을 굳이 쓴 걸까? 프로도 아닌 내가 촬영을 한다면 어디까지나 취미에 불과한데.”
거기에 대해서는 여자친구도 특별한 답을 주지 못했다. 미스터리한 K에 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는 ‘22세. 서울, 대학생’이 전부였으니까. 나는 장비를 정리하고 솔은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 입고 평범한 차림으로 우리는 역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는 비가 내릴락 말락 해서 우산을 가져온 솔이 우산을 펼치고 내가 그 안에 들어가서 한 우산 아래에 두 사람이 나란히 섰다. 공원에서부터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까지는 멀지 않았다. 아무리 느리게 걸어도 10분이 걸리지 않는다. 천천히 걷다 보니까 어느새 3번 출구 앞에 도착했다. 우산을 접고 지하로 들어가면서 그녀가 남을 품평하는 듯한 말투로 짜증내면서 말했다.
“마음에 안 들어. 왜 하필이면 너야?”
K에 대한 말이 틀림없었다. 왜 너라는 것은 아마 다른 사진사를 구할 수 있었을 텐데도 나에게 보낸 저의가 의심스럽다는 말일 것이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나도 그가 나에게 메시지를 보낸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본인을 직접 대면해서 말을 듣는다면 모를까, 다이렉트 메시지만 가지고 판단하기에는 숨은 의도가 너무나 많았고 또 이상한 일이었다.
역 개찰구에서 여자친구를 배웅하고 나서 나는 택시를 타고 집에 갔다. 오늘은 피곤해서 빨리 집으로 들어가서 얼음을 넣은 콜라나 마시면서 쉬고 싶었다. 집에 와서 주문을 외우던 것처럼 읊조리던 코카콜라를 마시고 에어컨이 켜진 방에 들어가서, 솔에게 다음 촬영 일정을 잡는 게 어떠냐고 메시지를 보냈다. 8월에는 시간이 많이 날 테니까 두 번 이상 만나는 것도 가능하다고 이야기했더니 솔은 무뚝뚝하게 짧은 답을 보내주었다.
“그래. 나중에 봐서 결정하자.”
K의 영향이 아직 남아 있어서 그런가…… 고작 다이렉트 메시지 하나를 보내왔을 뿐인데 이만큼이나 사람 기분을 바꾸어놓다니, 그는 마성의 남자가 아닐 수 없다. 생각난 김에 K에게 이번에는 길게 답신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S라고 합니다.
제안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8월 말까지는 촬영이 잡혀 있어서 9월 초부터 본격적으로 대화를 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수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저는 프로 사진가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취미’로 코스프레 촬영을 하는 사람이라서 교통비나 식비 정도면 모를까 그 이상의 보수를 받기 어렵습니다.
K님의 마음만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연락 주세요.」
7월이 지나가고 8월이 되었지만 솔로부터 어떠한 연락도 오지 않았다. 바빠서 연락이 오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늦기 전에 약속을 잡지 않으면 장소 예약 등의 문제로 촬영이 어려워질 수 있어서 나는 솔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두세 번 울리고 나서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나야.”
“아, 지금 이어폰 끼고 터치해서 전화를 받았거든. 그래. 무슨 일이야?”
“저번에 촬영한 사진 보정이 전부 끝나서 메일로 사진파일 보내줄까 해. 그리고 전화를 길게 할 수 있으면 8월 촬영에 대해서도 잠깐 이야기하고 싶은데.”
“음. 후자는 나도 바빠서 뭐라고 확답을 줄 수는 없을 거 같고, 전자는 네가 메일 주소를 알고 있으니까 그쪽 메일로 보내주면 돼. 힘들 텐데 수고해줘서 고마워.”
“알았어. 대학교를 졸업했는데 뭐 때문에 바쁜지 내가 물어봐도 돼? 비밀스러운 일이면 생략하고.”
솔이 크게 웃었다. 여전히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아하하. 아냐, 우리 사이에 비밀 같은 게 어디있어. 지금 공모전을 준비하고 있거든, 학교 팀원들하고 같이. 스펙을 쌓아야 대기업에 입사 원서라도 내 볼 수 있을 거 같아서 부랴부랴 계획도 없이 뛰어들어서 밤새 작업 중이야. 그나저나, 저번에 K한테 받은 제안은 아직도 유효한 거야?”
유효하다고 할지 그렇지 않다고 할지 모르겠다고 나는 대답했다. K는 이런 식으로 단문으로 대답했다.
「좋습니다. 9월 이후 만나서 소통해보기로 해요. 보수는 소정의 금액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좋네. 배려심이 있는 사람 같아. 그렇지만 주의해. K와의 경험은 네 자신을 크게 성장시킬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우리 사이를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끌어당길 수도 있어. 너는 똑똑하니까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알 거라고 생각해.”
잡담을 조금 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옆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 걸로 봐서 정말로 팀원들과 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방해하는 것도 미안해서 나는 솔에게 추가적인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8월 코스와 촬영도 없던 일이 되었다. 우리는 기약없이 만남을 미루었고, 본의 아니게 K에게는 거짓말을 한 셈이 되었다. 그렇지만 내가 의도하지 않은 투명한 거짓말이기 때문에 그에게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다.